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탈출 넘버원(마태복음4:1-11)

시험탈출 넘버원(마태복음4:1-11)

 

 

2017년 3월 5일 사순절 제 1주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사랑의 하나님, 사순절 첫째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동면했던 생명들이 찾아오는 봄소식에 잠에서 깨어나는 때에, 사순절의 의미를 생각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잠에서 깨어난 믿음 갖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하는 저희들의 열정을 받아 주옵소서.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2)

 

 

  • 마귀의 세 가지 시험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 시작 전에 받으신 세 가지 시험에 관한 것이다.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이 될까?

①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신명기 8:3절의 말씀을 하셨다. ②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라. 이번에는 신명기6:16절을 따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다. ③ 천하만국의 모든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길을 택하지 않겠는가, 유혹이었다. 신명기6:13,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는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그러자 마귀가 떠나고 천사가 수종을 들었다. 주님은 우리 역시도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길 바라신다. 그러면 기쁨이 찾아온다.

 

 

  1. 시험1 :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상한 점을 눈여겨보자. 이 시험을 당한 시점이 언제인가?

 

① 금식으로 주리실 때? ② 금식하신 후에 주릴 때?

 

굶주림은 인간의 기본적인 고통이다. 이것이 끊어지면 목숨도 끊어진다. 40일씩이나 금식을 마치셨으니 이제는 드셔도 되는 것 아닌가?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신 뜻이,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가 하나님이어야 하지 먹는 것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금식을 하나 하지 않으나 마찬가지이다.

40일을 마치셨으니 이제는 음식을 먹어도 될 텐데, 왜 이것이 시험거리일까?

문제를 정확히 봐야 한다. 음식을 먹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3절,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해보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 시험도 마찬가지다. 6절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생각해보자면, 돌을 떡덩이가 되게 하는 것도 정확히 말하자면 정상적인, 주님의 방법이 아니다. 조금 뒤에 소개하려고 한다.

 

비정상적인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니다. 마귀는 이런 의심을 갖도록 만든다. 주님을 내 뜻과 기준에 따라, ‘정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렇게 해줘보세요.’라고 한다면 마귀의 시험이다.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뛰어내려보라고 한다. 만약 멀쩡히 살아남는 기적이 일어난다면 인정하겠다는 모양이다.

 

여기서 마귀가 미혹하게 만드는 수법을 자세히 보기 바란다. 마귀가 사용하는 성경구절은 시편 91편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이는 무슨 의미인가? 문자 그대로, 예수님이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면, 낙하하는 마지막 순간에, 천사들이 슈퍼맨과 같은 모습을 나타나서, 사뿐히 착지하게 붙들어준다는 말일까?

 

시편의 고백은 이런 것이다. 인생에서 많은 난관들을 만났다. 사람의 함정, 질병, 인생의 위기. 생각해보라.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많이 부서지고 넘어지고 쓰러질 위기를 만나는가?! 추락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지키셨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지혜를 주시고 힘과 용기를 주시며 피할 길을 내셨다. 우리를 사랑으로 붙잡아 세워주시고 일으켜주셨다. 심지어 함께 걸어주셨다. 그 하나님의 놀랍고 신비한 섭리를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 91편의 결론적인 고백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시요, 요새시요, 내가 의뢰하고 신뢰하는 분”이라는 것 말이다.

 

마귀는 말의 피상적인 의미만을 가지고 본래의 뜻을 바꾸어서 그릇된 변론에 빠지고 미혹되게 만든다.

 

성전 아래에는 누가 있는가?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서기관, 유대인들이 있다. 거기서 뛰어내려 살기만 한다면, 예수님을 핍박하고 조롱하고 멸시하던 이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계실 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희롱했던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뛰어내리시면 안 다치고 살 수 있는지 없는지,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능히 주님은 더한 것도 가능하시다고 믿는다. 다만 이 또한 주님의 방법이 아니다. 인간적인 생각 같아서는 정말 십자가에서 내려와 혹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고 본때를 보여주고 싶을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게 하거나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주님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더 많은 기적을 보이셨는데도 믿지 않았다.

그리고 자칫, 인간의 ‘의’만 드러낼 뿐이다. 사람 안에는 이런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그 때문에 참지 못하고 일을 그르친다. 그러나 주님은 인간의 의를 드러내려는 욕망은, 하나님의 뜻과 일은 도무지 생각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께서 십자가를 예고하셨을 때, 주님께 간하고 책했다가 호되게 질책을 당하지 않았던가?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래야 올무에서 벗어날 방도가 생긴다. 주님은 마귀의 유혹이 인간의 내재적 욕망(원죄)을 교묘히 이용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임을 간파하셨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인간의 의를 드러내려는 시험을 이겨내라. 그런 방법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뿐이다.

때로 위기와 시련을 만날 때, 신앙이 흔들리고 확신이 필요하다고 해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살아계신지 아닌지, 역사하시는지 아닌지, 예수님이 참 구주시요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신지 아닌지 말이다. 의심치 말고 믿으라.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드러내는 방식은 따로 있다. 또한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열도록 도우신다.

 

 

  1. 시험2 : 번영

여러분 교회가 복음의 바른 길로 가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마도 그것은 번영의 신앙, 축복의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빚어진 욕망의 우상 때문일 것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버리고 축복받기만을 바라는 데 있다.

 

마귀는 예수님을 또 다시 시험했다. 자기 의에 대한 욕심을 드러내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높은 산에서, 천하만국과 영광을 보여주며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리라.’ 유혹한다. 여기에 마귀의 간계가 있다. 간교함이 있다.

간교함은 무엇일까? 이렇게 가정해보자. 정말 예수님께서 엎드려 경배하면, 천하만국과 바라는 모든 것을 마귀가 줄 수 있을까? 그것들은 마귀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그런데 마귀는 자기가 이런 것들을 주겠다고 말한다. 마귀가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악마적인 방법으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차지할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복된 것과 꼭 상관있는 것은 아니다. 천하만국을 차지할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진정 사모할 천국을 얻는 것도 아니다. 세상적인, 보암직하고 먹음직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들이 우리를 복되게 할 것만 같지만 우리를 복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룻은 아브라함과 분가할 때, 볼 때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은 좋은 곳을 먼저 택했다. 아브라함은 동서남북 하나님의 약속을 택했다. 롯의 선택은 소돔과 고모라였지만 아브라함의 선택은 믿음의 조상이었다.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피해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라.

 

인간은 이기적인 욕심에 사로잡히기 쉽다. 그리고 갈등한다. 그런데 대단한 것부터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 아니다. 사소한 것부터 시작된다. 주일날 예배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내게 유익한 약속을 잡는 것, 친목모임에 참석하는 것 등등 말이다. 그것이 순차적으로 있을 때는 별로 문제가 안 된다. 그런데 동시간대에 벌어진다면 갈등이 된다. 어떤 것을 우선해야 할까?

경건에 이르는 연습이 중요하다. 그 연습과 습관이 충분한 사람은 고민하거나 갈등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 믿음이 연약할 때는 흔들린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점을 연단하고 시험할 때가 계시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받은 자였다. 그런데 그 배반함도 컸다. 처음부터 그랬는가? 사소한 것에서부터 하나님을 중심에 세우지 못해 점차 일어난 결과였다. 이방여인들을 아내로 맞았다. 하나님을 모르는 여자들이 서로 각기 신경전을 벌이고 솔로몬에게, 입김이 작용되게 한다. 사람인지라 당장 급한 불부터 끄려다보니까 점차 하나님의 뜻과 멀어져 갔다.

기억하라. 믿음의 사람은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지만 불신앙의 사람은 우선이익이 무엇인지, 내게 더 큰 이익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중요한 것부터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시급한 것부터 한다.

 

꼭 천하만국은 아니더라도 일용할 것, 필요한 것, 넉넉히 쓸 것, 부귀영화를 누렸으면 좋겠다고 바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마귀가 아니다.

 

악마적인 방법, 마귀의 술책을 정리하자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 마디로 가로채기이다. 하나님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가로채게 만든다.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의 영광으로 가로챈다. 하나님의 자리를 자기의 것으로 가로챈다. 주님은 이런 점을 깨닫고, 가로챘던 하나님의 것을 다시 하나님께 되돌려 놓는 온전한 믿음을 갖길 바라신다.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임을 주님은 어떤 방법으로 보여주셨는가?

여러분 돌을 떡덩이로 만들라는 마귀의 시험에는 응하지 않으셨지만 주님은 한 아이가 내민 오병이어로 장정만 5천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게 했다. 그리고 성찬식의 자리에서 떡을 떼시고 포도주를 나누셨다. 이는 십자가 아래에서 당신의 살과 피를 구원과 은총으로 나누어주실 수 있음을 여보주신 것이다. 이런 나눔, 희생과 헌신이 곧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주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 안에 있을 때에야 비로소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다. 거기서 주님은, 더욱 인생을 의미와 보람으로 견고하게 만드는 비결임을 깨닫길 바라신다.

주님은 인생의 낭떠러지에서 낙상한 사람들을 붙잡아주셨다. 병자들, 죄인들, 인생의 상처와 시련을 당하고 괴로워하는 이들, 절망 속에 있었던 이들, 그들 곁에서 힘과 용기를 주시며, 일어나 걷게 하셨다. 추락하는 것에 날개가 되어주셨다. 우리 역시 동일한 상황에 놓일 때가 있지 않았던가? 주님이 여전히 손잡고 계시고 붙들어주심을 경험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 사랑을 깨닫는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되심은, 우리가 고통을 겪고 살아가는 일상적 삶의 자리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비정상적인 현상에서 확인되는 것이 아니다.

마귀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기적 같은 일들을 보임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이라고 했다. ‘자기의’를 드러내 보이도록 유혹했다. 그런데 비정상적이다. 주님은 공생애 중에 수많은 이적과 기적들을 보여주셨다. 사람들을 섬기고 긍휼을 베푸심으로 ‘자기의 의’를 드러내기 보다는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셨다. 그리고 그 때 그것을 삼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비밀로 하라고 하셨다. 사람들이 열풍처럼 예수님을 치켜세우려고 할 때에는 그 자리를 조용히 피하셨다. 왜 그러셨는가? 로마의 백부장이 십자가 아래에서 죽으신 예수를 보고 저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한다.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은 십자가에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기의 의를 위해 스스로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와 고난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대신 지심으로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심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었다. 그래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했다.

마귀는 천하만국을 주겠다고 유혹했지만 주님은 들에 핀 백합화를 보면서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함’을 보셨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이모든 것을 더하는 길임을 우리에게 직시하도록 하셨다.

주님은 인생의 절벽에서 낙상한 사람들을 붙잡아주셨다. 병자들, 죄인들, 인생의 상처와 시련을 당하고 괴로워하는 이들, 그들 곁에서 힘과 용기를 주시며, 일어나 걷게 하셨다. 추락하는 것에 날개가 되어주셨다.

마귀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기적 같은 일들을 보임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기의’를 드러내 보이라고 유혹했다. 그런데 주님은 수많은 이적과 기적들로 사람들을 섬기고 긍휼을 베푸심으로 ‘자기의 의’를 드러내기 보다는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셨다. 그리고 그 때 그것을 삼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비밀로 하라고 하셨다. 왜 그러셨는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은 십자가에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기의 의를 위해 스스로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와 고난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대신 지심으로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심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었다.

마귀는 천하만국을 주겠다고 유혹했다.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심을 믿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한다. 주님은 들에 핀 백합화를 보면서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함’을 보셨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으라.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 이외의 것에 비굴하지 말고, 주님께 먼저 아뢰는 든든한 믿음 가운데 굳게 서라.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신다. 주님은 우리가 인생에서 만나는 수많은 시험들을 이기도록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에게 찾아오신다.

 

기도.

 

  1. 사람의 의를 내세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했던 교만을 회개합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의심하고 시험하려 했던 것 회개합니다. 참 믿음 갖게 하소서.
  2. 시험을 만나고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승리하게 하소서. 온전한 주님의 사랑을 알게 하소서.
  3. 시험당하는 누군가를 위해서 중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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