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19일 주현절 후 7주
주의 자녀의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바라시는 자비의 하나님, 주현절 후 제 7번째 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이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동장군의 몸부림으로 인해 봄 처녀가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는 때에, 따스한 주님의 품을 그리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온기로 가슴을 채우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우리에게서 풍겨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이사야43:3)
- 여는 말
여러분 우리 삶에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각 처에서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냄새가 난다면?
- 율법과 복음
마태복음의 말씀(5:38-48)에서 38절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3절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율법과 예수님의 말씀이 다른 것일까? 어떻게 다른 것일까?
성서일과가 전하는 또 다른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레위기19:1-2, 9-18이다.
1-2절은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는 말씀이고, 9-18은 5개의 금지명령이 들어있다. 구체적으로 거룩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규정하고 있다.
① 추수할 때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버려두라(9-10).
② 도둑질, 거짓말, 속이는 말, 거짓 맹세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11-12).
③ 이웃을 억압하거나 착취하지 말고, 품꾼의 삯을 다음날까지 미루거나 장애인들을 직장이나 삶의 터전에서 차별하지 말라(13-14).
④ 가난한 자들이라고 무조건 편들거나 세력있는 사람이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롭게 재판하라(14-16).
⑤ 이웃을 미워하지 말고, 원수를 갚지 말라(17-18).
이웃, 사회적 약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뜻이 어떤 것인지를 엿볼 수 있다.
이 중에서, 오늘의 말씀과 관련한 구절은 17-18절이다.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니라.”(PPT)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과 비교해보면 어떤가? 다른가?
레위기 말씀과 비슷한 것 같은데, 주님은 왜 “너희가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말씀하신 것일까?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알고, 준행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은 때로, 나의 생각과 너희의 생각과 길이 다르다고 말씀하신다.
현실적으로 너무나 큰 상처를 주고, 아픔을 준 원수를 용납하고 사랑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나, 율법교사들, 랍비들은 이런 해석을 내놓고 있었다. 이런 것을 유권해석이라고 해야하나!?
첫 번째,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고 한 것이지, 원수를 미워하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니다. 두 번째,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한 것이지, 사랑하라고 한 것은 아니다. 셋째, 분명히 하나님께서 갚으실 것이다.
주님은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다. 그 교훈을 주의하라고 하신 말씀이다. 이웃과 원수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었다. 그래서 이런 해석과 결론이 나온다. “이웃은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라. 원수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갚으신다.”
신앙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현실적으로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렇지 않은가?
- 율법의 본뜻을 바로 잡으심
주님은 이것을 바로 잡으셨다. 사람관계라는 것이 언제든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사실은 이웃과 원수의 경계는 불분명하다. 주님은 율법과 다른 말씀을 전하신 것이 아니라 원뜻을 바로 잡으신 것이다. 45절에서 주님은, “하나님께서 악인과 선인에게 해를 비추신다”고 말씀하신다. 비를 선인과 악인에게도 내리신다. 이 대목에서 주어의 순서가 바뀌어 있다. 악인과 선인, 선인과 악인. 달리 말하면, 방점은 선인에게도 비를 내리신다. 틀린 말씀이 아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의 섭리를 다 헤아리지 못해서 원망도 한다. 46-47에서 주님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 “형제에게만 문안하는 것” 이것은 세리나 이방인들도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은 달라도 뭔가 달라야 함을 요구하셨다. 참 어려운 말씀이다.
많이 설명하지 않아도, 내 원수, 내게 깊은 상처와 아픔을 준 사람에게도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면, 참 억울하다. 하나님께서 악인에게도 은혜를 주셔서 그가 회개하고 용서받고 구원을 받으면 야, 받아들이기에 뭐가 어렵겠는가? 마치 바울처럼 말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지 않다. 악당 같은 이에게 더 좋은 일이 생기로 있고, 나에게 더 안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악당은 끝까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악당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편73편에서는 이점 때문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왜?
시73:12절에, “볼지어다.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는도다.” 정말 크게 실족할 뻔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했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데서 예수님을 떠났다. 요한복음6:66, “제자 중에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기는 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달라, 참 좋은 말씀이었다. 그러나 남이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감동할 줄 알면서, 자기 현실 속에 받아들이고 준행하기에는 너무 어려웠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꼭 기억하라.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에게도 똑같이 해를 비추어주신다. 반대로 선인과 악인에게도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이 말씀과 관련하여, 말씀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있다. 마태복음7:17-18 말씀이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PPT)
주님의 말씀대로, 선인에게든, 악인에게든 똑같이 해와 비를 주시지만 열매가 다르다. 그래서 잠언 24장에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1,19) 말씀했다.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는 것은 불행이다. 시련을 복음으로 알지 못하는 것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이다.
- 햇빛과 비의 은유
‘은혜’와 ‘시련’이라는 것으로 실증해보자.
1) 은혜에 대해서. 솔로몬 사후에 이스라엘은 두 왕국으로 나뉘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그래서 기름부음을 받고 북왕국의 왕이 되었다. 북왕국의 여로보암과 남왕국의 아비야가 다툴 때, 북왕국은 더 많은 군대로도 패하고 남왕국의 군대가 승기를 잡았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벧엘에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숭배라는 나쁜 열매가 열렸다. 제사장들을 쫓아냈다. 자기 마음대로 그 입맛에 맞는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앉혔다.
남왕국은 여로보암을 피해 남하한 제사장들을 거둬들였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했다. 겸손한 믿음의 열매가 열렸다.
역대하13장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아비야 때에 여로보암이 다시 강성하지 못하고 여호와의 치심을 입어 죽었고, 아비야는 점점 강성하였다.”
악인이 곧 잘 되는 것 같지만 삶의 열매를 보면 결국엔 들포도 뿐이다. 앞에서 말했던 시편 73:2,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2) 시인은 그렇게 보였던 것이 오해였음을 고백한다.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3-5,PPT),
이점만 보면 왜 아니겠는가? 실족할 만하다. 그런데 오해였다는 것은 이것이다. 그에게 열리는 열매가 역겨운 것을 보았다.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득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6-9,PPT)
그러면서 그가 하나님의 성소에 있을 때 깨달은 것이 있다.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17-19,PPT)
2) 시련에 대해서. 호세아와 히스기야는 동시대의 인물이다. 호세아는 북왕국의 왕, 히스기야는 남왕국의 왕이었다. 둘 다 앗수르의 위협으로 폐망의 위기 앞에 섰다. 큰 시련이었고, 어려움은 동일했다. 북왕국의 왕 호세아는 위기 앞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못하고, 의지가 될 만한 모든 우상을 섬겼다. 점차로 불의를 행하여, 하나님을 배역했다.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앗수르에게 잘 보이고자, 그 종교와 문화를 따르며, 위기를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성서는 “허무한 것을 뒤따르는 허망”이었다고 말한다(열하17:15). 결국 잘 보이려고 했던 앗수르에 의해 망했다.
히스기야는 잘 아는 대로, 앗수르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포위했을 때,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했다. 산헤립의 부하장수 랍사게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히스기야의 말과 신앙을 믿지말라.’ 백성 앞에서 조롱했을 때, 마음을 다하여 눈물로 기도했다. 그도 울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러나 결국 승리했다. 그에게 폭우 쏟아지고 광풍이 불었지만, 그 뒤에 땅이 더 단단해지듯이, 예루살렘에 평화가 찾아왔다.
시편1편에서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했던가! ‘의인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는 고백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참 신앙의 모습은 시련에 굴복하고 고난을 허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회로삼아, 하나님의 영광으로 바꾸어내는 사람이다. 잠언11:8은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으나, 악인은 자기의 길로 가느니라.” 악인은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순간 무너져버리지만, 의인은 반석위에 견고히 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가인과 아벨에 대해 하나님께서 차별하셨겠는가? 똑같이 주시는 은혜를 하나는 죄를 저지르는 데에,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에 사용했다. 똑같은 은혜 앞에, 혹은 똑같은 시련 앞에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는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못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좋은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다.
‘원수사랑’의 명령을 준행하다가 실족할 만한 일이 생기면, 그 열매로서 최종결과를 아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라. 원수 같은 이를 정죄할 필요 없다. 내 안에 좋은 열매를 맺고, 주님의 은혜와 복이 넘치면 그것이 최대의 복수다.
- 그리스도의 향기
그래서 악인이 잘되는 것을 부러워하지 말고 원수를 미워하거나 저주받기를 바라지 말고, 그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꽃피길 기도하라.
오늘 본문의 46절 말씀을 보니까, 그에게, 주님의 상급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적으로 떠오르는 말씀이 갈라디아서5:22-23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라고 했다. 이런 것들이 열매라고 하셨다.
이런 것이 우리를 정말 복되게 하는 것 아닌가? 세상의 축복과 번영이 오히려 불화와 불행의 빌미가 되지만, 성령의 열매를 통해서 우리가 받는 상급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는 참 자녀라는 의의 면류관이요, 잘했다 칭찬받는 기쁨의 영광이다.
잠언10:16은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르느니라.” 했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수고는 생명에 이르게 된다.
원수를 사랑하고 그가 잘되기를 빈 평안과 축복이 그에게 합당치 않으면, 누구에게 오는가? 반대로 저주와 원망은 누구를 공격하는 것인지 헤아리라. 이미 자기 속에서 자기에게 독이 되고 자기를 공격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누가 병드는가 하면, 원수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면 어떨까? 그것은 복된 삶을 말해주는 것이다. 주님은 사랑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표현을 썼다. 고린도교회에 분열과 갈등이 생기고 서로 원수 같이 되었지만,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가 풍겼던 것은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기도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준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삶 속에 예수의 향기가 풍겨나고, 정말 복된 일들이 사방에서 벌이지고, 꽃피어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소망이 넘치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