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6일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신 사랑의 하나님, 8월의 첫 번째 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찌는 덧 한 더위로 온 대지가 타들어가는 계절에, 더위만큼이나 뜨거운 사랑을 바라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나태해진 심령에 귀한 은사가 넘실대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ems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시106:48)
- 공평하신 하나님
휴가 중에 만난 목사님께 들은 이야기이다. 어느 목사님이 평생 미자립 교회 목회를 하다가 은퇴했다. 참 열심히 했는데, 미자립 상태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성실한 목회인생에 박수를 쳐줬다. 불성실하거나 주의 종으로서 능력을 적게 받아서가 아니라 그는 그런 목회 인생을 살았을 뿐이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인생을 맡기셨는지도 모른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40대, 50대, 60대를 지나면서 어떤 고민을 했을까, 궁금했다. 목회적인 고민도 고민이지만 생계문제와 자녀교육에 대한 실질적인 고민은 어땠을까?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 인생을 내맡겼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에게 박수를 친다.
그런데 하나님은 참 공평하신 분이시다. 광야를 거쳐온 이스라엘이 지난 삶을 돌아보며, 발이 부르트지 않았고 의복이 헤지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때마다 하나님은 하늘의 양식으로 먹이셨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그에게도 꼭 그와 같았다. 이것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인생이 척박한 땅에서도 살아가는 인생의 신비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인생은 현실의 문제 때문에 낙심치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교훈으로 삼고 배워야 한다.
공평하신 하나님은 자녀를 복되게 하셨다. 이번에 그 따님이 미국의 유명한 대학에 입학을 하는데, 풀스칼라십(전액장학금)을 받는다고 한다. 2억5천만원 상당의 금액이다. 생활비까지 포함된 금액이다.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동일한 은혜가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여러분의 자녀, 자손에게도 마찬가지다.
-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된 교회를 사랑하라.
오늘 나의 삶에서, 부족한 것 없고 바랄 것 없다고 자만할 필요 없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상황이 어렵고 힘들다고 낙심할 것 없다. 오늘 잘 된다고 내일 잘되리라는 보장 없고, 오늘 잘 안된다고 내일도 안 되리라는 보장 없다. 그렇다고 이렇게도 말할 수 없다. 잘 되는 사람은 나중에 안 되고, 잘 안 되는 사람은 나중에 잘 안된다고 말이다. 잘 되는 사람은 나중에도 잘 될 수 있고, 안 되는 사람은 나중에도 안 될 수 있다.
저는 100년이 넘는 교회에서만 부담임목사로 있었다. 4대 5대에 걸쳐서 범사가 잘되고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것을 봤다. 한 가지 확실한 비결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사랑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어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부모가 신앙으로 극복해나가는 것을 배우면서 자녀도 어느 순간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이겨내는 것이다.
이런 분들의 공통점은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된 교회를 진심을 다해 사랑하고 섬긴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증거가 거기에서 나타난다. 뿌리 내리지 못하고, 이 교회 저 교회 기복적으로 옮겨 다니는 신앙과는 차원이 다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지만 자기의 욕심과 기복적인 이유로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 나라와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서 헌신하고 수고를 다하는 삶을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신다. 자녀들은 거기서 진정성을 배운다.
오늘 내가 잘된다면, 나를 위해 기도했던 부모를 기억하고, 자손이 복 받기를 기도하라. 오늘 잘 안된다면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 나라를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된 교회 안에서 심을 수 있기를 바란다. 울면서라도 씨를 뿌리면 분명코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는 것이 성경적 진리이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정착했을 때, 야곱의 복을 통해 이스라엘이 되게 하셨던 은혜를 금방 잊어버렸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모습이다.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원죄 때문에, 삶의 여유가 생기고 편안해지면 하나님을 의심하고 외면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된 교회를 통해, 사랑의 나눔과 헌신과 섬김을 통해 이 믿음 간직해가길 원하신다.
- 야곱의 씨름
오늘 말씀은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기 직전의 장면이다. 삼촌 라반의 집에서 20여년의 세월을 보냈다. 자녀와 아이들, 모든 소유와 함께 돌아오는 중이었다.
자신의 소유가 늘자 삼촌이 대하는 것이 예전 같지 않았다. 영혼은 싸늘해진 시선에도 상처를 입을 수 있다. 고향집으로 돌아가자.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고향은 상처입은 영혼이 치유되는 가장 좋은 곳이기도 하다.
형을 만날 시간이 다가온다. 앞서 보냈던 사람들이 와서 형이 장정 400명이나 거느리고 오고 있다고 했다. 시간이 촉박하다. 이미 아내들과 자녀들을 앞서 보냈기 때문에 되돌릴 수도 없다. 32:7은 야곱의 심정을 나타내주고 있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사람이 겪는 일은 똑같다. 걱정거리가 일어나고 염려하던 것이 점점 가까이 다가올 때, 심장은 터질 것 같다. 기한이 임박해오고, 결정적인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가장 외로울 때가 언제인가? 사람이 주변에 없을 때라고 생각한다.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 없고, 자기 홀로일 때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적인 확신이 가득한 사람은 그런 것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것을 소신이라고 한다. 소신만 있으면, 내적 강건함이나 평안만 있으면 그리 외롭지 않다.
가장 외로울 때는 자기 혼자 직면해야 하는 불안과 염려와 공포에 휩싸일 때이다. 같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결국에는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캄캄한 문제가 자기 앞에 놓일 때, 사람은 외롭다.
야곱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그는 홀로 남았다(v.24). 늦은 밤이었는데, 인생에서 이렇게 캄캄하다고 느낀 어둔 밤은 없었을 것이다. 성경은 그 때, 그가 어떤 사람과 씨름을 했다고 전해준다. 성경은 그가 누구인지 정확히 정체를 밝히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야곱은 그를 천사나 신적인 존재나 하나님의 사자와도 같이 여겼다.
사실 야곱의 씨름은 이번만이 아니다. 그가 태어날 때,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에서와 싸움했다.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고, 형에게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샀다. 라헬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서, 목자들 여럿이 함께 옮겨야 거뜬히 할 수 있는 우물의 돌을 혼자서 옮겨 라헬이 몰고 온 양떼들에게 물을 마시게 했다. 삼촌 라반과도 겨루었다. 그의 인생은 한마디로 누군가와 씨름하는 인생이었다. 무엇을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르다.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외로운 씨름을 하고 있다. 가장 힘겨운 씨름을 밤새도록 하고 있다(24). 어쩌면 가장 두려운 것과 씨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죽음의 고통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이전에 했던 씨름의 대상은 축복의 근원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씨름을 하고 있는 상대는 축복의 근원과도 같은 존재다. 이런 점에서 저는 이 씨름은 ‘믿음의 씨름’이라고 언명하고 싶다.
이전을 생각해보자. 에서를 이기면 행복할 줄 알았다. 그의 장자권을 빼앗으면 행복할 줄 알았다. 아내를 얻고 자녀를 많이 두면 행복할 줄 알았다. 삼촌으로부터 자기 권리를 찾고 소유가 많아지면 행복할 줄 알았다. 잘 될 줄 알았지만, 그의 인생은 한 마디로 나그네 인생일 뿐이었고, 씨름하는 인생일 뿐이었다. 여전히 자기 인생에는 수많은 불안과 두려움과 저주와도 같은 수많은 문제들이 놓여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의 것을 다 가져도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혼은 쉽게 상처를 받고, 얻었던 것도 한 순간 다 잃을 수도 있다. 우리의 실존적인 모습도 바로 이런 위기와 비슷하지는 않은가?
그런데 지금의 씨름은 자기를 복되게 할 근원적인 존재와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 속에 수많은 문제들을 만나고, 염려, 근심, 불안, 괴로움, 그리고 의심에 휩싸인다. 그러나 우리를 복되게 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굳게 믿음으로, 붙드는 것도 씨름이다.
하나님이 야곱을 이기지 못했을 리는 없다. 그런데, 그 정체가 누구든, 야곱은 그의 허벅지 관절이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그를 꼭 붙잡았다. 자기를 축복하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한다. 야곱은 바로 이 씨름에서 이겼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믿음의 씨름에서 담대해 승리하길 원하신다.
- 자기 속의 사람의 그림자
28절을 보자.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하나님과의 씨름은 이해할 만한데, 왜 그 대상에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까, 에서와의 씨름은 차자에 대한 열등감이었다. 라헬과 레아 사이에서의 씨름은 시기와 질투로 벌어진 갈등을 감당해야 하는 책임감 같은 것이었다. 삼촌 라반과는 늘 갑을 관계에서 을의 처지였다. 설움이 컸고 당한 상처가 크다. 사촌형제들 사이에서 차별에 대한 상처가 남았다. 그렇다고 자기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남기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뿐만 아니다. 부모와의 이별에 대한 회한, 도망길에 대한 상처, 노숙하는 인생에서 맞본 절망, 고향에 대한 그리움… 이 모든 것이 사람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한 마디로 마음속엔 언젠가는 꼭 직면하고 이겨내야 할 수많은 상처들이 있었다.
우리는 어떤가?
믿음의 씨름에서의 승리는 그와 같은 자기 안의 수많은 상처까지도 극복하고 치유하게 만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간밤에 고통스러웠던 죽음의 고통과는 다르게 생명을 보존하고 맞이할 수 있는 해가 떠올랐다. “브니엘” ‘하나님 얼굴 앞에서’라는 뜻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부활의 기쁨과도 같은 것이다.
여러분의 인생은 복을 약속받은 인생인가? 가장 외롭고, 두렵고, 결국 홀로 서야 할 때, 야곱에게 찾아오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신다는 것을 기억하라. 오늘 우리의 수많은 인생의 갈등 속에, 인간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씨름하거나, 의심에 싸여 갈등하지 않고, 우리를 복되게 하실 주님을 굳게 믿고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길 빈다. 안 되는 일, 고된 일이 있다고 해도, 소망의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과 확신을 갖기를 주님은 바라신다. 그래서 브니엘의 아침을 맞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