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24일
인류의 역사와 인간의 생사화복을 홀로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가 주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주홍의 단풍이 파란 잎사귀를 물들이기 시작하는 때에, 심령의 변화를 꿈꾸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닦여지고 부서지고 녹아져서, 주님의 형상을 닮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의 창시자시요,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6-7)
- 헛된 자랑
01_유치원생들은 자랑을 시합하듯 할 때가 많다. 어느 한 아이가 수영을 배우는 엄마에 대해 자랑했다.
아이1: “우리 엄마, 요즘 수영을 배우는 데 잠수를 30초나 한다.”
그러니까, 다른 아이가
아이2: “우리 할머니는 해녀인데, 잠수를 1분이나 한다. 엄청 오래하지?”
자랑했다. 그 때 또 다른 아이의 말,
아이3: “우리 삼촌은 작년에 물에 들어가서 아직 안 나왔다.”
02_빠던을 아시는가? 야구에서 세레모니의 용어이다. (영상)
이 영상을 보시고 여러분은 자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 하나님을 자랑하라.
성경은, 자랑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마음이 부패할 수 있으니, 자랑하지 말라고 말씀한다. 대신에 하나님을 자랑하고 그 성호를 자랑하라고 말씀한다. 그래야 믿음의 눈이 흐려지지 않는다.
기드온이 미디안을 치러 갈 때, 삼만 이천여 명중에서, 최종적으로 남은 자가 300명이었다. 하나님께서 나머지는 돌려보라고 하셨다. 남은 300명은 모두 강한 용사들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기드온의 300용사라는 설교제목이 많았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보면, 성경이 말하려는 것은, 물가에서 물을 핥아 먹을 정도로 소심한 사람, 연약한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은 왜 이들로 미디안과 싸우라고 하실까? 사사기7:2은 이렇게 말씀한다.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사람은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못하고, 자랑하려고 한다. 아니 하나님의 현존하심에 대한 간절한 믿음이 사라지고, 믿음이 없는 상태로 돌아간다.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그런 것이다.
히스기야 왕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훌륭했던 왕이다. 물론 역대기 사가는 다윗을 꼽고 있지만, 신명기 사가에 의해서 쓰여진, 열하18:5은,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 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풍전등화와 같은 국가의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에서 나라를 건졌다. 앗수르가 이미 북왕국의 수도 사마리아를 점령했고, 결국 망했다. 남왕국 유다도 이제 예루살렘만 남은 상태였다. 사방으로 포위되었고, 다음 날이면 예루살렘 성이 앗수르의 칼에, 단칼에 베어질 게 분명했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인생의 위기요, 삶의 위기 속에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어떤 사람은 그 말씀을 굳게 믿으면서 참고 견디고 이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증거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메시지를 믿지 못하고 결국 포기하는 사람이 있다. 히스기야는 전자였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열하19:19)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손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0.1%도 안됐다. 그런데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누가 하신 일인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앗수르군대 내부에 반란과 자중지란으로 다음날 앗수르군은 철수했다.
성경은 곧바로 그 때, 히스기야에게 불어닥친 불행을 전한다.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당시 의술로는 살 수 있는 가능성이 0.1%도 안됐지만,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듣고 눈물을 보아, 살게 하셨다. 누구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인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무엇인가?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사람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건져주시고 도와주신 명백한 증거를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그런데 안타깝게, 그 훌륭한 왕이었던 히스기야가 질병에서 건짐을 받자, 순간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렸다. 바벨론에서 병문안 차 찾아온 사신들에게, 나라의 보물창고와 군기고와 창고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과업을 자랑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선줄로 생각했을 때, 넘어질 수 있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도 가히 이럴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겸손을 잃어버리고 자만하며, 하나님을 잊기 쉽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말씀들을 들려주고 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라.”(잠27:1)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9:23-24)
시편의 수많은 구절들이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나니”(시34:2), “그의 성호를 자랑하라.”(대상16:10),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니”(시44:8)
여러분,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앞서, 그것을 베푸시고 행하신 하나님을 먼저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이 있기를 주님은 바라신다. 그러면 더 큰 은혜가 임하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 자랑은 곰팡이와 같다.
고린도교회는 분열과 갈등으로 몸살을 알았다. 그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생각이 달라서였을까? 계층 간의 입장차이나 격차 때문이었을까? 사람들은 파당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또 이단과 거짓교사의 술책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근본적인 원인은 이 자랑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마치 자랑은 마치 곰팡이가 번져서 부패하게 하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고린도전서5:6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여기서 누룩은 곰팡이의 의미이다. 자랑은 공동체 부패하고 썩게 만드는 곰팡이와 같은 것이었다. 고린도전서, 후서를 보면 ‘자랑’이라는 단어가 매우 자주 나온다. 그마 만큼 자랑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부활하신 주님의 몸인 교회를 병들게 하고 일치와 화합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첫째는 거짓교사들이 들어와 스스로의 자랑을 늘어놓았다. 신비한 체험과 은사와 능력을 자랑했다. 그리고 남들이 모르는 영적인 지식과 은밀한 지혜가 있다고 사람들을 현혹했다. 그럴듯하게 자신을 과시하는 사람으로 인해, 찬반논쟁이 벌어지고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공동체 내에 질서가 사라지기 시작했고 무질서해졌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방언’이 난무하고, ‘자기를 선지자나 신령한 자’로 생각하면서, 교인 서로에 대해 존중하던 마음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랑하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십자가)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 자랑하는 말을 분별할 수 있는 비결이 되는 말씀이다.
두 번째는 누구로부터 세례를 받아야 더 영적인 능력이 생기는지를 자랑하는 부류가 생겼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께 직접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자랑했고, 또 어떤 이들은 사도였던 게바에게 직접 세례를 받았음을, 어떤 이들은 언변과 아는 지식이 탁월한 아볼로에게, 어떤 이들은 바울에게 세례 받은 것을 자랑했다. 이 자랑의 속성은 이런 것이다. 타인의 체험과 경험은 낮게 여기고 자신의 것은 귀히 여기려는 ‘뽐내기 전략’이다.
그래서 바울은 단번에 이렇게 말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전3:21),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3:23)
세 번째는 부유한 자들이 그의 가진 것과 그가 서 있는 위치로 인한 자랑이었다. 특별히 이것은 교회의 식사자리에서 차별로 이어졌다. 부유한 자들이 먼저 와서, 세상 습관대로 식사를 먼저 했다. 빈궁한 자나, 늦게까지 일을 마치지 못한 사람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먼저 먹었다. 그러면 늦게 온 빈궁한 자, 연약한 자, 병든 자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교회에서 마저 굶주렸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11:22)
이것은 주님이 정한 성찬식의 기본 원리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행위였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이처럼 자랑은 타인에 대한 존중이나 배려나 섬김이나 사랑이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오히려 공동체를 위해하고 어지럽히는 것이었다. 또는 누군가에게 시기와 질투를 불러일으키거나 열패감을 준다. 마음을 괴롭게 하고 더 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다. 이것을 어찌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바울은 고린도전서9장16절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바울이 자랑할 것이 없었을까? 고린도교회에서 자랑하기 좋아하는 자들은 바울의 이런 말을 듣고 바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자랑할 것이 없어서 자랑하지 않았던 것인가? 자랑할 것으로 치자면 누구 못지않다. 그러나 바울은 진정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앞에 자랑은 무의미함을 뼛속까지 새기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응당해야할 사명이지, 과시거리가 아니었다.
거짓교사들은 바울을 폄훼하며 모함했고, 동조하는 교인들이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자랑하고 과시하고 뽐내는 사람들의 실체를 깨닫게 된다. 뭔가 있을 줄로 기대하지만 결국에는 기대에 못미쳤을 때, 그 실망도 큰 법이다. 나중에 고린도교회교인들은 바로 이점을 깨달았다. 또 스스로 헛된 것을 자랑삼았던 것을 회개했다. 디도 편으로 그 소식이 바울에게 전달됐고, 바울은 눈물의 편지라고 할 수 있는 고린도후서를 써 보낸다. 편지 말미에,
“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11:18),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12:1)라고 말하는데, 그의 자랑은 무엇이었을까?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매를 맞고, 태장을 맞고, 돌로 맞고, 파선당하고, 여행하면서 강도의 휘험과 동적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광야의 위험,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춥고 헐벗으면서, 내가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11:16-33 참고)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10)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후10:17)
그 자랑은 무엇인가? 오늘 말씀의 구절이 핵심이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자랑이 헛되고 어리석은 것이라고 해서, 주님은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도 자랑거리가 없는 사람들로 살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세상사람들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으시댈 때, 주님은 오히려 진정한 은총이 넘치는 자랑거리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자랑거리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고, 독생자 아들을 통해 용서하시고 구원하셨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살기를 바라신다. 구원받은 성도로서, 약할 때 강함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고 자랑하며 권능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