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신령? 들신령? (열왕기상20:22-34)

산신령? 들신령? (열왕기상20:22-34)

 

 

2018년 7월 8일

 

영원토록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사랑의 하나님, 복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무더위와 장마로 피해를 염려하는 계절에,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는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잠시 잠깐 부는 바람과 시원한 냉수에도 우리의 마음이 흡족해지는 것처럼 성령의 바람과 시원한 생수의 강이 저희에게 흐르도록 도와 주옵소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며 주님께만 집중하는 예배되도록 임재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2:14)

 

 

  1. 패와 승의 반전

패할 것 같지만 꼭 패하라는 법 없다. 죽을 것 같지만 꼭 죽으라는 법 없다. 안 될 것 같지만 꼭 안 되라는 법도 없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전도서 기자는 말한다.

 

“내가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렇게 본다면, 아합에게 일어난 일은 이런 일에 꼭 들어맞는다.

 

① 아합이 누구인가?

② 그가 아람군대를 물리치고, 유리한 위치에서 조약을 맺는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다. 완전한 대 반전사건이다.

 

아합은 오므리 왕조에 속한 왕이다. 오므리는 성경에서 역대 모든 왕들보다 더 추악한 왕인데, 그 아들 아합은 그보다 더 추악한 왕으로 기록되고 있다. 시돈 사람 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을 했고, 이세벨의 온갖 국정농단을 용인하면서, 어찌 보면 결정적일 때는 그 치마폭에서 숨어 무능하고 무책임함까지 보여주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바알을 위한 신전을 만들어 예배했다. 거기에다 다산의 신으로 알려진 아세라 상을 만들어, 신앙적으로 부패할 대로 부패했다.

열왕기상17장은 한 마리로 예고한다.

“그 이전의 이스라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1. 패배가 뻔한 인생

그런데도 아람과의 전쟁에서 결과가 어땠는가? 아합의 군대가 승리했다.

아합의 군대가 승리할만했기 때문일까?

열왕기상20장이 전하는 내용은 그렇지 않다. 아람의 왕 벤하닷은 모든 군대를 모아 사마리아를 에워쌌다. 전투력 강한 부대를 사마리아성 주변에 배치시키고 아합을 위협했다.

 

3절. “네 은금은 내 것이요, 네 아내들과 네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도 내 것이니라.” 벤하닷의 말이다.

 

아합은 “나와 내 것은 다 왕의 것입니다.”라고 회신을 보냈다. 속국이 되겠다고 하는 차원에서 한 말이다. 아합은 벤하닷의 말을 그렇게 이해한 것이다.

그런데 벤하닷이 하는 말은 단순이 속국으로 삼겠다는 차원의 말이 아니었다. 정말 자기에게 넘기라는 것이다. 명일(明日) 이맘 때 신하들을 보내어 잡아가겠다고, 준비시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당황스럽다.

아합은 신하들을 불러, 이러한 벤하닷의 무리한 요구에 거절하지 못했다고 한다. 물론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신하들은 아합에게, 벤하닷의 말은 듣지도 말고 허락하지도 말라고 의견을 말한다. 하지만 어떻게 안 그럴 수 있겠는가? 어차피 벤하닷의 군대에 짓밟힐 텐데 말이다.

 

우리 역시 결과가 불 보듯 뻔한 일을 맞이한다. 이미 패배를 선언하고 낙심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가 우리 인생의 모습에 해당한다.

 

익명의 선지자가 아합에게 나타났다. 벤하닷의 큰 무리들을 아합에게 넘겨, 승리를 주시리라고 말씀을 전한다.

이스라엘 각 지방의 고관의 청년들이 230명이었고, 그에 속한 군사가 7천명이었는데, 정오에 벤하닷을 여탐했다. 벤하닷과 연합한 왕들은 이미 승리를 자축하며 거하게 취해 있었다. 이틈에, 그 청년들이 나가 각각 적군을 쳐죽이고 크게 승리했다.

 

  1. 승리를 주시는 이유

아합은 하나님의 노여움을 너무나 많이 샀던 왕인데, 불가능한 전쟁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 하나님은 무엇이 예쁘다고 아합왕을 도우셨을까? 열상20:13에서 답을 찾아보자.

 

그것은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칭찬받고 도움을 받을만한 충분한 이유와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현존하심과 살아계심을 알게 하기 위해서 승리를 주신다. 복을 주시고 은혜가 넘치게 하신다. 패배와 절망과 실패가 뻔한 인생에서 하나님은 건져주시고 구해주시고 도와주신다.

 

출애굽할 때, 홍해 앞에 섰을 때도 그랬다. 애굽의 군대가 추격해오고, 홍해에 가로막혔을 때, 하나님은 “너희는 가만히 있어,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14:13) 말씀하셨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는 어려움이 없었는가? 그들은 충분히 건널만한 힘이 있었는가? 그랬다고 해도 건너가자마자 여리고와 싸우려면, 건너간들 그 과정에 힘을 다 잃고 어떻게 여리고와 싸울 수 있겠는가? 그러나 주님은 믿음으로 발을 내디딜 때,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리라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의어린이, 노약자들 할 것 없이, 그 많은 백성들이 마른 땅 같이 요단강을 건너고 철옹성이었던 여리고를 무너뜨렸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서 이와 같이 역사하시고 현존하심을 보여주신다. 믿음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담대하고 용기를 내기를 바라신다.

 

 

  1. 산신령(山神靈)과 들신령(野神靈)

재밌는 부분이 있다. 아람군대가 1차 전쟁에서 패하자, 신하들이 벤하닷에게 말한다. “그들의 신은 산의 신이므로 그들이 우리보다 강하였거니와 우리가 만일 평지에서 그들과 싸우면 반드시 그들보다 강할지라.”

 

벤하닷의 신하들이 하나님을 산신령(山神靈)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니 들에서는 자기들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만 하나님인가? 교회 밖에서도 하나님이신가?

그런데도 혹시 교회 안에서만 믿음으로 살고, 교회 밖에서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지는 않는가? 요즘 이런 교인들이 많다고 한다.

 

세상이 얼마나 약육강식의 살벌한 세상인데, 하나님의 방법과 믿음으로 선하게 살 수 있는가?

주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눅10:3)고 말씀하셨다.

믿음으로 은혜를 사모해보지 못하고,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성령으로 마음이 뜨거워보지 못한 사람들은 여전히 의문을 품을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과 자기의 방법 사이에게 갈등하고 고민할 것이다. 길이 보이지 않고 해결의 조짐이 보이지 않아 주저하다가 자기 생각과 방법대로 한다. 그런데 간절히 기도하라. 주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라. 고초당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십자가 은혜를 붙들라.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았던 제자들이 돌아와 어떤 보고를 하고 있는가?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눅10:17-18)

 

아합왕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벤하닷을 이긴 것을 보라.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힘과 용기를 내며 은총을 구하여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가만히 있으시겠는가? 다윗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라.”(시46:1)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도 교회 밖에서도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믿음의 성도들이 승리를 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바라신다.

 

 

  1. 겸손한 믿음

우리역시 인생이 잘되고 좋은 일이 있을 때, 어찌해야 하는가?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리며 더 겸손히 낮아져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가? 자만해지지 않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핑계로 자랑을 일삼는 일은 하지 않는가? 영적으로 경계할 일이다.

 

28절,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아람 사람이 말하기를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큰 군대를 다 네 손에 넘기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아합은 벤하닷을 완전히 무찔러야 했다. 벤하닷이 항복을 하며 생명을 살려달라고 한다(32). 아합은 어떻게 했는가? 생뚱맞게 벤하닷을 자기와 형제라고 말하면서 화친을 맺는다.

 

물론 평화를 추구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영적인 맥락은 이런 것이다. 타협하지 말아야할 세상의 영적인 문제들에 대해, 혹은 자기 안의 영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생뚱맞은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만 하면 됐지’, 하고 갑자기 자만에 빠지거나, 자기의 자랑을 기쁘게 여긴 나머지, 갑자기 방종하는 믿음의 상태가 된다.

 

42절은 선지자의 말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가 왕께 아뢰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 즉 네 목숨은 그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그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셨나이다.”

 

겸손은 자기를 낮추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칫 겸빙교가 되기도 한다. 자기를 낮추는 것까지는 좋은데, 낮추다가 보니 자기를 축소하거나 믿음과 용기까지 잃어버리기도 한다.

겸손의 본질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이다. 자기 위에 더 뛰어난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그분의 뜻을 들어 순종하는 것.

 

오늘 주님은 우리가 죄인의 허물을 다 벗어내지 못하고, 여전히 연약하고 부족하여 세상일에 실패를 수없이 반복하며 경험한다고 하지라도, 예수의 이름으로 승리를 거두며, 믿음으로 살기를 바라신다.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성령이 충만하기를 바라신다. 이시간 그 은혜로 기름부어 순종하기를 바라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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