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12일 사순절 제 2주
예전에 IMF 때 중장년 가장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광고가 있다. “수고한 당신 떠나라.” 취지는 쉼을 가지라는 말이었는데, 사람들의 무의식에는 해고를 미화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떠난다는 말은 참 조심스럽다. 오늘 말씀도 그렇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식상하리만치 많이 들었던 말씀이다. 아브라함에게 처음으로 복을 약속해 주신 장면이다. 하나님은 그를 창대하게 하시겠다고 하셨고, 아예 ‘복’이라고 말씀하셨다. 복덩이처럼 대해주셨다. 그가 누구기에 그러셨을까? 그처럼 대해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란다.
아버지였던 데라와 함께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을 향했다. 삶의 자리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한다는 것을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 좋아서 떠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저마다 나름대로의 유의미한 사연이 있다. 가나안은 갈대 우르에서 굉장히 먼 거리다. 이민이나 마찬가지다. 그 도중에 하란이라는 곳을 만났다. 하란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 위치한 곳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살기에 넉넉하고 풍성한 땅이었다. 데라는 가나안까지 미처 다 가지 못하고 거기에 머물렀다. 데라가 70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11:26). 죽은 때는 205세였다(11:32). 아브라함이 그곳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셨던 땅, 가나안으로 떠난 때는 75세였다(12:4).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떠난 뒤에도 데라는 가나안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을 접고 거기에서 수십년 간을 머물렀다. 왜 그랬을까?
12장에 와서, 갑작스레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하신다.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그동안 이 대목은, 그가 누렸던 모든 것을 버려두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떠났다고 하는 식으로 읽혀졌다. 가진 것을 포기할 줄 아는 담대함이 있어야 더 큰 복을 받는다는 교훈을 얻곤 했다.
노자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공성이불거’ 공을 세우나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혹 아브라함이 자신의 편안함과 안락함에 머물지 않고, 그 가진 것, 성공을 담대히 포기하고 더 나은 세계와 꿈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대범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용기를 대단하게 여겨왔다.
우리에게 이러한 강도의 믿음이 요구되어진다면, 어떨까? 그런데 아브라함의 여정에서 아내를 누이라고 두 번씩이나 속이고, 하갈과 이스마엘에 대한 처신이나, 하갈과 사라 사이에서 줏대 없는 모습을 보면, 대범한 성품과는 모순된다. 태생부터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 아니었다. 이런 점에 보잘 것 없다고 여겨지는 인생들에게 위로가 된다.
저는 이 대목을 늘 이렇게 이해한다. 불행하고 연약하며 부족했던 개인사와 가정사를 겪은 한 존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일어났던 사건으로 말이다.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생각처럼 행복하게 잘 살지 못했다. 나홀은 동생 하란의 딸과 결혼을 해야 했고, 아내 사라는 오랫동안 임신하지 못해 자식이 없었다. 그것은 복 받지 못하고, 풀리지 않았던 인생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막내였던 하란은 벌써 죽었다. 어머니는 등장하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데라 가족의 떠남은 용기라기보다는 더 이상 잃을 것도 없고 취할 것도 없는 막다른 인생이 보여주는 절박한 선택이었다.
왜 가나안으로 가던 도중에 하란에 머물렀는가? 그곳은 공교롭게도 막내였던 하란과 이름이 같았다.
혹시 이런 것은 아니었을까? 사랑하는 가족, 그것도 자녀를 잃었을 때, 같은 이름이 주는 마음의 울림 때문에, 슬픔과 불행이 그를 그 정거장에 붙잡아 두게 된 것은 아닐까? 단순히 지역 명 때문에 그랬다는 것은, 억측 같아 보여도, 데라에게 사무쳤던 마음이 무엇인지 가늠해야 한다. 상처가 극복되지 못하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 그 만큼 슬픔과 아픔과 절망이 그를 압도하고, 무기력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데라는 거기서 생을 마감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정이다. 그런데 이것을 염두에 두면서 다음의 내용을 살펴보고 연결지어보자.
1절에서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말씀하셨다. 그곳은 어디이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보여줄 땅’은 아브라함이 생각할 수 있던 곳일까? 생각할 수 없었던 곳일까? 아직은 아브라함이 그곳이 어딘지 모르고 그저 인도하심을 겪어봐야만 알 수 있는 곳일까? 그렇다면 어쩌면 그곳은 아브라함에게 목표와 방향이 없는 방랑자의 삶을 요구하시며 시험하신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과 뜻과 비전을 다 알 수는 없다. 모를 때가 더 많다. 그래서 무작정 막연한 것을 주께 맡긴다고 말한다. 이 말씀을 붙잡는다. ‘보여주신다고 했으니까, 나중에 보여주시겠지!’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측면을 생각해보셨는가? 객관적으로 보면 회피나 도피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물론 살다보면 길을 잃을 때도 있고, 방황할 때도 있다. 모든 방법과 길이 막혀서 캄캄함을 경험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뜻을 정말 모를 때도 있고, 그저 하루하루 인도하심대로 살 수밖에 없을 때도 있다. 그러나 생존을 위해 악착같이 살다보면 정말 그 가운데서 선명한 목표를 발견하고, 길을 찾게 되는 경우도 있다. 길고 긴 인생의 터널을 빠져나와 밝은 빛이 눈부시도록 쏟아지는 은총의 현장에 도착하기도 한다.
그런데 ‘모르는 곳’과 ‘미지의 땅’을 구분하면서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모르는 곳과 미지의 땅은 어떻게 다른가? ‘모르는 곳’은 방향과 목표에 대한 인식자체가 없는 곳이다. 그러나 ‘미지의 땅’은 그것은 있으나 경험이 없는 곳이다.
1절만을 생각해서, ‘보여줄 땅으로 가라.’/ 그곳이, ‘모르는 곳’으로의 여행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곳은 분명히 가나안이었다. 아브라함의 심중에는 ‘떠나야 한다.’는 마음이 들 때부터 그곳은 가나안이었고, 하나님께서 ‘보여줄 땅으로 가라.’ 말씀하실 때부터 가나안임을 알았다. 그리고 사실 아버지 데라 때로부터 이어진 가나안으로의 여행이었다. 물론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곳이기에 ‘미지의 땅’은 맞다. 그러나 애초부터 방향과 목표가 없었던 게 아니다. 아브라함이 가고자 했던 곳, 가기로 마음먹었던 곳은 가나안이다.
가나안은 어떤 곳인가?
성경에서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알려져 있다. 지리적인 의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 가나안이다. 애굽에서 종살이를 마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도록 허락된 곳이다. 이스라엘은 그곳을 들어가기 전에 광야에서 40년간 보냈다. 연단의 세월이었다. 그 세월이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저절로 주어지는 땅이 아니었다. 수많은 우상과 적들이 있었다. 그곳에는 고난이 없겠지, 풍요와 번영만 있겠지라고 생각했다가는, 큰 오산이다. 강하고 담대하며,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해야 했다.
그러니까 가나안은 단순히 지리적인 위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당도할 목표점이요, 소망이요, 허락하신 새 땅이다.
가나안은 종살이에서 자유케 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곳이다.
가나안은 고통에 매인 삶에서 힘과 용기를 내어 승리하는 곳이다.
가나안은 무기력한 자기 인생의 절망에서 희망을 현실화하는 곳이었다.
가나안은 불행했던 인생에서 복된 인생으로 초대된 곳이다.
가나안은 세상이 아니라 천국이다.
가나안은 우상숭배의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장소요, 교회이다.
아브라함이 고향,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 한 것은 성공으로부터의 떠남이 아니다. 더 큰 꿈을 찾아 떠난 대범한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자칫 욕망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 슬픔, 저주로부터의 떠남이다. 그것은 소망이 있기에 가능하다.
우리에게도 동일하다. 삶이 고되고 어렵고 힘들어서 일어날 힘이 없을 때, 하나님이 소망주시고, 붙잡아 일으켜 주시며, 세우셔서 걷게 하심을 깨닫고 용기를 내는 믿음 말이다.
어떤 사람은 어려운 일만 만나면 떠나야 한다고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 있다. 어딜 가나 마찬가지이다. 조금 또 힘들어지면 그는 삶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 또다시 옮겨 다닌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떠남이 아니다. 도피일 뿐이다. 회피이며 도망일 뿐이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이르렀다. 거기서 제단을 쌓고 잘해보고자 했다. 그런데 그는 점점 남방으로 거처를 옮겨갔다. 가나안에 대한 의미를 오해한 것 같다. 기근이 심하게 들자 그는 애굽에 내려갔다. 삶의 회피는 가나안을 버리고 애굽을 택하게 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가 잘 아는 어려움을 당한다.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다. 그리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하나님은 공로와 자격과 조건이 있어 축복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불쌍히 여기시고 안타깝게 여기셔서, 그 긍휼로 아브라함을 복되게 하셨다. 이것이 은혜다. ‘너는 복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소망이 되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렇기에 내 생각 같아 보여도, 주께 가까이 나아가 기도하면서 든 생각은 주님께서 주신 소망일 수 있다. 주님 안에서 소망을 세우고, 믿음을 갖는 것, 그것이 다름 아니라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는 의미이다. 누차 말하는 바처럼, 보여서 믿는 게 아니라 믿어서 보이는 것이다. 물론 자기욕망하고 혼동해서는 안 되겠지만, 주님 안에서 분명히 깨닫게 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소망을 주시고 믿기를 바라신다. 주님께서 ‘내 안’ 말씀하신다. ‘내 영’과 ‘하나님의 영’이 더불어 증언하신다(롬8:16).
이런 점에서 ‘너는 복이 될지라.’라고 말씀하신 의미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아니다. 그의 존재 자체를 복으로 선포하신 하나님의 은총이다. ‘미지의 땅’을 어떻게 걸어가겠는가?! 그렇지 않고는 갈 수 없다. 어딜 가서 무엇을 하나 복되고 형통하기를 바라는 주님의 동행하심이 있기에 용기를 낸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부르셨는지를 이해하라. 데라의 인생처럼 지치고 낙담하여 하란에 머물러 있고자 할 때,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응답하시고 말씀하시고 힘과 용기를 주어 약속의 땅까지 능히 걸어가게 하신다. 천국을 일구게 하시고 울면서라도 씨를 뿌리게 하시며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하신다.
4절 말씀을 주목해 본다. 아브라함은 말씀을 따라갔다. 롯은 아브라함을 따라 갔다.
말씀을 따라가는 사람, 사람을 따라가는 사람이 있다. 말씀을 따라가는 사람 때문에, 사람을 따라 가던 사람도 복될까? 3절을 보면 ‘그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를, 그로 말미암아 복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을 따라 가는 사람 중에도, ① 말씀을 따르는 사람을 따라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② 그렇지 않을 사람이 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는데, 어떤 사람과 가느냐는 참 중요하다. 주님은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을 통해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까지 복 받길 원하신다.
롯의 아버지는 하란이다. 그는 벌써 죽었고, 어릴 적부터 아브라함은 아버지와 같았다. 자식이 없던 아브라함도 롯을 각별히 대했다. 아브라함이 떠나고자 했을 때, 둘은 정말 의지된 마음으로 함께 했다.
그런데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아브라함과 롯은 서로 분가해야 했다. 서로 소유가 많아져서 그 목자들이 서로 갈등을 일으켰다. 아브라함은 조카가 먼저 좋은 쪽을 택하도록 했다. 그가 잘되기를 바랐다. 그는 요단지역을 바라보며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 같았던 곳을 택했다.
그런데 롯이 복 받은 일은 무엇일까? 그 풍요와 풍성이 아니다. 롯의 선택은 소돔과 고모라였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기도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자들을 보내어 롯과 그 가족을 구출하셨다.
롯은 멸망에서 구원받았다. 우리가 복을 받고 복을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사도들을 통해 말씀하신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
구원의 복이야 말로 가장 좋은 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