2020년 6월 7일 주일예배 성령강림절 후 1주
천지를 지으신 주님, 이 시간 주님을 예배합니다. 비록 우리가 교회에 모여 주님을 예배하지는 못하오나, 부활하신 몸된 교회되신 주님 안에 우리가 머물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게 하옵소서. 나른한 더위가 조금씩 대지를 덮어오는 초여름에, 지친 마음과 몸을 주님께 기대고 새 힘을 얻고자 하오니, 주님의 생명력으로 넘쳐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충만한 은혜를 부어주시고 믿음주시며 용기주실 줄 믿습니다. 이 예배시간을 통하여 우리의 심령가운데 임하셔서 주의 권능이 넘치게 하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으로 충만케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원근 각처에 있는 우리 교우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
알버트 까뮈의 ‘페스트’라는 작품에서, 파늘루 신부는, 오랑시에서 겪고 있는 전염병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한다. 성경을 통해 볼 수 있다. 재앙은 죄 많은 도시에 찾아왔고, 하나님 앞에 신실한 자는 살아남았으며, 신앙의 선조들은 재앙을 통해 더욱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었다. 그것이 인류의 역사라고 한다. 사악한 사람들은 주님의 타작을 두려워 떤다. 하지만 올바른 사람은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사람들이 그 설교에 많은 감동을 받은 모습이었다. 오늘날도 이런 믿음으로 서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물론 저도 목회자로서 하나님께서 유월절(Passover)의 역사처럼 우리 교우들을 지켜주시고 전염병의 재앙이 문 앞에 왔다가도 다른 길로 지나가길 간절히 바라는 게 사실이다.
실존주의 문학답게 까뮈는 가장 위험한 인간의 관념에 대해 말한다. 자신이 마치 모든 것을 의심의 여지 없이 알고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그것은 악덕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있어도 되는 사람이고, 어떤 사람은 있으면 안되는 사람이며, 죽어도 되는 사람과 죽으면 안되는 사람을 판단할 수 있고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위험한가? 까뮈는 아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당시의 종교인들을 포함해서 패널, 지식인, 모럴리스트들의 허위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오늘날 미디어들을 보면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우리가 온라인 예배를 또다시 드려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조금은 억울하기도 하고, 답답함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스팸문자가 왔다. “제주도 3박4일 고급호텔 숙식제공 단체 20만원. 목사님들 이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제주도 관광에 나섰다가 감염확산의 빌미를 제공해서 물의를 일으킨 목회자들도 이런 문자와 유혹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방역당국에서 그렇게 마스크착용과 손씻기를 당부하고 있는데, 안일하게 구는 사람, 방심하는 사람들도 주변을 다니다보면 많이 만날 수 있다. 조금만 방심하고 안일하게 굴었다가는 이 Covid19 문제를 조속히 해결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온라인 예배로 전환하게 됐다. 우리는 방역지침도 어느 곳보다 잘 지키고 규모도 작으니까, 별문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보다 더한 곳도 있는데, 왜 교회만 그래야 하나 속상해할 수도 있다. 교회에 대해서 소모임 자제를 요청할 뿐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가 세상의 고통에 함께 동참하고 더 선제적으로 방역지침을 따르고 모범을 보이기 위해, 당분간 온라인 예배로 전환한 것에 대해서 너그럽게 양해하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신가, 얼마나 많은 이들이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침묵하시며, 응답하지 않으시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사고의 틀에서 조롱하는 사람도 있다. 신앙인 중에는 회의감을 갖는 사람도 있다. 여전히 이것은 인류에 대한 뜻 모를 하나님의 심판이며, 더 뜨겁게 하나님을 믿으면 재앙이 빗겨간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까뮈는 의사 리유의 입을 통해서 이런 메시지를 전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하늘을 쳐다볼 것이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서 죽음과 싸워주기를 더 바라실지도 모른다.”
재난과 고난 중에 하나님을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맹신에 가깝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다. 우리의 손과 발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은 있는 힘을 다해 재앙과 재난과 고난과 고통과 같은 죽음과 싸워 승리하길 바라신다는 믿음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달려가셨다. 왜? 아직도 죽음과 절망과 고난과 싸워야 할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거기서 향기나는 생명의 꽃이 피어나길 바라셨기 때문이다. 기억하라. 현실에 동참하고, 어려운 현실 속에 들어가 불편과 어려움과 고통을 감내하는 것은 결코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다. 우리 주님의 살아계심이 이와 같기 때문이다.
성령강림절 후 첫 번째 주일에 성서일과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살펴보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해야 할 일을 분부하고 계시다. 오늘 우리에 대한 분부의 말씀으로 들으라.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다.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는 내게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신다.
권세(엑수시아)라는 말은 힘, 능력, 권위, 권리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영어로는 authority(권위)라는 단어로 번역했다. 주님의 우주의 통치자가 되시고 이 땅의 섭리자가 되신다는 믿음은 우리 모두가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착각하지 말하야 할 것이 있다. 이 권세는 누구의 것인가? 우리가 받은 게 아니다. 우리의 것도 아니고 우리가 남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이런 착각에 빠졌는지 모르게, 이 믿음을 등에 업고 때로는 그 권세, 권위가 믿는 자의 것으로 여기며 교회가 세상 위에 군림하려고 했고, 세상에 대해 오만했던 것도 사실이다. 세상의 일에 무모하기도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마치 자기가 그것을 얻은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이것과 맞물린 게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말씀하신다.
요즘 같아서는 기독교인들이 굉장히 오만하게 비칠 수 있다. 누군가를 제자로 삼고, 세례를 받기까지 인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군다나 20에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말씀하시는데, 요즘 현실에서 어불성설 같다. 교회가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자승자박이다. 교회가 누구보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관용과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데, 사회적 갈등과 혐오를 부추기고 정죄하는 일에 앞장 섰다.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야 하는데, 고도의 산업화와 문화화 속에서 교회는 생존을 위해 혐오를 먹고 자라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면 구심점과 단합이 되니 말이다. 교회가 선한 일들을 여타 종교보다 그렇게 많이 하는데도, 결국에는 비난으로 돌아온다. 엉겅퀴와 같은 미움과 혐오와 배척의 씨를 뿌렸기 때문이다. 창조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과학을 무시하고 그것이 마치 온전한 신앙인 것처럼 가르치다 보니, 바이러스 차단을 위해 소금물을 입에 뿌리는 무지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누가 누구를 제자 삼는가? 이런 발상부터 편하지 못하다. 한국교회가 제자훈련이라는 이름으로 범했던 오류들을 반성한 적이 있다. 주님의 제자를 만드는 것이지 자기 제자를 만드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착각 속에 있었다. 교회가 제자훈련은 많이 하는데, 더 인간적이 되고 사랑이 식고 영적으로 어두워졌다. 제자훈련을 수료했다는 것이 무슨 교인들의 계급이나 훈장이나 된 것처럼 영적인 교만에 빠지게 했기 때문이다. 자기의 제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제자가 되도록 해야한다.
그렇다면 제자로 삼으라는 말씀의 전제는 무엇인가? 내가 예수님의 제자가 돼야 한다.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빌3:17)고 했다. 교만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핍박하던 자가 주님의 제자가 됐다. 17절의 말씀이 마음을 누른다.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오늘 우리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예배는 하고 주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참제자가 되지 못하고 불신자와 신자 사이에서 갈등하며 연약한 믿음으로 갈팡질팡하고 있다. 우리의 믿음이 제자 되기에 부족하고 연약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우리를 참제자로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기대하신다. 그래서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를 제자로 불러 분부를 따르길 바라신다.
주님의 권위(권세)는 집권자들과 고관들의 것과 다르다. 그것은 지배하고 명령하고 군림하는 권위가 아니다. 높은 자리에 앉으려 하고 가만히 앉아 대접을 받으며 사람들이 높여주는 수동적인 권세 권위가 아니다. 주님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중략)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말씀하셨다.
따라서 제자로 삼으라는 말씀은 “제자로서 섬겨라.”라는 말씀에 더 가깝다. 그가 누구든 “예수 안에서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자비와 사랑과 용서를 받을 권리와 권한이 있다.” 주님은 그 권세와 권한은 우리의 것, 자기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복음의 대상, 구원의 대상을 선별하고 판단하며, 역으로 정죄하고 혐오의 대상을 만들고 선입견을 갖고 차별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이름으로 때로는 무조건적이고 제한없이 섬기고 헌신하고 사랑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도 마찬가지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몬1:8-9) 왜인가? 교회의 전례와 관습은 쉽게 말로 가르치고 지키게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르쳐 닮게 하는 것은 사람의 말과 행동으로 되지 않는다.
야고보서3:1은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말라.” 말씀했다. 행함이 전제되지 않은 믿음으로는 가르쳐 지키게 할 수 없다. 그 자체가 죽은 믿음이기 때문이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부부를 생각해보라. 아볼로가 성경에 능통한 자였고, 언변이 능한 자였다. 주님의 가르침을 열심히 배워, 사람들에게 그 도를 자세히 설명하고 가르칠 수 있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 뿐이었다. 요한은 주님을 증언하면서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라고 말했다. 아볼로가 이점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를 훌륭한 분으로, 권위있는 선생으로, 현자로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그리스도임을 시안하고 고백하는 단계에 이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 부부는 아볼로에게 논쟁을 일으키는 가르침의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아볼로를 식탁의 자리에 초대해서 아볼로를 섬겼다. 삶의 간증과 주님의 성령 세례를 받은 경험들로 은혜를 나누면서, 어느새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내기 시작했다. 아볼로의 자존심을 지켜주면서도 그의 감동을 이끌어냈고, 급기야 아볼로는 아가야로 건너가 복음을 전하고자는 선교적인 마음이 일어났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아볼로를 격려하고 어디에서 어떤 사역을 하든지 든든한 기도의 동역자가 되겠다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사도행전은 이렇게 증언한다. 아볼로가 은혜로 말미암아 믿게 된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라.”
이 아름답고 따뜻한 부부의 모습처럼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누군가에 대해서 어진 마음으로 배려하고 좀더 신경쓸 수는 없을까?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지적인 우위를 점하고 그를 설득시켜서 깨우치게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겸손히 섬기고 나누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심을 온 몸으로 보이라는 말씀으로 다가온다.
그리스도인일수록 세상의 염려, 근심, 고난의 상처와 아픔에 적극 공감해야 한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의 삶 속에 들어오셨다. 제자들의 생활 속에 찾아오셨다. 고통당하는 이들 곁으로 다가가셨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다가오신다. 공감하지 못하면 주님의 모습이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거나 주저앉지 않으셨다. 어둠에 동화되지도 않으셨고, 포기하지도 않으셨다. 주님 안에서 섬김의 도를 따르고 믿음과 사몽 가운데 사랑으로 담대해져서 주님의 분부를 따르자. 주님은 그 권세와 능력으로 우리를 분명히 도우신다. 주님 안에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가운데 그 권세와 능력으로 기름부어주시는 것이다. 힘과 능력을 주시는 것이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아멘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주님, 주님은 하늘의 은혜와 평강을 들여놓기 위해 세상으로 들어가시건만, 우리는 세상밖에서 구조만 기다리는 오랜 병자와 같았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 우리의 구주심을 믿사오니, 세상 속에서 예수님처럼 섬기며, 분부하신 명을 따라 하늘의 일꾼이 되어 살게 하옵소서. 주님의 가르침을 행하며 참제자로 살면서 소망있는 자의 삶을 살길 원하나이다. 아직 연약하며 믿음이 흔들리고 주저할 때가 많사오니 우리를 주의 권능으로 붙들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우리의 가진 것을 드려 세상의 주인삼았던 것을 내려놓고 주님만 참되게 따르길 원합니다. 세상의 욕심을 내려놓고 더욱 충성과 순종을 해야할 터인데, 늘 유혹에 사로잡히기만 합니다. 이 예물을 받아주시사 우리를 더욱 강건한 주의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이 예물이 주님의 뜻에 따라 쓰여지게 하시고, 상황이 어렵다고 선교와 구제와 봉사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게 하옵소서. 특별히 한주간 우리 교우들의 안위를 지켜주시고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땅의 기름진 복으로 채워주사, 이웃들에게 나누며 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