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19일 추수감사주일
이른 비와 늦은 비로 오곡이 자라게 하시고, 따뜻한 햇볕과 은은한 바람으로 백과를 무르익게 하신 사랑의 하나님, 뜻 깊은 추수감사절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내리시는 이슬과 비, 그리고 햇빛을 먹으면서 자란 열매들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감사의 절기에, 한 해 동안 지켜 주신 주님의 사랑을 감사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저희들이 드리는 감사의 찬송과 예물을 기쁘게 받아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1;1-2)
- 추수감사절의 유래, 현의미
그들은 1년 전의 고통과 절망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신앙과 믿음을 함께 했던 가족과 지인들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나머지들은 생존을 위한 치열한 몸부림을 해야 했다. 누구의 이야기 인가?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의 이야기이다.
추수감사절은 그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영국의 종교적 박해를 피해, 100여 명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2개월간의 모진 항해 끝에 도착한 신대륙에서 절반이상이 추위와 식량부족, 질병으로 죽었다. 고맙게도 인디언들이 도와주었다. 밀, 옥수수 경작법을 가르쳐 주고 사냥한 동물들도 제공해주었다. 이듬해 처음으로 소작물을 얻어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렸다. 인디언들을 초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감사를 무엇으로 다 설명할까?
성경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찾아볼 수 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40년간 여기저기 떠돈 끝에 가나안에 입성했다. 첫소산물로 하나님께 드렸다. 수장절(초막절). 광야에서 만나만 먹던 이들이 땅의 소산물을 먹었을 때의 감격과 의미를 다 설명할 수 없다(수5;12). 40년간을 유랑민처럼 떠돌았지만, 발이 부르트지도 않았고 의복이 헤지지도 않았다. 돌아보면 고난의 세월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여기까지 온 것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험난한 인생의 항해를 하기도 하고 광야와 같은 인생을 지나가기도 한다. 풍파와 폭우과 가뭄과 싸우면서 우리는 고난의 인생을 지나간다. 절망에 길을 잃기도 하고 주저앉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절기를 지키는 믿음과 은혜의 자리로 초대됐다. 이 기회를 통해서 주님은 인생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든든히 서며 감사할 수 있기를 바라신다.
- 한 끼 드세요.
요즘 “한 끼 줍쇼”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한 끼를 구걸하다가 거절당하는 느낌, 이유가 있어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하는 사람은 민망함과 허탈감을 감추지 못한다. 물론 거절하는 사람들도 다 피치 못 할 사연이 있다. 식사의 자리로 초대하는 이들은 참 용감하다.
반대로 생각해보자. 친분이 그리 두텁지 않은 사람에게 사심 없이, “밥 한 끼 합시다.” 이 말은 쉬운 세상인가?
추수감사절에 이웃을 초대하고 음식을 나눠먹는 것은 참 좋은 정신이며 전통이다. 성경도 나그네 대접하기를 소홀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너희도 광야에 있을 때 나그네였고, 그 때를 잊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고마움과 감사를 잃은 시대다. 하나님께 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도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가진다면 오늘 세상이 이렇게 민망하고, 거절에 대한 모멸감에 감정 상하지 않고, 각박하지는 않을 것이다.
추수감사절에 우리의 고마운 이웃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나에게 유익을 주어서, 도움받은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있어준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는 영적인 눈을 뜨기를 바란다.
- 사랑의 감사
2개월 전부터 고린도전서13장을 집중적으로 설교했다. 고린도전서13장은 ‘사랑장’으로 유명하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이번 추수감사절에 깨닫게 하시는 은혜와 감사는 무엇일까, 묵상하면서 이번 추수감사절은 사랑과 그 능력에 대한 감사가 있기를 바랐다.
동영상을 하나보고 생각해보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사랑의 노래’가 아닐까? 대중가요처럼, 아름답기만 한 사랑, 혹은 그 실연에 대한 노래가 아니라 고난도 이겨내고 역경도 이겨내는 영원한 사랑의 노래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복이라고 말하면 흔히 출세, 성공, 부를 떠올린다. 돈을 많이 벌고, 어제보다 오늘 더 많은 실적이나 성과를 이루고, 근심 없는 일상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평범한 일상 속에 웰빙(well being)한 삶이 있어야 감사의 조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께서 자기의 인생을 잘되게 하시고 고난 없게 하셔야 감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었다. 하나님께 무수한 감사와 찬양을 올렸다. 사울의 학대와 수많은 악인들의 괴롭힘에 시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왕이 되었다. 그는 평온해진 어느 날 밤, 옥상을 거닐며 무수한 별들을 보았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고 있다. ‘내가 무엇이기에…’ 라고 말이다.)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8편)
지난 고단했던 시간들에 대한 감사였을 것이다. 모든 고난을 이기고 최고의 자리와 지위에 앉았다. 이제 무엇이 걱정일까? 그는 세상 복의 모든 조건을 얻었다.
그런데, 그는 복된 사람인가? 만약 이런 것들만이 그의 감사조건이었다면,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면 그것 때문에 최고로 불행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보며 근심, 걱정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옥상 아래를 바라보게 됐고, 목욕을 하고 있는 밧세바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음욕이 불일 듯 일었다. 그의 지위와 힘을 이용해, 부정한 짓을 짓고 말았다.
그리고 알다시피, 그의 인생은 눈물의 연속이었다. 자식들이 차마 입에 담기에도 민망한 문제를 일으켰고, 압살롬은 반역을 일으켜 아버지께 패륜을 저질렀다. 충성하던 부하장수들도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했다. 적당히 명령에 불복했다.
그는 복된 사람인가? 그렇다. 불행과 고난을 수없이 겪었지만 그는 항상 복된 자리에 있었다. 그 유명한 시편 1편이 말해주지 않는가?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복된 사람이었다. 왜? 인생이 죄와 실수와 연약함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가까이 했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왜 고난이 따르고 어려움을 겪는가? 반대로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아도, 아무런 고난도 없고 걱정도 없고 세상 편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인생의 광야와 바다를 건너가면서, 하나님은 그에게 이길 힘을 주셨고, 참고 견디게 하셨다. 고난이 찾아오고 낙심할 때, 하나님은 그의 심령에 힘과 용기를 주시는 음성을 들려주셨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3장은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7절은 사랑장의 요체와도 같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모든 것을 참는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것까지 참는다는 것이다. 자기 혼자만 생각하면 참지 못한다고 해도, 적어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어 참을 수 있다.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참는다. 믿을 만 해서 믿어주는 게 아니라, 미덥지 못해도 사랑 때문에 또 실망할지도 모르지만 기회를 주고 믿어준다.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이 사랑의 능력, 오늘 우리 교우들과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가 나누고 싶은 참 감사제목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교우들을 치하하며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길 빈다. 무엇 때문에 눈물 흘렸고, 무엇 때문에 고난 속에서도 생명을 부여잡고 이 자리에 있는가? 물론 더 좋은 날에 대한 소망과 희망이 있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부탁하신 사랑의 명령을 지키느라 수고하며 견뎌온 우리 교우들이 자랑스럽다.
여러분 기억하시라. 여러분 바로 옆에 사랑이 있다는 것, 늘 감사해야 할 사랑의 하나님이 계시고, 고마운 이웃이 있다.
영상을 하나 더 보자.
사랑을 지켜내느라 참고 견뎠던 모든 눈물, 인내, 아픔, 슬픔까지도 감사하다.
하나님께서 눈물도 주시고, 고난도 주시고, 슬픔도 주셨는지 모르지만
그 눈물과 함께 하셨고, 고난 가운데 동행하셨고, 슬픔을 위로하셨다.
그것은 사랑을 가장 값지고 아름답게 했다. 그리고 앞으로 사랑으로 승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