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22일
피조물을 통해서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가 주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인간의 욕심과 죄악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때에, 복의 원천이신 주님이 주실 위로와 희망을 기대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지치고 피곤한 심령에 새로운 힘과 용기를 더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3:9)
은총과 실천(열하4:38-44)
- 위로
한 주간 무더위와 싸우며 일하느라 고생했다. 오늘도 무덥다. 또 모든 일상에서 주어진 삶의 몫을 책임감 있게 감당하느라 수고 많으셨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시기를 바란다.
어느 한 인디언 부족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 잠깐 쉬면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자기 자신의 영혼이다. 혹시라도 영혼이 따라오다가 이탈하거나 잃어버리게 되지는 않을지 해서 그렇게 하는 거다. 여러분의 영혼은 지금 여러분에게 안착했는가?
4살짜리 아이가 또 다시 어린이집 차량에서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요한이 두리마리의 봉인을 떼서 읽을 수 있는 자가 없어, 크게 울었던 것처럼, 자식을 잃어 위로받기조차 거부할 수밖에 없던 라헬의 곡소리에, 이런 일들의 의미를 다 알 수 없어 함께 울고 싶은 심정이다.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일들이 왜 또다시 일어났는가? 60대의 운전기사는 평소에도 자신은 차량을 살피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것은 교사의 소관이기 때문에,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담당교사와 원장은 이날 부모참관수업행사가 있어서 바쁘고 분주한 상황가운데 미쳐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고 했다. 게다가 이날 차량지도에 나선 사람은 신입교사였다. 그렇다고 해명이 될 수는 없다.
영혼이 달리는 말(馬)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숨 가쁘게 달려가고, 정신없이 바쁘게만 돌아가는 삶은 얼마나 위험성이 많은지를 우리 모두에게 일깨워준다.
이 시간 하나님을 바라보시라. 하나님을 사모하시라. 우리의 영혼을 붙드시고 새롭게 하신다.
태산 같은 걱정거리나 답답함이 있다고 해도, 내일에 대한 전망이 어두워 한숨짓고 있다고 해도, 상처받고 속상하고 괴로운 일이 있다고 해도, 주님을 바라보라. 하나님께서 시원함을 주신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신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는 주님은 정의를 시행하신다. 연약한 자들의 편이 되어주신다는 말씀이다. 강자와 포악자들의 횡포가 지속되지 않도록 개입하신다. 그치게 하신다.
주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셨다. 그날은 무더위가 심하고 건기가 절정에 달할 때였다. 지친 이들을 부르시는 주님은 그 영혼에 대해 시원한 생수와 같은 분이시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치리라 말씀하셨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오호라,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
하나님은 이 자리에 참석한,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은 은혜를 누리기를 바라신다. 거친 광야를 힘들게 걸어갈수록 하나님을 사랑하고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은혜를 채우고 위로와 힘을 얻은 사람은 어떤가?
- 은총을 얻은 자
엘리야가 하늘로 승천할 때,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랐다. 그리고 엘리야가 무엇을 바라는지 물을 때, 엘리사는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했다.”
성령의 은혜를 갑절이나 바랬다. 무엇 때문인가?
사도행전을 보면 사마리아에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있었다. 그는 성령의 역사를 보면서 돈으로 성령을 사려고 했다. 그러다가 베드로에게 책망을 당했다. 그가 성령의 은혜를 돈으로라도 사려고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순수한 동기가 아니었다. 자신의 유익과 이익과 명성에 도움이 되고자 했다. 우리가 성령이든 하나님의 은혜든, 위로든, 힘이든 얻으려는 목적이 시몬과 같지는 않은가? 돈으로 사려고 하지 않더라도, 그 목적 자체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면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다.
엘리사는 무엇 때문에 구했는가?
오늘 말씀은 엘리사의 두 가지 기적사건을 들려준다. 첫 번째는 길갈의 해독사건이다. 두 번째는 보리떡 20개와 자루에 담긴 채소를 100명과 함께 나눈 사건이다. 이것은 엘리사가 성령의 은혜를 갑절이나 구한 이유가 무엇인지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사건이요, 그의 생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길갈에는 흉년이 들었다. 들에서 먹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식물을 채집해서 국을 끓였다. 무리들이 그것을 나눠 먹다가 아우성이다. “솥에 죽음의 독이 있나이다.”(40) 탈이 날 수도 있고, 알레르기 반응으로 피부가 이상해질 수도 있고, 심한 경우에는 죽음에도 이를 수 있었다. 엘리사는 어떤 가루를 가져오게 해서 해독시켰다. 예전에도 어떤 성읍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다. 성의 위치는 좋은데, 물이 좋지 못하여,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때 소금으로 물의 근원을 고치니, 거기에 죽음이나 비슷한 일이 사라졌다.
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보리떡 20개와 자루에 채소를 담아 왔는데, 이것들을 100의 무리들과 나눠 먹는다.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사환이 만류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충분히 먹고 남게 하셨다는 것이다.
엘리사의 시대상과 사회상을 구구절절이 설명할 시간이 없다.
그런데 요약하자면 이렇다. 가뭄, 기근, 빈번한 전쟁으로 평화가 위협을 받고, 어렵게 얻은 수넴 여인의 자녀가 갑자기 죽고, 순수한 동심 세계에 있어야 할 아이들이 지나가는 나그네에 대한 태도에서 얼마나 버릇없이 변하고 왜곡됐는가도 엿볼 수 있다.
엘리사는 그 구한 성령의 은혜를 어떤 데 사용하고,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는가?
이 세상은 사람들의 이기심과 욕심의 독으로 가득하다. 무관심과 그렇게 되면 생명을 보호하고 살피는 일은 등한시 된다.
이효리 씨가, 어느 순간부터 상품광고를 하지 않는다. 자기가 나온 다이어트 제품이 수백만원을 하는데, 지인들이 그것을 막 사대는 것을 보면서 회의감이 들었기 때문이란다. 자기는 돈을 벌기 위해서 광고를 하면 그만인데, 그 피해(?)를 가까운 지인들이 당하고 있었다.
- 살림과 나눔의 실천
1) 생명을 살리고, 세상에서 죽음의 독을 해독하는데, 여러분의 힘과 에너지와 심지어 물질을 쓰라.
엘리사가 솥에 넣은 흰가루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것은 기적을 베푼다는 상징적인 것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모든 은혜와 수단으로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
세상 사람들은 물질을 자기를 위해서 쓰기를 바란다. 그런데 하나님은 주신 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길 바라신다. 이웃에게 나누고 베풀라는 말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주중에, 따릉이를 관리하는 아저씨들을 만났다. 무더위에 물 한 병 대접했다. 처음에는 경계를 하더라. 아마도 사람들이 불평이나 민원을 제기할 일들이 있을 때에만 접근을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곧 긴장을 풀더니,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주변에서 이 무더위에 힘들게 일하시는 분들의 고마움을 생각하고 작은 감사를 표시한 적은 얼마나 되는가? 자기의 권리나 주장만을 위해서 목소리를 내고 피해보지 않으려하기 일쑤다. 사람들은 그것으로 자기를 무시할 수 없는 사람으로 프라이드를 느끼려 하는 사람이 있다. 작은 손해도 참지 못한다. 그래서 갑질을 하기도 한다. 이유 없는 선행, 친절, 배려, 세상에 대해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신 주님의 뜻 아닐까?
2) 나눔의 삶을 살도록 하라. 우리에게 나누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얼마나 되겠는가하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른다. 무료장터라는 게 있더라. 참 좋은 시스템인 것 같다. 자기가 필요 없는 것, 덜어내고, 또 다른 사람은 필요할지 모르니까, 무료장터나눔에 물건을 내놓는다. 경험자의 말을 들어보니까, 간혹 쓰레기 같은 것도 있다고 하더라. 자기가 버리면 처리비용이 드니까, 민망할 정도로 못쓰게 된 것을 내놓고 처리하는 거다. 마음에서는 자기도 선행을 했다는 허위의식을 가질지도 모른다. 물론 극소수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자기에게 필요하고 써야 하는 것인데도, 나누고 베풀 줄 알아야 참 기독교인이다. 오병이어를 가진 아이가 그랬다. 또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온 어떤 사람이 그랬다. 내가 쓰고 남은 것으로 돕겠다는 생각은 세상사람들도 한다. 그러나 나도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누라고 주신 줄로 알고 베푸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신비한 일들을 이루신다.
말레이시아 강성렬 선교사. 성복교회, 사택건축을 위해 기도하던 중. 초등학교 6학년생이 세뱃돈을 모아 보냈다. 12만원. 결국 완성.
한 여인이 어머니와 함께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극중에서 여자 주인공이 너무 큰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서 술을 마시다가 취해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러자 딸이 여주인공의 안타까운 미래를 걱정하며 말한다. “아! 이제 저 여자 어떡하냐?” 그러자 어머니가 말한다. “어떡하긴 뮐 어떡해. 일어나면 콩나물 국 얼큰하게 끓여줘야지. 속 풀리게.”
하나님은 우리가 영혼을 위로하고 돌보고 보살피는 일에, 이와 같기를 바라신다.
내 코가 석 자라서 남에게 이럴만한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인색함을 가지고 있는가? 그러나 오늘 순종이라는 명마처럼 주님의 뜻에 충성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주님을 바라보며, 갈급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채우고, 믿음으로 은혜를 충만히 채우길 바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