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 복되도다(시편146-1-10)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 복되도다(시편146-1-10)

 

 

2017년 1월 1일, 신년주일

시간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 신년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희망을 가득 안고 새해의 첫 단추를 채우는 신년주일에,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기로 새롭게 다짐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저희들의 마음 중심을 기뻐 받아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후6:11-12a)

 

 

  • 인사

새해 첫 예배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무한하신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

 

 

  1. 소망의 여인 룻

저는 소망을 가졌던 대표적인 사람을 뽑으라면 룻과 다윗을 선택하고 싶다. 왜냐하면 룻은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어디로 보나 굉장한 약자였고, 소망을 가질만한 구석이 없는 자였다. 그러나 소망을 가지고 담대한 삶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다윗은 물론 룻과는 다르다. 그는 얼마든지 인간적인 소망을 풍성히 기대할 수도 있지만, 더 나은 소망을 가졌던 인물이다. 참소망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먼저 룻에 대해 살펴보자.

 

룻은 모압 여인이다. 잘 아시는대로,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왔다.

사실 나오미의 가족은 그런대로 살았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을지도 모르지만 남편 엘리멜렉, 두 아들 말론과 기룐, 이렇게 번듯한 가정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줄 알았다.

그런데 베들레헴에 기근이 들어 모압 땅에 이주했다. 가족이 힘을 합쳐 일치된 마음으로 함께 한다는 것은 행복한 것이다. 어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렇더라도 어디서든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다는 화목만 있으면 두려울 것이 없다.

하나님은 이주한 모압에서 나름 잘 정착하며 살도록 복을 주셨다. 말론과 기룐은 다들 착한 아내들(오르바와 룻)을 얻었다.

불행이 닥쳤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남편이 죽고, 두 아들마저 죽었다. 이유는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다. 성경이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불행을 만나고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처지가 중요한 것 같다. 그는 스스로의 이름을 ‘마라’(우리식으로 의역하자면 지지리 복도 없는 사람, 혹은 팔자 더러운 사람 정도)라 불렀다.

 

모압 여인 룻이 무엇을 보고 불행에 빠진 시어머니를 따라, 유대 땅까지 왔던 것일까? 나오미는 모압에서, 두 며느리에게 다시 재가하라고 했다. 하지만, 룻은 어머니가 가시는 곳에 자기도 가고, 어머니가 머무시는 곳에 자기도 머물겠다고 끝까지 따랐다.

 

게다가 모압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태도는 차갑다. 모압은 그 왕 발락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를 하게 했던 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발람의 입에서 저주를 막으시는 대신 축복을 하게 하셔서, 번번이 발락의 청탁이 빗나갔다. 발람은 발락에게 모압의 여인과 이스라엘이 음행하게 함으로 하나님을 모독하게 하면 이스라엘에 재앙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쳐 줬다. 그리고 그대로 됐다.

이 역사적인 뿌리 때문에 신명기 23:3-4a는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지도 못하고 입회하지도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십 대(代)가 지나도 영원히 지나도 못 들어온다.” 주민등록증이 없이 살아간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인간적으로 나오미를 따라 온다는 것은 아무 소망이 없는 것이다. 사회적 차별을 감수해야 했고, 냉대는 불 보듯 뻔하다. 저는 이런 멜로도 생각해봤다. 그는 남편을 무지무지 사랑했고,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평생 잊지 못한다. 시어머니를 보고 있으면 남편을 추억할 수 있다. 게다가 자기가 사랑했던 남편의 어머니를 그냥 가시게 할 수 없는 심성까지 착하다. 어디까지나 상상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는 소망을 가진 인물이었다.

 

시모를 따라 베들레헴에 왔을 때, 생각 이상으로 참 우여곡절이 많았다. 낯설게 보는 동네 사람들의 시선도 불편했고, 생계도 어려웠다.

그러나 소망을 가진 사람은 긍정적이다. 뭐라도 해보겠다는 삶의 의지를 가진다.

그는 이삭줍기에 나섰다. 여차여차, 중간과정의 이야기는 생략하고.

하나님은 뜻하지 않은 인생을 여시는 분이시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불쌍한 사람이나 약자를 긍휼히 대하신다.

여러분 인간적인 소망과 신앙적인 소망을 구분해보라. 어느 하나는 자칫 과하면 욕심이고 욕망이 될 수 도 있다. 그는 인간적인 소망을,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는 찾을 수도, 아니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신앙적인 소망이나 하나님의 자비가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 보아스를 만나게 되고, 형사취수제에 의해서 둘은 가장 합법적으로 결혼을 하고 기업 무르기를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한 길이 막히면, 아홉 길을 내시고,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게 하시며, 소망을 가진 자에게 낙심치 않게 하신다.

 

 

  1. 소망을 가진 다윗

앞에서 말했던 대로, 왜 다윗의 소망은 남달랐다고 말하는 것일까?

먼저 그의 소망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는 것이 좋겠다.

사울을 피해 도피자의 생활을 할 때, 환난과 고난 중에서도 그것을 참고 이겨내며 앞으로 왕이 된다거나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 이런 꿈과 소망을 가졌던 것일까? 그는 물론 백전백승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그런 유명세를 타는 것에 대해 소망으로 삼았던 것일까? 출세와 성공 면으로 보면 다윗의 소망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

 

생각해보면 참 멋진 소망이다. 우리 모두가 이런 소망을 사모할 수 있으면 좋겠다.

어떤 소망인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이 시기가 참 궁금하다) 그의 소망은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를 그의 성 내에 만들고, 거기에 궤를 모셔다가, 열방 중에 제사장의 나라가 되는 것이었다. 꼭 절기나 무슨 일이 있을 때에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상시적으로, 늘 주님께 예배하는 것을 소망했다.

 

그래서 오늘 시편의 고백에서도 2절에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노래하고 있다. 5절은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상시적으로 주님을 찬양할 수 있는 길은 그것이 가능한 제도와 여건과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성전을 짓고, 만민이 주님 앞에 나와 예배하며, 온 나라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도록 통치되는 나라.

분명히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복지로도 이어진다고 믿었다. 7절에서 10절 말씀은 그 소망과 기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제왕시가라고 할 수 있는 시편 2편에서, 이런 표현을 찾을 수 있다. 이방 나라, 여러 민족, 세상의 군왕들, 그 중에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시2:10-11)

 

단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다. 성시화.

 

‘하나님과 함께 하는 나라, 제사장의 나라’에 대한 꿈과 소망 멋지지 아니한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가정’, ‘하나님과 함께 하는 직장’,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녀’, ‘하나님과 함께 하는 2017’ 멋진 소망이다. ‘어디서나 주님을 예배하고 찬송하며, 그 기쁨이 충만하여 즐겁게 살아간다. 어려움도 당당히 기쁘게 이겨낸다.’ 얼마나 사모할 만한 소망인가? 2017년에 여러분의 삶의 전 영역에서 성시화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라.

 

물론 하나님께서 다윗 대(代)에 성전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 과업은 솔로몬을 통해서 이루게 하셨다. 여기서, 어쩌면 참소망은 사람이 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에, 내것이라 주장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솔로몬이 만약 성전을 짓고 그것을 자기의 것, 자기가 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윗은 그 소망 때문에, 집요하리만치, 그와 관련된 것을 꼼꼼히 준비해서 솔로몬에게 물려줬다. 역대상22;16에는 “금과 은과 놋과 철이 무수하다.”고 증거하고 있다. 자기 사명이 아니라고 방관하지 않고, 사명은 아니지만 소망이기에 부푼 기대로 역할을 다했다.

하나님의 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 다윗의 모습을 생각해보라. 너무나 기쁜 나머지, 왕의 체면을 다 버리고, ‘춤추며 뛰놀 듯’ 좋아했다. 그리고 역대상16:7이하의 감사찬양을 드리고 있다. 그 중의 한 대목이다.

 

“그의 종 이스라엘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는 그의 행하신 기사와 그의 이적과 그의 입의 법도를 기억할지어다.”(12-13)

 

참소망은 이런 것 아닐까? 주님과 늘 함께하며, 주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은혜 안에서 주님의 품과 현존을 느끼며 사는 것, 그리고 그 영광.

 

벧전2:9은 말씀하고 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이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에 대한 참소망의 말씀이다. 이 시간 이 소망을 사모할 수 있기를 바란다. 더욱 하나님을 예배하고 감사찬양드림을 소망하라. 임마누엘되신 주님을 증거하는 복음전도자의 삶을 소망하라. 주님께서 기뻐하신다.

주님은 다윗에게 승리를 주셨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에게도 동일한 승리를 주신다.

 

 

  1. 영원한 참소망

앞에서 이런 소망을 언제부터 갖게 됐는지 궁금하다고 했는데, 다윗의 소망은 언제부터인줄 아는가? 아마도 저와 여러분의 상식이 깨질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니, 다윗 때부터인 줄 알았는데, 아니다. 그 시점을 추적하다 보면, 다윗을 금방 지나친다. 훨씬 더 올라간다. 다윗의 아버지는 이새다. 그의 아버지는 오벳이다. 그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보아스다. 어머니는, 룻이다. 바로 이때부터였다. 달리 말하면 룻의 소망이 없이는 다윗도 없다.

그러고 보니까, 사실 아직 룻의 소망이 무엇이었는지는 말하지도 않았다. 그가 어려움 속에서도 소망을 품은 인물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복되게 하셨다는 것을 말했을 뿐, 그의 소망은 말하지도 않았다. 무엇일까?

 

룻이, 만류하던 나오미를, 따라가겠다며 이렇게 애원한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이 부분이구나. 이 부분이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룻1:16)

 

모압 여인의 소망은 잘사는 것도 아니었고, 부귀영화도 아니었다. 개인신상의 유익을 구치 않았다. 다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자기의 하나님이 되는 것, 그것이 그의 소망이었다.

 

이 시간 이것을 사모하고 결단하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 다른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나와 동행하시고 나를 이끄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되는 것 말이다.

 

아시는가? 바로 이것이 하늘나라다. 여러분 삶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역사하시며 임하시는 곳. 새해에 이 소망도 여러분의 가정과 삶의 자리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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