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12일
불의를 기뻐하지 말고, 진리를 기뻐하라.
다윗의 하소연을 들어보자.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시54:1)
거짓을 말하고 불의를 즐기며 악한 일들을 꾀하는 자들 때문에, 그가 얼마나 심한 정신적인 고통을 겪었을지 헤아릴 수 있다.
“그의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그의 마음은 전쟁이요, 그의 말은 기름보다 유하나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시55:21)
이처럼 말을 교묘하게 잘하는 사람을 만나면, 선과 악은 순식간에 뒤바뀌게 된다.
아무도 자신을 변호해주는 사람 없고, 괜히 그 일에 나섰다가 손해보는 일이 생길까봐 사람들이 외면할 때, 그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
다윗은 하나님께 이렇게 호소하기까지 한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시70:5)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정말 맞설 아무런 힘도 없고, 능력도 없다. 그저, 힘이 부치고 연약할 대로 연약해져서 주저앉고 싶은 심정뿐이다.
이럴 때마다 정의와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 심령에 심어주시는 믿음의 고백과 확신이 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43:5)
하나님은 우리 심령 속에 찾아오셔서, 힘과 용기를 내기를 바라신다.
시편 51:17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은 심령이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가진 이가, 하나님을 찾으며 예배하길 바라시고, 그 예배 속에서 그 심령을 고치시고 새롭게 해주신다.
다윗은 하나님을 피난처 삼았고, 방패로 삼았다. 하나님은 그에게 반석과 같은 믿음과 용기를 주셨고, 힘과 용기를 낼 수 있는 산성이요, 요새가 되어주셨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 예배 속에서 심령이 위로를 받고 고침을 받고 회복되길 바라신다. 그리고 진리를 기뻐하기 바라신다.
시편의 고백을 다시 들어보자.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51:10-12)
하나님의 편에 서서 주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이, 주님을 사모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는 이가 깨달은 기쁨은 무엇인가?
주님을 향한 정성과 성실, 영광과 찬송, 제사와 경배… 많은 것들이 있겠다. 그 중에서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시고, 진리 가운데 거하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도록 순종하며 충성하는데 있다는 것을 안다. 즉 진리의 기쁨이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었다. 그가 그 자리에 오르고 그 자리를 지키기까지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로마제국 치하에서, 조상 때부터 내려온 토지를 빼앗기고, 각종 세금을 내다가 빚더미에 앉은 이들이, 소작인과 날품팔이로 전락했다. 그들에게서 최소한 3중의 세금을 거둬들였다. 로마에 보내는 세금, 유대왕에게 돌아갈 세금, 그리고 바리새인으로 구성된 공회에 돌아갈 세금. 그 중에서 일정부분 착복하며 살았다.
그의 기쁨이란 무엇일까? 세상적인 기쁨은 참된 기쁨을 주지 못한다. 세상 사람들이 이 점을 깨닫지 못하고, 세상적인 기쁨을 얻으려고 한다. 세상의 기쁨을 동경하는 것이 타락이다.
삭개오가 돌무화과 나무 위에 올라 주님을 구경하려고 했던 동기가 무엇인가? 삭개오는 사람들의 지탄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늘 부담스러워했고, 주님을 만나 그것을 털어버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주님은 돌감람나무 위에 올라 있는 그에게 찾아오셔서 그의 집에 머물겠다고 하셨다. 삭개오의 행위와 동기가 먼저가 아니라 주님의 행보가 더 중요하다. 이런 작은 관심과 동기만 있어도 주님은 찾아오신다. 그 사랑의 선재성을 깨달으라.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상심한 마음만이 상한 심령이 아니라 우리 안에 죄를 짓게 하는 것, 사금파리처럼 남에게 상처를 주고, 자기를 위하느라 불의를 행하는 것도 상한 심령이다. 주님은 통회하는 마음을 갖고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받고 회복이 되기를 바라시낟.
그가 이렇게 결단한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세상 적인 눈으로 보면, 이 행위는 무엇인가? 선행이다. 착한 일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믿음의 관점에서 보자. 주 되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사건이다. 세상에서 주인 삼으려 했던 것들을 내려놓고 말이다.
“비싼 것은 주머니에 있을 수 있지만 참 귀한 것은 주머니에 있을 수 없다. 그것은 가슴에, 심령에 있다.”
고린도 교회가 서로 다투었다. 세상의 법정까지 교회 내의 문제를 가지고 갔다. 소란스러웠고 떠들썩했다. 변론과 증언이 잇따랐고, 반박과 반증을 거듭하면서, 사태가 진전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주님의 영광만 가릴 뿐이었다. 그 와중에 각자 진실만을 말했을까? 물론 모두가 진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불의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말이 거짓인지도 모르고, 진리라고 믿는다. 예수님 때도 그랬다. 자기가 무슨 일을 저지르는지 모르는 거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 상에서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던가?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서로 상처를 주었고, 고통이었다.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미움이 커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너뜨리고 싶었다. 그러다보면 불의를 서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단과 사이비가 교회에 들어와 어지럽혔기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 없다. 사실 인간 안에 이기심과 이득과 그것을 위한 불의를 기뻐할 수 있는, 죄가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도 죄성이 있다. 그것이 주님을 거스르게 하고 진리를 거부하게 만든다.
그래도 고린도 교회가 다행이었던 것은, 나중에 예수님의 복음으로 돌아가고 주님의 사랑을 붙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회개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갖자, 회복이 일어났다.
여러분, 누가 진리이고 누가 거짓이며, 어느 것이 불의이고 무엇이 진리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진 자. 우리가 다 질그릇 같아서 깨어지기 쉬우나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어떤 의미에서 우리 신앙인들은 아무리 옳고 잘못한 것이 없고, 법적으로 정당해도, 예수 없으면 불의한 것이요,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고 미련하다고 말할 만한 십자가를 진다고 해도 예수 있으면 진리이다. 그 진리를 기뻐하는 자 되라.
영상.
진리를 기뻐한 그를 통해 구원의 역사가 나타났다.
주님께서 삭개오에게 선포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진리를 사랑하고 기뻐함으로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