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15일 주현절 후 2주
선한 목자이신 사랑의 하나님, 거룩하게 구별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매서운 추위에 한 점 따뜻한 햇살이 감사한 때에, 몸과 마음으로 주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하여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충만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
- 승리는 주께 속하였다.
두 구절을 소개해드리려고 한다.
① 역대하20:17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② 역대하24:24 아람 군대가 적은 무리로 왔으나 여호와께서 심히 큰 군대를 그들의 손에 넘기셨으니 이는 유다 사람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라 이와 같이 아람 사람들이 요아스를 징벌하였더라
전자는 여호사밧에게 주신 말씀이고, 후자는 그의 증손인 요아스에게 주신 말씀이다.
전자는 적은 군대로도 많은 군대를 이길 수 있다는 내용이고, 후자는 많은 군대가 적은 군대에게 패한다는 내용이다.
왜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인가, 생각해보라.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수적인 우세나 열세가 아니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안다.
여러분의 인생에는 어떤 싸움들이 놓여있는가? 어떤 문제들과 싸워야 하는가?
전도서 기자도 말하고 있다. 꼭 용사들이라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아니더라고 말이다.
이런 것도 비슷하다. 꼭 돈이 많다고 잘사는 것 아니다. 많이 배우고 학식이 풍부하다고 지혜로운 것도 아니다. 세상적인 지위와 명예와 힘을 가졌다고 의미있고 보람되고 승리하는 인생을 살아내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것들을 의지해야할 만큼 그 영혼은 한없이 허약하고, 하체가 부실할 수 있다.
- 고린도와 우리의 현실문제
1) 성서일과를 통해서 주시는 오늘의 말씀은 바울이 고린도에 보내는 편지의 첫 단락이다. 저는 여기에서 목회자 바울의 심정을 엿본다. 매사 성도들이 이기고 승리하길 바라는 마음 말이다.
바울이 편지를 할 때에는 단순히 소식이나 안부를 전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오늘의 말씀은, 그 말을 본격적으로 꺼내기 전에 정지작업에 해당한다. 신앙적인 문제, 개인적인 고민, 관계에서 벌어진 상체 등등, 스트레스를 겪는 문제들을, 어떻게 신앙적으로 실마리를 풀어야 하는지를 염두에 두면서 쓰고 있다.
1절,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2절,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 또 각처에서 우리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3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1절은 발신자다. 2절은 수신자, 3절은 축복의 인사이다.
발신자가 누군가에 따라 말의 신뢰성이 있다. 그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다.
수신자는 어떤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며 이 편지를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를 결정한다. 그들은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기에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한다.
그리고 발신자와 수신자를 이어주는 것은 “은혜와 평강”이라는 축복의 인사이다.
그런데 “은혜와 평강”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다. 결론적인 말을 하자면, 그것은 삶의 애환과 상처(아픔)와 문제를 가지고, 주의 이름으로 승리하기를 소망하는 성도들에게, 그에 걸맞은 승리를 주시는 주님의 능력이자 힘이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승리를 간절히 사모하길 바란다. 그 마음으로 오늘의 말씀을 듣기를 바란다.
2) 고린도교회는 시기, 분쟁, 법적소송, 재산권싸움, 명예훼손으로 인한 갈등, 결혼과 가정의 문제, 제사음식을 먹어도 되느냐 마느냐에 대한 의식적인 논쟁, 여자가 머리를 가려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전통과 변화에 대한 문제, 사람차별에 대한 문제, 멸시와 무시에 대한 상처 등등. 여러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사실적으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면서 겪는 많은 문제들을 총망라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개인적인 문제든, 가정문제든, 교회내적인 문제든, 세상과의 관계문제 등 말이다.
살다보면, 미움도 생겨나고, 욕심도 생겨난다. 선입견과 편견을 갖고 그래서 갈등도 일어나고 불화로 인해 심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상처를 받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한다.
수신자는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신앙으로 이기고 더 나은 단계의 존재와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오히려 다른 사람과 남에게 상처를 줬다. 심지어 가장 가깝고 친근해야 하는, 가정에서까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성도들은 어떤 괴리감과 내적인 갈등에 빠지는가? ① 성도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신앙적인 답을 알면서도 실행하지 못함. ②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사모하지만 육신으로는 죄의 법에 사로잡혀 산다. ③ 마음이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신앙적인 결단을 따라가지 못한다. 한마디로 성도에게 요구되는 하나님의 선한 싸움을 어떻게 싸울 수 있는가, 고민과 갈등에 빠졌다.
- 풍족한 은혜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 매우 기초적인 것을 바라야 한다는 것, 그것을 바라기로 결단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첫 번째 내용은 풍족한 은혜를 깨닫고 사모하는 일이다.
주로 자신이 화를 내고 인간적인 감정이 요동치는 이유는, 대부분 불만과 불신이 쌓일 때 그렇다. 사람이 넉넉해지고 만족이 있으면 웬만한 건 이겨낸다. 4절을 보면 ‘풍족한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말하고 있다. 7절은 ‘부족함이 없는 은사를 이미 받았음’을 전제하고 있다.
풍족한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무엇일까?
5절을 살펴보자.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많이 알고 말을 잘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문맥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문맥상 세상적인 지식과 언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체험한 것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럴 수 없다.
# 박복동 성도_저는 작년에 박복동 성도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능력 때문에, 어디에서든 살아계신 하나님과 복음을 자신 있게 증거할 수 있었다.
# 고난과 환난 중에 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세미나에서 강의할 수 있었다. 안 되는 것 같아 보여도 되는 역사, 한 길이 막히면 아홉 길이 열리는 역사도 마찬가지다.
이런 것을 의미한다.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다’고 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풍성한 체험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의 풍족한 은혜의 중요함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삶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옆에서 돌볼 때까지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며 나라를 안정적으로 운영했던 사람이다. 그가 왕이 된 것 자체가 극적이다.
① 오므리와 아합 : 엘리야는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 집 때문에 나라가 어려움에 빠졌다고 말한다.
② 아합의 아내 이세벨 : 그는 국정을 농단한 사람이다.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③ 그 딸은 아달랴이다. 남왕국 여호사밧의 아들이었던 여호람과 결혼했다. 그 어머니 이세벨의 피가 흘러서인지, 자기가 여왕이 되기 위해서 유다의 왕자들을 다 죽였다. 이 때 극적으로 살아남은 자가 요아스이다. 그 누이가 몰래 숨겨, 제사장 여호야다 밑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했다.
요아스는 40년간 남유다를 통치하면서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다. 그를 진심으로 돕던 사람이 여호야다였다. 그런데 그가 요아스가 왕이 된지 35년 만에 죽었다. 그러면 어떻게 돼야 하는가? 그 체험을 바탕으로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했다. 세속화되는 데 1년도 걸리지 않았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겼다.
전쟁을 어떻게 치르려 했을까? 하나님께 맡기지 않았다.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도 않은 결과는 처참했다. 많은 군대로도 적은 군대를 이기지 못했다.
반면에 여호사밧은 어떤가? 너무나 많은 아람군대가 쳐들어 왔다. 감당할 수 없었다. 모압과 암몬이 연합해서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 속에서 싸워야할 문제들은 동시다발적으로 자신을 에워싼다. 건강이 위협하고 물질이 시험에 들게 하고 사람이 걸림이 되기도 한다.)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곡히 기도했다. 작은 전쟁이라도 하나님을 신뢰했고 의지했다. 그 도우심과 은혜를 구했다.
역대하20:17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이런 응답과 확신으로 승리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지난주에 나누었던 말씀처럼, ‘아브라함의 종보다 앞서 가서 예비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도왔다.
우리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이기고 승리하는 비결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풍족한 은혜를 구하면서 이길 힘을 주시기를 간구하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은총을 선물로 부어주시면, 우리 안에는 즉각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이 생겨난다.
- 주님과 나누는 교제
두 번째, 우리가 바라고 결단해야할 기초적인 것은 주님과의 교제다. 그 은혜를 공급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공급받는가? 9절을 보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주와 더불어 교제하는 삶을 통해서 그 은혜를 공급받는다.
그런데 주님과의 교제에 어려움이 있다면 이유가 무엇일까?
시간이 없어서인가?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인가? 믿음이 없어서인가? 성경이 지속적으로 경계하고 있는 것이 있다. 죄의 문제이다.
렘 5:25,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죄는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이거나 법적인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가림막 같은 것이다. 주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는데, 죄는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재미가 없다. 기쁨이 없다.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 그 이유를 여러 차례 설명했다. 왜인가? 아벨은 믿음으로 드렸고, 가인은 믿음으로 드리지 못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그러나 성경본문 자체만 놓고 본다면, 하나님이 안 받으신 것이 아니라 가인이 드리지 못한 것이다. 왜?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한 채, 제사를 드렸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창4:6-7)
죄의 문제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을 향해 낯을 들지 못하고 바라보지 못했다. 아담이 범죄 했을 때, 스스로 벗을 줄 알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가인은 몸은 하나님 앞에 있는지 모르지만, 마음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에스라(9:6)는 이렇게 회중을 대표해서 이렇게 회개기도를 하고 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한다. 몸은 하나님 앞에 나와 있지만 나의 생각과 마음은 죄 때문에 다른 데 가있다. 마음이 하나님 앞에 와 있어야 한다.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가?
은지의 논술지도를 하다가, 아내가 들려준 이야기이다.
두 스님이 길을 가다가 개울을 건너야 하는데, 한 처자가 물살이 세서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매우 아름답게 생긴 처자였다. 스님 중 한 분이 그 처자를 업어서 건너게 해줬다. 다시 가던 길을 가는데, 다른 스님이, 그 스님에게 불만을 털어놨다. ‘스님으로서 여자를 멀리 해야 하는데, 어떻게 그 개울에서 여자를 업어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고서도 참 승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 스님이 이렇게 말했다. ‘너는 왜 아직도 그 여인을 등에 업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다른 스님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여자에 유혹된 마음에 있었다.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미쁘다’의 뜻이 무엇인가? 믿음을 나타내는 말인데, 단순히 믿을 만한 분이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와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하여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죄에 머물러 있지 않고 하나님 앞에 있기를 바라신다. 세상의 유혹된 마음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미쁘시다고 하는 것이다. 즉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끝이 없다.
에스라가 수문 광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할 때, 백성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멘 아멘 응답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떡보다도 꿀보다도 더 달콤한 생명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말씀을 듣고 회개와 감격 때문에 울었고, 마치 부흥성회 같았다. 그때, 느헤미야가 하는 말이 있다.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8:10)
내 방법과 생각과 감정이 당장은 옳아보여도, 하나님 편에서는 죄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주님과의 교제는 내 속의 죄를 이기는 역적인 힘과 능력이 된다. 미쁘신 주님은 우리에게 참기쁨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주 안에서 나는 죽고, 기쁨 되시는 주님이 사시기를 바라신다.
주의 성일, 주일에,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 승리케 하시는 주님
8절을 읽어보자.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우리에 대한 주님의 약속이다.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주님께서 승리를 주실 줄 믿으라. 승리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고린도 교회가 그랬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모습이 그랬다. ‘성도로 부르심에 합당한 승리’를 누렸다.
이시간 인간적인 생각을 버리기로 결단하고 주의 은혜를 사모하며, 주님께 맡기기로 결단하라. 큰 원수들이 몰려오고 문제가 덮쳐도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여호사밧에게 들린 응답이 여러분 마음 가운데에도 확신으로 있기를 바란다.
미쁘신 주님과의 교제를 사모하고 즐거워함으로 승리하라. 그것이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