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0일
교회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사랑의 하나님, 성령강림절 후 세 번째 주일이자, 환경선교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나른한 더위가 조금씩 대지를 덮어오는 초여름에, 지친 마음과 몸을 주님께 기대고 새 힘을 얻고자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생명력으로 넘쳐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여 주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너희 조상들과 너희 형제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멸망하도록 버려 두신 것을 너희가 똑똑히 보는 바니다.(여대하30:7)
-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과 친족들 간의 대화 내용이다.
20절을 보면 예수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 갈릴리 온 전역에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소문이 퍼졌고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 모여들었다. 그들을 일일이 돌보시느라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그러나 주님은 피곤하다 힘들다 표현하지 않으셨다.
광야에서 모세가 출애굽 뒤에, 수많은 사람들의 시시비비나 갈등과 문제를 판결하느라 눈코 뜰 새 없어 했던 것을 생각해보라.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하고 재판하는 일에만 매진하다가 정작 본질을 놓치는 꼴이 되었다. 보다 못한 장인 이드로가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을 세워, 효율적으로 처리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다가 정작 지도자로서 꼭 해야 할 일과 방향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주님의 경우를 모세의 경우와 수적인 비교는 할 수 없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주님은 그 마만큼 찾아온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는 진심이었고 정성을 다하셨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주님은 어느 누구도 그냥 왔다가 그냥 가듯, 방문객이나 관람객처럼 대하지 않으신다. 치유되길 원하시고 회복되길 바라시며 쉼을 얻고 용기와 위로와 능력을 얻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주님께서 비유를 들어 하시는 말씀을 보면 핵심이나 방향을 놓칠만한 우려도 없다. 오히려 핵심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 이렇게 혼신의 힘을 다하시는 예수님께 친족들이 온 목적은 무엇인가? 21절을 보면, 예수님을 붙잡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에 대한, 사실과는 다른 이상한 소문이 친족들에게 들려왔고, 근심 거리였다.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이 예수에게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이상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들리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가만히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바알세불에 씌어 이상한 행동을 한다니 말이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모함하는 몇 가지 장면이 있다. 나중에는 가족이나 친족에게 이상한 말들을 퍼뜨려 이간질을 시켜 괴롭혔다. 마치 우리나라의 지난 역사의 민주화 과정에서 가족을 협박하고 불이익을 주어 괴롭히면서 투사들의 의지를 꺾으려고 시도했던 것처럼 말이다.
마가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등장은 이렇다.
갈릴리에서 공생애활동을 처음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의 교훈과 가르치시는 것, 행하시는 것과 권위에 놀랐다. 그 모습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1:22).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있는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실 때, 사람들의 반응은 이랬다.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령한 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1:27)
이 소문이 갈릴리 사방에 퍼졌다. 그리고 예수님은 곳곳에서 이적을 행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병자들을 고치셨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시기질투한다.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고 예수에 대해서 내거티브를 하기 위해, 처음에는 경건의 문제를 들고 나왔다. 자신들은 금식을 하며 경건한데, 예수의 일행은 그런 경건이 없다는 것이었다. 입장이 다르다. 늘 배불리 먹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금식하는 사람들이, 가난과 굶주림에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사람들에게 왜 금식하지 않느냐고 경건치 못하다고 비난 할 수 없다. 헤롯의 호화스러운 잔치와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자리는 엄연히 모양새가 다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 부대 없는 금식은 경건의 모양일 뿐이다.
다음에는 예수 주변의 사람들을 문제 삼았다. 죄인이나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접촉한다는 것이다. 예수에 대해 스캔들을 덧씌우고 부각시키려는 전략이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주님 말씀하셨다. 백성을 위한다고 하면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혐오의 눈빛으로 보는 사람들과 그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회복을 시키며 소망과 용기를 불어넣는 분 중에서 누가 더 진심일까? 선거철만 되면 시민을 위하여 봉사하겠다고 떠들다가 당선되고 나면 시민들을 개나 돼지로 보는 사람들의 언행과,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의 언행은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 예수님의 기적과 이적들 그리고 능력은 볼품없어 보이는 데서 나타났다는 것을 기억하라.
아무튼 그도 소용없자, 율법을 범하는 문제를 지적했다. 안식일 법을 지키지 않고 어긴다는 것이다. 불법자로 만들려고 했다. 병으로 고통받고 귀신에 붙들려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컨텍스트가 없다면 예수는 불법자가 맞다. 그러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절실한 치유를 바라는 병자들과 귀신들린 사람들의 절실함에 대한 예수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누구들처럼 가식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님에게 귀신이 들렸다, 바알세붑의 능력으로 그런 일을 하는 것이라는 말을 세상에 퍼뜨리고 가족과 친족들을 찾아가 큰 문제라도 있는 양 왜곡하고 이간질을 했다. 당장은 예수의 능력에 매료당하지만 다 멀쩡한 사람까지 집어삼키려는 사탄의 계획이자 음모라는 것이다.
-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의 또 다른 핵심적인 면모를 깨닫게 해준다.
비유의 요점은 이렇다. 사탄이 사탄을 어찌 쫓아 낼 수 있는가? 분쟁하는 나라가 설수 없고, 집안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안 꼴이 말이 아닌 것처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낸다는 것은 그 가정(假定)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27절을 다 같이 읽어보자.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표현이 거칠기는 하지만, 무슨 의미인가? 주님의 구원사역은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되는가?
사람을 괴롭히고 어지럽게 만들며 불행하게 만드는 것들, 악한 것들을 주님께서 결박하신다. 정신적인 우울을 결박하신다. 육신적인 질병을 결박하신다. 사금파리가 된 상처난 심령을 결박하신다. 회의적이고 불평불만하는 것을 결박하신다. 비꼬는 말투, 헛된 허영심, 거짓된 욕심, 이기심들을 결박하신다. 의심을 결박하신다. 인간의 죄의 본성을 결박하신다. 여러분 심령의 악한 모든 것들을 결박하신다.
왜? 구원하시기 위해서, 천국시민으로 살아가길 바라시기 때문에, 진리로 자유케 되기를 바라셔서,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이 우리의 왕이 되시기 위해서이다.
여러분 속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방향이다. 방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존재의 가치와 의미이다. 하나님의 원래 평가와 점수를 회복하는 것. 자녀가 어떤 방향과 업적에서 큰 성과와 두드러진 업적을 내지 못해도, 그 자체로서 무한한 사랑과 우주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의 가치가 있듯이. 그런 점에서 주님은, 모세는 방향과 속도를 고민해야 했는지 모르겠지만, 주님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나라, 아버지의 뜻, 구원!
-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을 바탕으로 추측해볼 수 있는 점이 있다. 예수는 목수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당시의 계층은 주요계층으로부터 소모품 취급을 하는 계층까지, 8개 정도로 나뉜다고 볼 수 있었는데, 목수(테크론)라는 직업은 6-7번째에 속한다. 국가에서 토목이나 건축사업을 벌이면, 거기에서 하청을 받아 일하는 사람들의 계층정도로 분류할 수 있다. 쉽게 생각하면 가족이 해체되고, 소작인에서 날품팔이로 전락하고 날품팔이는 소모품 같은 존재로 취급받는 상황에서, 누군가를 끌어줄 친족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런데 친족들이 예수를 뜯어 말리기 위해 찾아왔다.
친족들이 누구인가? 예수님이 탄생할 때, 마리아는 처녀인 상태에서 예수가 태어난다는 수태고지를 받고 엘리사벳을 찾아갔다. 엘리사벳은 요셉가문의 친족이었다. 엘리사벳은 아론의 자손이었고, 그의 남편 사가랴는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 중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예수는 유다가문이요, 다윗의 왕가의 족보를 지녔다.
어떤 문제인식을 가지고 왔을까? 그렇다면 문제는 뻔하다.
가문의 명예의 문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비록 몰락한 계층이 되었지만, 그 정체성과 자존감만은 철저히 지키며 욕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곧 자존심이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시절에 학연, 학유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정약용이 유배를 당하면서 가세가 기울어지고 살기가 어려워지자, 아들들이 권세가의 집을 드나들었다. 아버지와는 달리 비굴하게 살아간다는 소문이 정약용의 귀에 들리자, 편지를 썼다.
“너희들은 심중에 사대부의 기상은 한 점도 없고 오로지 권세가의 집안, 호의호식하고 사는 집안을 보고 부러워하고 침을 흘리며 마음속으로 흠모하면서 이 아비는 다시는 돌아볼 필요도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 가령 저들의 권력이 꺼진 불을 다시 일으켜 나를 공격해서 추자도나 흑산도로 보낸다 할지라도 나는 머리카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내가 살아온 날들, 18)
우리가 살면서 경제형편이 어렵고 살기가 팍팍하다고 해서 크리스천의 자존심을 저버리고 마음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비굴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당당해야 한다.
가족의 명예와 편협한 가족주의로는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와 뜻과 구원의 본래 일을 행할 수 없다. 그것은 참 명예나 가문의 영광이 아니다.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29)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심령에서 하시려고 하는 일을 방해하지 말라. 선한 마음으로 이끄시고, 믿음과 확신을 갖기를 바라시며, 담대함과 용기로 일어서기를 바라신다. 위로와 새힘을 주시고 결단하게 하신다. 이런 주님의 은혜를 거스르지 말고, 이 시간 사모하며 받아들이길 바라신다.
-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이다. 마가는 교회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중요한 깨달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31장-35의 일화를 덧붙이고 있다.
처음에는 친족들이 찾아왔는데, 이번에는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왔다. 그리고 조용히 불러내어 만나기를 바랐다. 이 쪽지를 보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평범한 상황이라면 이 내용은, 내용자체가 은혜가 안 된다. 예수님께서 강박증을 가지고 계신분도 아닐 텐데, 가족이 찾아왔으면, 잠시 모임을 중단하고 나가서 뵙고 만나고 올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마가가 처한 시대적인 상황과 환경에서 이 장면을 생각해보라. 70년 유대와 로마의 전쟁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가정은 찢어졌다. 많은 상처와 고통의 흔적만 남았다. 가족 중에서 결원이 생기고, 자기 가족을 지키지 못한 자책과 자기만 남았다는 쓸쓸함이 괴로움을 더해주었다.
마가가 무리라는 단어를 참 많이 쓴다. 무리는 히랍어로 오클로스다. 그런데 마가는 이 오클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이런 경향을 보인다. 오클로는 교회를 구성하는 이들의 원동력과도 같다. 상처와 아픔과 괴로움과 아픔을 가진 이들이 모여서 예배공동체를 이루고, 새로운 의미의 가족을 이루었다. 자연스레 회복이 일어나고 서로 힘과 의지가 되었다. 마치 무리들이 예수를 중심으로 둘러앉았을 때의 경험은 가족과 같았다. 주님께서 악한 것들을 결박하시고 결국에는 어떤 것까지 바라실까? 바로 가족 같은 교회이다.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된 교회는 그래야 한다.
요즘 세대에 어떤 분들은 이런 말을 하는 이들이 있다. 가족이 오히려 남보다 못할 때가 많다고 말이다. 세상이 이렇다면, 교회는 어떠해야 할까?
지지고 볶고 해도 가족 같아야 하고, 좁은 의미의 가족주의라는 울타리를 해체해서 큰 의미의 가족을 이루는 것이 교회이다. 모든 아들들, 딸들이 내 자녀 같아야 한다. 모든 어르신들이 내 부모 같아야 한다. 형제 중에서도 이런 형제, 저런 형제가 있는 것처럼, 모습과 성격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르더라도 그래도 있는 그대로 감싸주고 믿어주고 바라봐줄 줄 아는 가족 같아야 한다.
우리 교회가 비록 작고 연약해보이지만, 진짜 가족이기를 바라는 마음을 소망할 수는 없을까? 단순히 수적으로 증가하고 성장하는 교회가 아니라, 가족의 울타리를 넓혀가는 포근한 가정같은 교회가 될 수는 없을까? 우리의 죄와 거짓과 이기심과 상처와 아픔이 결박되고 주님은 교회가 우리 속에 가정으로 있기를 바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