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8일
공중의 새를 기르시고, 물속의 고기를 먹이시고, 산 중의 짐승을 보살피시며, 들의 꽃과 풀을 돌보시는 사랑의 하나님, 오늘 복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한량없는 주님의 사랑으로 감싸주셔서 심신의 안위를 얻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
- 연약한 자들을 부르시는 하나님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 오호라 너희 목마른 자들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부르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를 위로 하시고 치료하신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너희를 쉬게 하리라, 부르셨다. 주님 안에서 위로와 평안을 얻고, 단순히 쉼의 차원이 아니다, 회복과 치유가 일어나길 원하신다. 왜?
연약하고 부족한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행하시고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우리들이 바로 연약하고 부족한 자들이라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그의 능력을 행하기를 원하신다.
요엘3:10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너희는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지어다. 낫을 쳐서 창을 만들지어다. 약한 자도 이르기를 나는 강하다 할지어다.”
사방에서 강한 나라, 강한 자들이 유다와 이스라엘의 연약함을 멸시하며 위협할 때, 하나님은, 스스로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알고 그 때문에 낙심한 자에게 “나는 강하다 할지어다.” 굳센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신다.
- 연약한 이들에 대한 편견이나 혐오는 교만이다.
이들에 대한 혐오나 편견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 사람을 괄시하고 모욕감을 주는 것은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하나님은 고아나 과부나 나그네를 선대하고 돌보기를 바라시는 분이다.
그런데 이런 혐오나 편견, 괄시, 이런 것들은 어디에서 생겨났을까? 바로 교만이다.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성경에는 교만에 대한 이야기가 참 많이 나온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교만하다가 넘어지고, 교만하여 하나님을 버린다. 교만하여 범죄하고, 교만하여 불행에 빠진다. 그래서 교만하지 않도록 성경은 금언을 쏟아내고 있다.
- 고린도교회 안에서의 교만
고린도교회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잠시 살펴보자. 교만은 어떤 해악을 가지고 왔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1)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에 대한 믿음과 확신. 자 어떤가?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겸손하지 못한 채 이 믿음을 갖는 것은 위험했다. 누군가를 정죄하고 배타적이며 차별적인 모습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교회공동체는 병들어 갔다. 보잘 것 없는 우리를 사랑하고 구원하신 그 은혜에 감동된다면, 누군가를 포용하고 이해하고 품어, 복음이라는 열매를 함께 나눠야 한다. 그러나 교만은 다툼과 분열의 도화선이 됐다. 스스로 스승이 되려고 하고 남을 가르치려고 하면서 사랑으로 품지 못했다. 서로 어떤 상처를 주었을지 생각해보라. 그리고 세상에 어떻게 비춰졌을지 생각해보라. 이와 함께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은 어떤가? 혹 자기의 모습은 어떤가? 교만한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세상을 섬기고 품지 못한 채, 각종혐오주의와 갈등을 부추기고 있지는 않은지.
예수님의 비유 기억나는가?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드렸다. 자기 의를 드러내려고 스스로를 높였다. 주님은 이런 교만한 바리새인의 모습을 기뻐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명망 있다고 하는 고린도교회 교인들 중에 이러한 교만에 빠진 이들이 생겼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4:7에서 이렇게 말한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니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2) 믿음에 대한 지식, 혹은 지식에 대한 믿음도 생각해보자. 우리가 주님을 올바로 믿으려면 주님의 가르침에 대해 아는 일은 중요하다. 신앙에 대해서 합리적으로 생각할 줄도 알아야 한다. 미신이나 맹신 혹은 광신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겸손하지 못할 때 문제였다.
예를 들어보자.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성과 지식을 가지고 생각해보라. 그것을 먹는다고 해서 저주를 받거나, 음식이 부정해지는 것도 아니다. 시장에는 제물로 바쳐졌던 음식이 유통되는 경우가 있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이런 것 때문에 실족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담대한 믿음과 지식이 있어 실족하는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고 제사음식을 먹는다 해도, 문제는 교만함과 관련을 맺게 됐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8:1)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8:11),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1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10:23)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10:31)
3) 내로남불. 자기가 배고픈 것은 중한 일이지만 남이 배고픈 것은 신경쓰지 않았다. 자기는 그럴만하지만 다른 사람은 그럴만하지 못하다고 여겼다. 자기에게는 관대하지만 타인에게는 인색했다.
누군가를 멸시하고 천대하고 정죄하고 비난했다. 상대방의 사정을 고려하거나 배려하지 않은 채로 자기 유익을 먼저 구했다. 이로써 상처 받는 자가 생겨났다.
이런 것들이 교만에서 비롯됐다.
- 교만에 대한 자기점검
자기의 교만을 어떻게 점검할 수 있을까?
1) 누군가를 정죄하거나 괄시하고 있다면 그 조짐이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한다.
2)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 아니라 저절로 되거나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조심해야 한다.
3) 남보다 자기 자신을 낫게 여기면 조심해야 한다. 세상은 그렇게 할지 모르지만, 성도는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긴다. 빌립보서2:2-5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기억하라. 하나님은 내가 무시하고 괄시하는 그를 통해서, 연약하고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얼마든지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
고전1:27-29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거스틴에게 레이나라고 하는 제자가 있었다. 하루는 어거스틴이 볼일이 있어 제자를 불렀다. 스승이 한참을 부르는데도 레이나는 대답이 없었다. 옆방에 분명히 있는 것 같은데 응답이 없는 것이었다. 어거스틴은 슬며시 부아가 났다. 그리고 옆방 문을 신경질적으로 열어제쳤다. 순간, 그는 아차하고 뉘우쳤다. 제자 레이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너무나 기도에 몰두한 나머지 스승이 부르는 소리를 못 들었던 것이다. 어거스틴은 제자에게 “교만한 어거스틴아, 교만한 어거스틴아, 교만한 어거스틴아, 세 번 소리쳐다오.” 하면서 사과했다고 한다.
하나님은 교만을 뉘우치고 겸손히 주께 돌아오는 자를 용서하시고 품어주신다.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가 살아났을 때, 역대하32:25은 이렇게 증거한다.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그와 유다에 내리게 되었더니 히스기야가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예루살렘 주민들도 그와 같이 하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히스기야의 생전에는 그들에게 내리지 아니하니라.”
고린도교회가 교만을 뉘우치고 주께 돌아왔을 때, 고린도후서1:15절은 이렇게 증거한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