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1일 세계성찬주일
맑은 하늘과 고운 산천을 통해 영광 받으시는 창조주 하나님, 10월의 첫 번째 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허리가 휘도록 겸손을 떠는 벼 이삭들이 온 대지를 뒤 덮은 풍요를 말해주는 계절에, 마음속에 그냥 놔둘 수 없는 주님의 세심한 사랑에 대한 감사를 드리기 원하여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저희를 너른 품에 품으시고 다독거려 주사 다시 한 번 주님을 위해서 살 용기를 갖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24:16)
- 성찬주일에로의 초대
오늘은 세계가 지키는 성찬주일이자, 추석 황금연휴를 맞았다. 성찬주일에 관하여는 모두가 아는 바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마지막 만찬을 드시면서, 이것을 기념하여 지키라고 하셨다. 떡을 떼서 제자들과 나누시면서, “이것은 내 몸이니 받아먹으라.” 하셨고, 잔을 나누신 뒤에는 “이것을 마시라.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피, 곧 언약의 피라.”하셨다. 초대교회는 성찬식을 지키면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귀중한 시간을 가졌다. 예식으로서 만의 성찬식이 아니었다. 모든 식사 나눔에서 용서와 화해와 배려와 사랑의 나눔을 생각하며 정성스럽고 귀하게 나누었다.
우리에게도 동일하다. 성찬의 의미를 알고 진지하게 참여하는 자에게는 동일한 은혜가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성찬식은 어떤 의미가 있으며, 오늘 우리는 성찬식을 통해 어떤 믿음과 결단을 해야 할까?
- 사랑의 하나님
첫째,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의 몸은 우리를 위한 생명의 몸이다. 그 피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한 보혈이다.
이스라엘의 대속죄일을 생각해보라. 인생은 왜 불행한가? 물질이나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해서인가? 어떤 성공목표와 그에 준하는 단계에 접어들지 못해서인가? 성경은 인간과 삶에 유입해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죄로 인해서 불행이 발생한다. 불화가 시작되고, 욕심이 사람을 삼키려 든다. 시기, 질투, 미움, 다툼이 생기고 인생은 다 가져도 만족을 모른다.
대속죄일은 이스라엘이 가장 경건하게 지내는 절기 중에 하나였다. 제사장은 1년에 딱 한차례, 바로 이날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의 죄를 사하기 위한 의식을 거행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죄가 씻기고, 저주와 진노가 사라졌다고 생각해보라. 영적인 염려와 근심과 불안에 휩싸여 부자유하던 삶이 자유로워짐을 맛보았다. 짓누르던 죄의 무게가 가벼워지고, 그 자체만으로도 새로움에 대한 기쁨이 솟아났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10:10-12,14)
성찬식에 임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라는 은총을 먹고 마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확증해주셨다고 로마서는 증거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오늘 우리에게 임한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증거한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무엇을 염두에 둔 증언인가? 제자들이 주님을 버리고, 심지어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고, 가룟 유다는 주님을 배반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그것을 아시면서도 주님은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신다.
- 그리스도의 몸
둘째,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임을 깨달아야 한다.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확신과 체험이 있는가? 성찬식은 바로 그 은혜에로의 초대였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모이기에 힘쓰고, 떡을 떼면서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들었다. 이것이 어떤 것일지 생각해보라. 우리는 하나!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 안에서 각 지체된 모두가, 개개인이 하나가 된다. 이런 감격과 기쁨을 아는가? 혼자인 개인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인 개인이다.
여러분 진정한 섬김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우리가 누군가를 섬기지 못한다면, 진정한 섬김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진정한 섬김을 받아보면, 누군가를 섬기려고 한다. 그때의 기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도 선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든다.
예수님께서 성찬식 후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다. 진정한 섬김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내주기로 작정한 섬김 아니던가? 성찬식은 바로 그 주님의 몸과 보혈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사랑으로 돌아오고, 용서와 화해로 돌아와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는 힘의 원천이었다.
- 교회의 사명
셋째, 세상에 대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교회의 사명을 깨달아야 한다. 세계성찬주일을 맞아, 지금 우리교회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교회가 교회된 교회인가, 생각했다. 우리교회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만 기쁜 교회가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마음을 쏟고 있는가, 생각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러면서 재정에 대한 부분을 곱씹었다. 교회재정을 아끼고 아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은 모두 아실 것이다. 미자립교회다. 재정을 운영하기조차 빠듯하다. 선교, 구제, 봉사하는데, 쓸 만한 재정이 없다.
그런데 이런 음성이 들려온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마음을 흡족하게 할 믿음은 있는가? 현실만을 생각하고, 현실에 기초해서 내일을 내다보고 있는 듯하다.
현실을 보고 내일을 내다보는 사람은 둘 중 하나가 되기 쉽다. 암울한 현실을 보면서 내일을 보면 절망하기 쉽다. 넉넉한 현실을 보면서 내일을 보면 자만하기 쉽다.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내일을 보면서 오늘을 보아야 한다. 내일을 소망을 보면서 오늘의 암울한 현실을 이겨내든, 아니면 오늘의 넉넉한 현실에 사명이라는 동력을 달아야 한다.
저를 깨우치는 글이 하나 있었다.
마더테레사에게 어떤 사람이, 밤중에 찾아왔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자녀가 여덟이나 되는 힌두교인 가족이 있는데, 그들은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기아와 빈곤은 인간이 겪는 가장 큰 고통이요, 마지막 절망이다. 겪어본 사람은 안다.
테레사는 쌀을 조금 퍼들고 그들을 도우러 갔다. 그 집의 어머니는 그 쌀을 건네받자마자 그것을 둘로 나누어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어디를 다녀오십니까? 무슨 일을 하고 오셨습니까?” 테레사가 물었다.
그는 “그들도 굶주리고 있어서요.”하고 대답했다. 그 가정 옆에는 똑같은 수의 자녀가 딸린 이슬람교인 가족이 살고 있었다. 그 힌두교인 어머니는 이슬람교인 가족이 며칠 동안 양식 없이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도 부족할 텐데, 이 양식이 떨어지면 아무 것도 장담할 수 없어, 아껴두고 비축해야할 텐데, 그는 빵을 갈랐다. 그러고 보니까, 내일에 대한, 다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욕심을 부리거나, 나누지 못하고 혼자 움켜쥐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예수님처럼 행동한 것이다. 자기의 사랑을 갈라서 이웃과 함께 나누었다.
오늘 우리가 용기를 내고 깨우쳐야할 도전이 아닌가 생각했다.
교회는 쉼터의 역할도 참 중요하다. 하나님의 쉴만한 물가가 바로 이곳이길 간절히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 천사도 흠모할 만한 일을 우리가 해야겠다.
혼자서 하기에는 힘들지만, 함께 여럿이서 마음을 합하여 하기에 용기를 낼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그것마저도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했다.
우리 교우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마음이 진동하게 하소서.
세비어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거기에는 선교팀들이 많다.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해주는 선교팀이 있었다. 그들이 나서서 허름한 곳에 사는, 정말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의 가정을 방문하고, 자신의 은사와 달란트와 소질을 발휘하여, 집을 말끔히 고쳐주는 일을 했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런데 세상은 인간의 선한 뜻과 달리 악하다.
그렇게 집을 말끔히 수리해주고 고쳐주었더니 덕을 본 사람은, 그곳에 사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라, 집주인이었다는 것이다. 집주인이 월세를 더 올리고, 결국에는 집에서 쫓겨나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그래서 주님은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말씀하시는지도 모른다.
제가 무엇을 하자고 하지 않겠다. 우리 모두가 기도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들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자신의 일상이 바쁘고 분주하고 시간이 없는 것 알지만, 우리의 시간과 마음과 물질을 드려 하나님 기뻐하실 만한 일을 마음껏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