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목자이신 사랑의 하나님, 강림절 넷째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시내 곳곳에 설치된 성탄목과 거리마다 울려퍼지는 캐롤이 성탄절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때에,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기 위해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품 안에서 심신의 안위를 얻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8:21)
- 어지러운 세상 중에
한 주간 어떻게 지내셨는가? 어지러운 세상이다. 여전히 갑을관계에서 부당함에 호소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들이 있다. “금수저, 흙수저에 대한 유서”를 남겨놓고 목숨을 끊은 서울대생은, 이 사회에서 젊은이들이 꿈을 갖는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런가하면 또 모녀가 번개탄을 피워놓고 12살 딸과 함께 죽었다. 이런 모든 것은 우리를 혼란케 했다.
정치에 대한 실망도 컸다. 저는 한 가지 굉장히 잘못된 것을 봤다. 정치의 목적을, 잘못 인식하고 있다. 그 목적이 정권을 지켜내거나 교체하는데 있다고 한다. 정치인과 언론들이 하나 같이 그렇다.
정치의 올바른 정의와 목적은 무엇일까? 정치에서 ‘치’(治)자는 다스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다스림이 아니다. 사람들이든, 집단이든 이해관계가 다르고 이익관계가 다르다. 그래서 갈등이 일어나고 다툼과 분쟁이 일어난다. 정치는 그 정사를 다루는 것이다. 그 묘미는 서로 윈윈할 수 있는 해결책을 모색하고 어지러운 질서를 바로잡는 데 있다. 그래서 정치의 사전적인 의미는 “통치자나 정치가가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거나 통제하고 국가의 정책과 목적을 실현시키는 일”이라고 되어있다.
어지러움을 질서로, 분쟁과 다툼을 화해와 평화로 바꾸는 일이 본래 할 일이다. 그래서 대화와 타협과 존중과 배려가 정말 중요하다. 그런데 그것은 없이 상대편을 규정하고 정죄하고 분열과 다툼을 일삼는다. 여기에 국민들이 피로를 느낀다. 정치에 대한 정의관(定意觀)을 잘못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고 하는 홍수사건 이전의 창세기 말씀이 들려온다.
사정이 이러한데, ‘이 속에서 종교, 교회의 역할은 무엇일까?’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평범한 소시민들이 묻는다. 위로와 치유와 회복을 주는 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 사랑과 긍휼과 자비로 응답해주길 바란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는 모습에 실망하고 있는 것 같다.
어느 새 사람들의 마음에는 ‘너라고 안 그래?’, ‘너라고 깨끗하냐?’, ‘너는 별 수 있냐?’라는 푸념을 갖기 시작했다. 선하고 정의롭고 진리이며 참아름다운 것을 향한 발걸음도 멈추고 포기한 것 같다. 종교, 심지어 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교회는 더 이상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길을 포기한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사이비나 이단은 이런 점들만 들어서 정상적인 교회를 공격하는 구실을 삼기도 한다. 그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질 때도 있다.
얼마 전, 옆 건물과 관계된 분이 제게 막말하더라. 잠시 주차를 해놨는데, 차를 빼라는 것이었다. 자기가 건물을 지을 때에는 아쉬운 듯 대했다. 먼지가 나도, 소음이 들려도 참아주고 선대했다. 이제 더 이상 아쉬운 소리 안해도 되니까, 안하무인이었다. ‘목사면 다냐?’는 식으로 전화기에 고함을 쳤다. ‘참 이기적이구나!’, ‘혹 바른 소리를 하면 밖에 나가서 뭐라고 말할까?’ 못됐다. 속상했지만 예수님을 생각하며 참았다.
- 믿는 자여 어이할꼬?
오늘 말씀 앞부분에 보면 주님께서 이 세대를 비유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함과 같도다.”
세상은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 같다. ‘어차피 소용없다.’, ‘적당히 살아라.’, ‘손해보는 사람만 바보다.’, ‘착하게 살지 말아라.’, ‘나만 아니면 된다.’, ‘그중에 제일은 돈이니라.’ 등등 암묵적인 굴복을 강요하는 것 같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과연 이것이 옳을까? 아니 옳고 그름을 떠나서, 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은 그 포기를 어떻게 여기실까?
이런 답답한 마음으로 기도하는데, 이사야가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지러운 세상 중에 이사야는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 천상에서 하나님께서 묻고 찾으시는 음성이 들었다. 오늘 우리도 그 음성을 선명히 들을 수 있기를 주님은 바라신다. 우리 교회는 좋은 교회가 돼야한다는 소명을 품었다.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며 희망과 위로와 힘을 주는 교회가 돼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여러분 안믿는 사람들, 교회를 안다니는 사람들에게 교회에 나오라고 부르면,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할 때, 염려하는 것이 무엇인가? ‘너희 교회는 다르냐?’, ‘무엇으로 장담하느냐?’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뾰족한 말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세상의 교회가 얼마나 많은데, 우리 교회만 특별하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하는 자문이 들 수도 있다. 큰 교회들이 많은데, 우리 교회처럼 작은 교회가 무슨 영향력이 있는가 하는 자괴감을 가질 수도 있다. 큰 교회들이 그런 역할을 해야지, 아직 우리는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실까? 많은 교회들이 세속화 되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세상과 다를 바 없이 똑같아 진다는 것이다. 교회도 하나의 기업처럼 생각하고 더 나쁘게도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시험에 들어, 아예 그렇게 돼야 하는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진정한 기대가 무엇인지 헤아려보면 된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가, 다른 교회들이 어떻게 하든, 남들이 어떻게 하든,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길 바라신다. 남이 하겠지 미루며 먼 산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복되고 참된 교회가 되기를 바라신다. 좋은 교회가 되기를 바라신다. 복되기를 바라신다. 예수님의 핏값으로 세우신 몸된 교회가 빌라델비아 교회나 서머나 교회처럼 칭찬 받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신다. 그것이 마지막 때, 요한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된 주님의 말씀이다.
-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기대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할까? 철두철미하게 무장된 사명이나 충성된 믿음일까? 나중은 그래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시작은 아니다. 복주시고 상주시는 하나님만을 믿어야 한다. 우리를 부요케 하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혹자는 다시 기복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세계에서 이 메지를 인터넷으로 들을 수 있기에) 아니다.
이런 상상을 해보자. 자신이 1년밖에 살 수 없는데,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하나는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1년 후에 5억원 정도의 보험금을 받는 것이다. 어느 것을 선택하겠는가? 수능을 마친 어느 고등학교에서 실험했다는데, 영상을 보자. 아이들의 꿈과, 아버지의 꿈이 나온다.
(영상) _ 모든 아버지들은 자신의 꿈 대신에 가족을 위해서 5억을 선택
이 영상을 보면서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이 영상에 나오는 가장(家長)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엿볼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여기서 이러지 않을 사람이 있는가? 자식을 위해서 말이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플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6:30)
이런 점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이 부분은 이것까지 포함하는 말이다. “변변치 못하고 약한 자식일 지라도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이라고 말이다.
학생들은 하나같이 꿈을 선택하겠다고 했다. 꿈도 다양하고 기발했다. ‘학교 운동장에 농사를 짓겠다.’ 그 엉뚱함도, 자녀이니까, 좋다. 아버지들도 꿈이 있다. 그러나 꿈을 택하지 않았다. 무엇을 택했는가? 5억을 택한 것일까? 아니다. 가족의 앞날을 택한 것이다. 자녀들의 미래를 택한 것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행복을 택한 것이다.
여러분, 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증거라고 말하는지 알겠는가? 가족과 자녀들의 행복을 선택한 우리들의 아버지의 마음을 안다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감사요, 눈물인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얼마나 복되기를 바라는 지 아시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만약, 자식이 그 5억이라는 돈에 눈이 멀어서 꿈을 버리고, 돈에만 신경을 쓴다면 말이다. 그 자식이 돈에 대한 궁리만 하고 있고, 매여 있다면 어떻겠는가? 발판삼아 비상하지 못한다면 말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6:31-34)
세상일로 낙심치 말라. 인간적인 생각 때문에 신앙을 버리고 욕심을 부린다. 그래서 세상은 더 어지러워진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는 주님의 약속을 믿으라.
어쩌면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도 거창한 명분이나 공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자녀의 복되고 행복한 꿈과 비전과 소망인지도 모른다. 복음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인간의 업적이나 공로를 바라시는 주님의 뜻으로만 해석할 수 없다.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기대처럼, 자신의 꿈을 성취하고 이루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응원처럼, 우리가 구원받고 복되기를 바라시는 뜻이 하나님의 가장 좋으신 뜻과 나라가 아닐까? 잘 생각해보라.
요즘은 설교를 준비한다는 것이 이런 것이다. ‘복된 길로’의 초대장을 쓰는 것과 같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로 초대장을 쓰는 심정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하고 경험한 저의 간절한 사명이다. 그러자 주님께서 간절히 부르시는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주리니 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같이 할 것이라.”(이사야44:2-4)
“오호라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이사야55:1)
- 와서 쉬어라
오늘의 말씀은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탄식 뒤에 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갈릴리에서 주님은 많은 일들을 행하시고 능력을 베푸셨지만, 회개하지 않고 믿음의 눈을 뜨지 못했다. 그 고을들 마다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했다.
25절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듣지 못하는 것을 듣게 되고,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주님을 그것을 감사하셨다. ‘어린아이들’은 은유다. 세상에서 미약하고 보잘 것 없고, 무시당하는 존재가 어린 아이다. 세상은 피리를 불고 슬피 울어도 춤을 추거나 가슴을 치지 않게 되었지만, 그러나 주님은 세상에서 지혜있다고 말하고 슬기롭다고 말하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셨다. 하나님은 비천한 자를 높이시고, 높은 자를 낮추신다. 지혜있다고 하는자를 어리석게 만드시고, 미련하다고 하는 자를 귀히 쓰신다.
우리가 어떻게 정말 좋은 교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 여러분 복주시고 상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우리의 능력이나 의지나 실력 때문이 아니다. 어둠 속에 샛별은 더욱 빛나고, 악취 속에 꽃의 향기는 진가를 발휘한다. 약함 속에 강함이 되신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부르신다. 이 부르심 때문에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가 힘과 위로와 용기를 얻는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여러분 주님은 복음 가운데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그리고 세상일에, 정사에 지치고 상한 이들을 아무 조건 없이, 이유 없이 부르셔서 쉼을 얻기를 원하신다. 자비와 긍휼을 우리에게 베풀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오늘 우리에게서 꽃피길 바라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교회, 그 은혜가 우리에게 가득 넘쳐,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순종하고 충성하는 교회요,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다.
여러분, 오늘의 말씀을 준비하고 기다하다가 엉뚱하게 얻은 결론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일방적인 명령을 내리고, ‘듣게’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기도의 공로를 ‘쌓게’하기 위해서, 그래야만 응답의 컷트라인을 지날 수 있기 때문도 아니다. 기도하면서 그 위로하시는 음성을 듣고, 지치고 상한 심령이 힘을 얻기를 바라신다. 세상의 복잡한 일들을 마주하며, 그것에 미혹되지 않고 주님 앞에 내려놓길 바라신다. 세상의 정사에서 길을 발견하지 못하던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길과 진리와 생명을 발견하길 원하신다. 주님 안에서 전투적인 힘을 얻고 세상에 나가 그릇된 힘을 발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의 힘을 얻고, 세상에 나아가 그 사랑에 인도함을 받는 승리의 힘을 바라신다.
여러분 이사야를 통한 주님의 음성이 다시 한 번 들려온다.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주리니 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같이 할 것이라.”(이사야44:2-4)
‘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 그와 같이 어지러운 세상 중에 주님을 믿는 우리 모두가 복음을 경험하고, 그 복음을 경험하는 자답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거룩한 길을 포기하고 않고 걷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복음적인 복된 삶을 살며, 빛과 소금이 되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바라신다. 그 은혜와 사랑이 여러분 심령 속에 충만하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