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8일 주현절 후 1주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신 사랑의 하나님, 주님의 현존하심을 드러내는 복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새해를 맞는 감격이 아직도 마음을 설레게 하는 때에, 그 계획과 각오를 다시 한 번 새기고, 맡겨진 사명에 충성하기로 다짐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부름 앞에 겸손한 자세로 응답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용서의 말씀)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히6:14-15)
- 순조롭게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말씀이 있다.
창세기 24:12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한 주간 성경통독, 릴레이금식, 요일별 집중중보기도를 하면서, 2017년 여러분을 위해 비는 저의 마음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배필을 구하기 위해 종 하나를 고향으로 보냈다.
그런데 걱정이다. ‘어떻게 좋은 사람을 고르나?’ 의견조율을 위해서 몇 번을 왔다갔다 해야할지 종잡을 수가 없다.
또 찾았다 한들, ‘선뜻 따라나설까?’ 이것도 미지수다. 만약 따라 오지 않는다면 이삭을 역으로 데리고 가야 하는가? 참 난감했다.
이 때 이 종은 이렇게 기도한다.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소서.”
-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아브라함은 종에게 이렇게 격려했다.
“(하나님께서)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창24:7)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좋으신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가 저와 여러분보다 앞서 계시다.
하나님의 사랑과 현존하심을 굳게 믿길 원하는 사람은 이정도의 확신과 안목이 있어야 한다.
두 번째 부분을 보자.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정말 순조롭게 잘 풀렸다. 마을 근방에 도착해서 우물곁에 있다가, 마침 사람들이 물 길러 올 시간이 됐다. 대부분 물 길러 오는 사람들은 처자들이다. 다른 곳을 헤매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께서 이런 지혜의 마음을 주셨다.
‘하나님, 물 길러 오는 처자에게 물 좀 달라고 부탁했을 때, 만약 이 낙타에게도 물을 주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 인줄 알겠나이다.’
낯선 사람의 낙타에게까지도 물을 줄줄 아는 사람이라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그렇게 기도하자 한 처자가 나타났다. 누군가?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신기한 체험이 풍성하길 빈다. 하나님께서 앞서 행하시기 때문에 만나는 체험을 말이다.
누군가? 바로 리브가였다. ‘이런 우연이 있는가!’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내 밀가의 아들 브두엘의 소생. 믿고 고르기에 알맞았다.
24:16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이 한마디 말로 (물론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한마디 말로도 나머지 일이 어찌 됐는지 알 수 있다.
남자의 이상형은? 10대는 이쁘냐고 묻는다. 20대는 이쁘냐고 묻는다. 30대는 이쁘냐고 묻는다. 40대는 아닐 것 같지만 마찬가지다. 50대도 이쁘냐고 묻는다. 60대는 어떨까?
여러분의 2017년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 이처럼 잘 풀릴 것이다. (제가) 그렇게 기도하고 있다.
- 말의 권세
그러기 위해서 오늘 말씀은 참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오늘 말씀은 아예 외우자.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곧 그의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잠18:20-21)
말의 힘이 무척이나 중요하고,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인간적인 생각과 말보다는 복음적인 말과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워주고 있다.
먼저 21절 말씀부터 살펴보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다’ 말은 권세가 있음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민수기 14:28절 말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가나안 정탐 후, 12명의 정탐꾼 중 10명은, 그 땅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대로 젖과 꿀이 흐르지만 우리는 차지하지 못하리라고 보고했다.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했고, 하나님 앞에 불평을 쏟아냈다.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는가,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났지 아니한가?”(민14:3)
불평하고 원망하는 말이 하나님의 귀에 들렸다.
반면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땠는가? 민수기14:8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두려워하지 말자.’, ‘담대하자.’ 소망과 확신의 말이 하나님의 귀에 들렸다.
전자와 후자는 어떤 결과를 가져오리라 생각하는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너희에게 행하리라.”
정말 그렇게 됐다. 그 불평하던 백성들은 어느 누구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다만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다.
기억하라. 말에 권세가 있다.
1) 사울이 전쟁을 앞두고 있는 병사들을, 어리석게도 금식하게 했다. 요나단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수풀에서 꿀을 발견하고 먹었다. 나중에 사울이 이 사실을 알게 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들이 왕의 명령을 어겼으니 화가 났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것도 ‘반드시’라고 강조하며 저주의 말을 퍼붓는다. 그의 운명이 어찌 됐겠는가? 길보아 전투에서 기개가 넘쳤던 그가 전사하고 말았다.
2) 야곱이 라헬과 레아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올 때였다. 추격하던 라반이 자신의 드라빔을 찾기 위해, 일행들을 수색했다. 야곱은 ‘외삼촌의 것을 누구에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맹세한다. 라헬이 그것을 숨긴지 모르고 한 말이었다. 라헬이 어떻게 됐는가? 노중에서 벤야민을 낳다가 죽고 말았다.
3) 반면에 우리가잘 아는 야베스는 이렇게 기도했다. 그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그리 하였더니 어떻게 됐는가?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4:10) 증거하고 있다.
4) 갈렙은 아무도 차지하기를 꺼려하고 어려워서 피했던 땅, 헤브론에 대해서 이렇게 기도했다.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그곳에는 거인으로 알려져 있는 아낙 사람이 있고, 크고 견고한 성읍이 있던 곳이다. “그럴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고백했다. 말대로 됐다.
꼭 그런 것은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각인시켜 주는 대목이다.
여러분의 입술은 어떤가? 주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마15:11)이고 말씀하셨다. 우리 속에 불평이 있고, 시기가 있고, 온갖 죄악이 있기에 하신 말씀이다. 실제로 세상살이 속에서 늘 좋은 말만 하지 못한다. 화가 나기도 하고 불만이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비난도 하고 저주의 말을 하기도 하고 욕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왜, 우리가 예수 안에 살면서 부정적인 말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어야 하겠는가?
수로보니게 이방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주님은 그를 외면하는 듯 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주님은 그 여인의 말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주님은 말 한마디라도 이렇게 믿음을 가지고 하길 바라신다. 이렇게 긍정적이고 믿음으로 고백하는 말은 귀신을 나가게 하는 권세가 있도록 주님이 역사하신다.
염려하고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주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이 시간 주님 안에서 새로운 소망을 가지라. 힘과 용기를 내시고 복된 말을 내는 입술로 결단하고 변화되기를 바란다.
다시 한 번 기억하자.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너희에게 행하리라.’
이왕이면, 말을 소망있게 하고, 여러분의 말과 생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를 주님은 바라신다. 그 뜻에 합당한 믿음을 가지라.
골로새서4:6의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러기에 올 한 해, 여러분의 입술에 소망있는 말의 권세가 넘치시길 축원한다.
- 입에서 나오는 열매
20절 말씀을 보자.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우리 입술에 소망있는 말의 권세가 있고, 복음이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단순하다.
1) 기도하라. 기도하는 입술은 우리를 소망있게 한다. 기도에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항상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기도하라.
요셉은 애굽에 팔려갔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과는 함께 하지 않으셔서 잘되는 일이 없지만, 요셉과만 함께 하셔서 형통하게 되었다는 말씀일까? 누구와는 함께 하셔서 잘되고, 나와는 함께 하지 않으셔서 잘 되는 일이 없는 것인가? 아니다.
중요한 단서가 있다. 보디발이 요셉을 보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보았다고 증거하고 있다. 이방인이었던 보디발이, 무슨 수로 알았을까? 억울하게 옥에 갇혀서 간수장은 그에게 제반 사무를 모두 맡겼다. 무엇을 보고 맡겼을까?
하나님을 믿는, 그의 말과 행실을 통하지 않고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어렵고 힘든 상황, 낙심이 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기도하면서 힘과 용기를 냈다. 그 기도하는 모습을 보디발이나 간수장이 지켜봤을 것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은 곤경에 빠지고 어려움에 빠진 이에게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셨다. 형통함으로 나타났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라.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서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신다고 히브리서가 말씀하고 있다.
부정적이던 우리를 새롭게 하고, 어둡던 우리를 밝게 하시며, 병들고 상한 심령으로 주님의 뜻을 받들지 못하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힘을 얻고, 용기를 얻어, 이기고 승리하게 된다. 주님의 말씀은 생명의 떡이다. 그 생명의 양식을 취할 때, 정말 배부르고 만족된 인생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된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내 능력과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그 은혜와 능력을 공급받고 승리하길 바라신다. 말씀을 사모하고 기도하고 바라면서, 오늘 아브라함의 종을 통해서 엿볼 수 있었던 은혜,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소서.” 이런 은총들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 그 좋은 열매를 취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께서 바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