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로 돌아선 교회(고린도전서3:1-9)

하나님께로 돌아선 교회(고린도전서3:1-9)

2017년 2월 12일

 

 

  1.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

누군가에게 잘 못을 바로잡기 위한 말을 해야 할 때가 있다.

 

더 이상 안 볼 사람이라면 상관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참 어렵다. 그가 말의 진심을 잘 받아들일지 아닐지 몰라 주저한다. 어떤 사람은 뉘우치고 자기반성의 기회로 삼지만, 어떤 사람은 그와 의가 상하기도 한다.

바울은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난다.’고 했다. 사실 말다툼의 태반은 논리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좋은 의도로 이야기 했다가 다툼이 되는 경우도 있고, 아무리 약이 되는 좋은 이야기도 다툼이 되고나면 안하느니만 못하다.

태도가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이 결여됐을 때, 상처를 받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은 쓴 소리도 달게 받을 줄 알아야 하는데, 우리 영혼이 그만큼 강하지 않다. 연약하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약1:19)고 말씀했다. 준비가 안 된 사람에게는 차라리 기회를 엿보아, 미루는 게 났다.

 

잠언9:9은,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말씀했다.

 

‘기회를 엿보다가 영영 말할 기회를 얻지 못하면 어떡하는가?’ 그래서 말이 성급해진다. 사실 말할 기회가 오지 않으면 좋은 것이다. 왜 그런가? 그 문제가 그에게 사라졌다는 것 아닌가? 그러나 걱정은 이것이다. ‘골든타임을 놓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암논이 이복누이였던 다말을 욕보였다. 다윗은 그때 그를 불러 준엄하게 꾸짖었어야 했다. 그런데 망설였다. 그리고 기회를 놓쳤다. 결과는 압살롬의 복수를 낳았다. 그때라도 아비로서 압살롬을 불러서 문제를 매듭지었어야 했다. 또 놓쳤다. 무엇을 염려했을까? 압살롬은 반역을 일으켰다. 결국, 압살롬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부하 장수들이 죽이고 말았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나의 아들 압살롬아!’ 후회한들 이미 때는 늦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말과 행실은 얼마나 지혜로운 듯 보여도 미련하며, 옳은 듯 보여도 어리석은가?!

 

어디서나 겪는 문제다. 가정에서도, 자녀에게도, 부부사이에도 너무나 가깝고 친밀한 관계에서 말이다. 가깝다고 여길수록 더 조심해야한다. 그런데 사람은 말로 분노의 잔을 쏟고 난 뒤에야 후회한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지혜로웠다. 총망받는 사역자였던 아볼로가 성경적 지식이 풍부하고 언변에는 능하나 요한의 세례만 알고 그리스도를 통한 성령의 세례를 알지도 듣지도 못함을 보고, 그를 그들의 식사자리로 초대했다. 충분히 환심을 사고 마음을 얻은 뒤에, 하나님의 도를 자세히 풀어 가르쳐주었다. 자신들보다 어리고 아직 뭔가 부족하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사역자로서의 인격과 자존심이 다치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아무튼 사람은 문제가 있는 상황에서 말 한 마디를 어떻게 하느냐에 다라 천냥 빚도 갚을 수 있다.

 

  1. 바울의 책망

지금 바울도 이런 고민에 빠져있다. 글로에를 통해 듣게 된 고린도 교회는 심각했다. 고린도 교회에는 교회에 일어날 수 있는 문제를 총망라하고 있다고 말씀드린 바 있다. 우상숭배, 음란의 문제, 신분격차로 인한 차별, 세상 법정에 서로를 고소고발하고 다투었다. 그러니 어떤 모습이었을지 생각해보라. 그 중에서도 오늘 말씀 3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끊이지 않는 ‘시기’와 ‘분쟁’이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문제의 핵심인지도 모른다. 당파로 편을 가르고 나는 바울파라, 아볼로파라 다투는 것을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사람문제로 시험에 들면, 영적으로 범죄케 된다. 찬송가 가사처럼.

교회는 다양한 사람이 모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이라는 은혜와 복음을 먼저 생각하지 않으면, 구원의 본질에서 멀어지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복음에서 멀어진다.

 

어느 목사님이 들려주신 이야기이다. 교인들이 다 같이 모여서 김장 300포기를 했다. 어떤 맛이 나야 하는가? 한 가지 맛이 날 것 같지만, 10가지 맛이 나더란다. 왜일까? 버무린 곳에 따라 다른 것이다. 충청도식, 전라도식, 경상도식, 강원도식, 방식도 다양하다. 은혜롭게 생각하면 10가지의 맛 모두 좋다. 그런데 재료를 넣는 과정에서 다툼이 일어나고 ‘자기의견이 받아들여졌느니, 무시당했느니’, ‘누구는 김치속을 싸 갔는데, 자기만 못 싸갔느니’, ‘누가 일을 잘하고 누구는 하는 것도 없이 일만 만드느니’ 하면서 갈등이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더란다. 은혜롭게 주의 일을 해야 하는데, 시험에 들고 상처받는 경우가 생겼다.

그래서 김장하기 전에 꼭 이 말을, 서로 간에 인사로 연습시키고 기도 뒤에 김장에 들어간다고 한다. “아이고, 맛있습니다.”, “아이고, 좋습니다.”, “권사님, 집사님 손맛이 최곱니다.”

 

이 말을 듣던 다른 목사님이 자신의 교회에도 이런 일이 생기곤 해서, 주문해서 먹는다고 했다.

 

속으로 생각을 했다. ‘성도들 간에 사랑과 배려를 연습하고 훈련할 기회는 사라졌구나.’, ‘그런 과정 없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을까!’ 물론 고민의 현실을 모르는 바 아니다.

 

문제를 삼자면 뭘 해도 갈등이 생긴다. 김치업체 선정을 두고도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고 다툼과 시비꺼리가 될 수 있다. 꼭 어디나 갈등유발자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 안에서 이렇게 저렇게 시험과 연단을 받으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더 잘 알아가고 구원의 확신을 더해가는 것이다.

편안하고 쉬운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친교하면서 사랑과 배려를 훈련하고 연습할 기회로 삼아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속이 상해도 주 안에서 자신의 의와 주장과 기준을 내려놓는 연습, 미음과 자존심이 상해도 용서하고 용납할 수 있는 연습, 그런 것을 통해서 예수의 성품을 닮아가고 성숙해가면서 그리스도의 향기는 짙어지게 된다.

 

그런데 1,2절을 보면, 이런 점에 고린도 교회는 아직도 초보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바울은 개탄하며 편지했다. 이제는 ‘신령한 자들을 대하는 수준’이어야 하는데 아직도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한다’고 말한다. 2절.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영적인 소화력, 여러분은 어떤가?

 

어쩌면 듣기에 따라서는 이 말 자체가 더 기분 나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어떻게 할 말을 전해야 할지 모르지만,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편지를 해야 했다.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런 편지를 쓰는 그의 진심을 고린도 교인들이 알아줄 수 있을까?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때로 목회자가 쓴 소리를 하더라도 달게 받을 수 있기는 수준까지 이르기를 바란다.

그는 판단을 지배했던 것은 이런 것이다. 첫째, 사람을 기쁘게 하겠는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겠는가? 사람 눈치 보느라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난 것을 가르치고 용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사람의 말이나 지혜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영의 능력으로 된다는 스가랴의 말씀에 의지하여 2장 13절에서 “오직 성령이 가르친 것으로 말한다.”고 하고 있다.

 

  1. 사람 중심, 하나님 중심

한 가지 더 따져보자. 4-5절을 보라.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라고 서로 말한다. 바울과 아볼로를 존경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아니다. 자기정당화의 구실일 뿐이었다.

 

예를 들면, 고린도 교회는 마게도냐에 있는 교회들에 비해, 넉넉한 편이었는데, 구제금을 내는 데에는 인색했다. 환란을 겪고 있는 마게도냐보다 못했다. ‘왜 우리가 도와야 하는가? 꼭 그래야 하는가?’라는 속으로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직분을 맡은 사람은 당연히 이 정도는 해야 된다고, 자기는 하지 않으면서 강요하고, 그것이 본질인 것처럼 부담감을 갖게 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9:7을 보면, 나중에 문제들과 갈등들이 해결된 뒤에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 문제에 관해서는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다만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둔다는 진리만은 기억하십시오.” 믿음의 분량에 따라 자발적인 마음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다.

결국 바울이나 아볼로를 빙자해서 자신을 드러내려는 의도였다. ‘나는 바울에게 이렇게 배웠다.’ 아볼로파에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아볼로파의 주장을 인정할 수 없다는 속내 아닌가? 결국 말뜻은 무엇인가? 자기식으로, 자기 뜻대로, 맘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즉 자기 고집의 구실이었을 뿐, 정말 바울과 아볼로를 존경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이런 속셈을 모를 리 없었다.

바울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본질로 돌아오며, 벗어나지 않기를 강청한다. 6-7을 보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그렇다. 사람을 보고 복을 바라는 사람과 하나님을 보고 복을 바라는 사람이 있다. 그 복을 주시는 대상이 누군지 알면 그 마음 중심에 시기와 분쟁과 다툼이 있겠는가, 용서와 오래 참음과 사랑이 있겠는가?

사람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 믿기에, 사람 때문에 실족하고 믿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며 자기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기억하라. 그에게는 심는 대로 거둔다는 말씀처럼 주님의 상급과 나타나는 영광도 특별하다.

 

  1. 기도하고 말하라.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 얼마나 고민이 많았는지 보여주는 곳이 있다. 고린도후서7:5.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육체가 편치 못해도 마음에 근심이 없고 소망과 보람과 기쁨이 있으면, 능히 이겨낸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 육신은 더 고통이다.

 

고린도후서7:8 상반부에는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고린도교회교인들에게 편지를 해놓고, 여러모로 고민이 됐다. 혹 이 편지를 씀으로 고린도교인들을 근심케 하고 더 분란을 자초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고린도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중에,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2:10)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2:13)”

 

누군가에게 어떤 말을 할 때, 충분히 기도하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앞에서 준비가 안 된 사람에게 차라리 미루는 게 났다고 말했다. 자기에게도 마찬가지다. 기도로 준비하지 않았을 때, 혹 비판으로 들을지도 모를 말을 하지 않는 게 좋다.

그런데도 바울은 마음이 편치 못해서, 디도를 통해 어떤 응답이 올지 너무나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드로아에서 전도의 문이 열렸으나, 계획을 보류하고 디도가 오는 골목인 마게도냐로 갔다.

 

고후7:8 후반부에,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 앎이라.”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편지를 받고, 처음에는 근심하고 기분이 상하고 감정이 상했다. 분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마음이 가라앉자 그리스도 예수 없이 인간적인 생각과 시기와 분쟁에 빠졌던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본 것이다. 부끄러웠다. 그리고 회개했다. 그리고 디도를 통해 바울은 이 소식을 듣게 됐다.

 

바울의 진심어린 마음도 중요하지만,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모습도 놀랍다. 오늘 현대인들이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해도, 그간에 보였던 모습이 정말 기독교인다운 모습이냐고 물어도, 마침내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선 점을 주님은 옳게 보신다. 이 모습이 어디 쉬운 일인가?!

 

자고로 교회와 신앙이란 이런 것이다.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고, 쓴 소리에 분개하기 전에 회개의 기회로 삼아,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재차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했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

 

여러분 가운데, 사랑의 훈련을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와 복음이 넘치기를 주님 바라신다. 때로는 갈등하고 시기하고 분쟁하더라도, 그것이 바로 훈련의 기회다. 주님께도 돌아서는 부단한 노력을 통해,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주님은 화평케 하는 자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정말 사람의 힘으로는 화평케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어디에 있든지, 먼저 주님과 화평하고, 이웃 사이에 화평케 하는 자들이 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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