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13. / 강림절 3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 용서와 자비를 구하는 자를 부르시고 찾으시는 사랑의 하나님, 강림절 셋째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우상이 가득하고 혼란과 어긋남이 심하며 그 괴로움을 더하는 때에, 진리의 영으로 인도하시고 참생명의 능력을 주시는 따뜻한 주님의 품에 안기고자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우리에게 따뜻하고 밝은 빛을 비추어 주옵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이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주님께 합당하게 드리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용서의 말씀)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호12:6)

 

브엘세바의 에셀나무

 

  1. 복음과 회복으로의 초대

여러분, 한 주간 얼마나 힘드셨는가? 어지럽고 어수선한 세상 속에서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중심은 잘 잡았는가? 우상이 가득한 세상이 돼가고 있다. 그 놀음에 현혹되거나 미혹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하나님은 주님을 바라보며 말씀에 귀기울이기를 바라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은총과 평화가 가득하기를 원하신다.

사랑과 용서와 화해로 이끌지 못하고 미움과 다툼과 분쟁을 일삼게 하는 것은 결단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 아니다. 그런데 사탄은 그 모습을 수많은 당위성과 명분과 거짓논리로 바꿔가며, 그 모습을 감추고 미혹의 영과 분열의 영을 그 틈에 불어넣는다. 그리고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서 파탄나게 한다.

그러나 이 시간 하나님은 채우길 원하신다. 자비와 사랑을 갈급해하는 사람마다 주님은 우리를 온전케 하는 진리와 생명과 사랑의 영을 불어넣어주신다. 그 충만함을 힘입어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시라.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과 헌신을 통해 세상을 고치시고 회복시키길 원하신다.

 

 

  1. 복음의 비결

여러분, 이런 말이 있다. ‘방법은 여러 가지이나 원리는 하나다.’ 비결을 터득하라는 말일 것이다.

 

이럴 땐, 이렇게 하고, 저럴 땐 저렇게 해야 하는 어떤 비결이 있다.

 

1) 고난이 내 인생을 가리고 있을 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길 힘과 능력을 주시고, 피할 길을 내시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2) 내일에 대한 소망이 희박해 보일 때, ‘울면서라도 씨를 뿌리라.’ 그러면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되는 날이 온다.

3) 두려움과 불안과 염려와 근심이 찾아 올 때, 주님 안에서 울라. 마음이 청결해진다. 그러면 하나님을 보게 된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다.”

4) 마음의 중심을 어지럽히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게 되는 것 같을 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 심령의 견고한 바위가 되어주신다.

5) 병마가 사랑하는 이를 덮을 때, 가족 모두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개인적 이야기)

6) 나는 지더라도, 하나님은 이기며, 나는 꺾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꺾일 수 없다. 그것을 보여주려면 에셀나무를 심으라.

 

저마다 상황이 다르고 입장과 처지가 다르더라도 통하는 비결이다. 그런데 이런 것 모두를 하나로 묶는 원리요 핵심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 예수이시다. 그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고 증거하는 이를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신다. 우리 심중에 응답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묵상하고 들으며 인도함을 받는다. 거기서 복음적 삶이 시작된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이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함으로써 우리가 구원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사는 사람이 듣게 되는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죄인됨, 연약함, 미천함,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가장 선하신 섭리와 계획을 예비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 예배에 참여하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이들이 이것을 깨닫기를 바라신다.

 

 

  1. 복음의 성취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복받는 자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고 복을 받는 데에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늘 말씀의 내용은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자과 비골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는 장면이다. 아비멜렉은 그랄지역의 왕이다. 아브라함이 거주하던 곳의 통치자였다. 예전에 아브라함과의 일화가 있긴 한데, 잠시 미뤄두자.

아비멜렉이 먼저 찾아와서 언약을 맺자고 한다. 서로 후대하기로 말이다. 아브라함도 그러자고 한다. 22절을 보면,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자, 무슨 의미일까? ‘하나님 수호신’을 의미하는 것일까?

 

25절을 보면 아비멜렉에 대한 책망의 내용이 나온다. 그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강제로 빼앗은 일들에 관해서였다. 아비멜렉은 듣지 못했고 몰랐던 일이라고 일단 발뺌을 했다. 성경은 그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이것을 알 수 있다.

아비멜렉은 왕씩이나 돼가지고 무슨 아쉬움이 있어 찾아왔을까? 그리고 계약을 맺자고 하는 것일까? 아무 이유도 없는데, 계약을 맺자고 하는 것일까? 뭔가 아쉬움이 없다면 힘과 무력을 행사하고 발뺌해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다. 갑질을 해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과 함께 하시는, 그 사람을 겪어본 사람은, 그를 대하는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아비멜렉이,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도다.” 바로 이 고백이 그것 아니겠는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아브라함을 겪어보았다는 것이다.

 

어려움을 가하거나 훼방을 놓거나 괴롭혀보아도, 결국에는 통할 수 없었다. 때로는 이런 일도 있었다. 가만 내버려둬도 상관없을 것 같을 때, 망하길 바라면서 어찌되나 보자는 심정으로 관망한다. 안될 일이 뻔할 때, 손대지 않고 코를 풀겠다는 심정으로 내버려 둔다. 그리고 나중에 비웃음과 조롱을 선사하면 된다. 이런 일, 저런 일로, 아브라함을 겪었다.

 

여러분 기억하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그 사람은 저주받을 수 없다. 그를 함부로 했다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꼴이 되고 만다. 아브라함이 하는 일마다 예상과 달랐다. 아비멜렉의 생각과는 달랐다. 그에게 이유모를 두려움이 찾아왔다. 정말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는 것이라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 말이다.

 

‘그 때’란 언제를 말하는 것인가? 아브라함과 사라의 독자, 이삭이 젖을 떼는 날 큰 잔치가 있었다. 이 사실이 놀랍다. 출산할 수 없는 여자가 출산을 하고, 그 아이가 젖을 떼게 되었다. 사라의 환호를 들어보라. “사라가 자식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 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그런 기대 자체가 비웃음 거리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더니, 아들을 낳았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고 이루어졌다. 복음은 듣는 대로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되고 믿는 것들의 증거가 된다.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는 아비멜렉의 고백은 ‘하나님 수호신’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인간적으로 이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와 함께 하는 하나님은 결코 이길 수 없다는 의미로 새롭게 다가온다. 우리가 괴롭힘을 당하고 고난을 당해도, 세상에서의 훼방자가 우리 하나님까지 이길 수는 없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붙들고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다.

 

 

  1. 오래 참으라.

여기에서 아브라함 신앙의 어떤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가? 그는 참고 인내했다. 믿음에는 참음과 인내와 연단이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소망을 이루는 것이다. 때로는 성급하게 자기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을 앞서갈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기도 전에 자기 생각대로 불신앙의 길을 걸을 때도 있다. 속상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어떻게 참는가? 조롱과 비웃음이 있을 때, 그 모멸감을 어떻게 참는가? 어떤 사람들은 ‘쉽게 참으라고 말하지 말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약속을 믿고, 참고 인내하길 바라신다.

조롱과 괴롭힘과 훼방과 방해가 있다고 해도 말이다. 아시는가? 그 인내의 결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사실도 말이다. 한 두 번은 참을 수 있다. 그런데 계속되는 핍박은 참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니 더 이상 참으라, 인내하라고 하지 말라.’고 말할 수도 있다.

아브라함도, 한두 번 피해를 본 것이 아니다. 29-30절에 보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아서 이 우물을 판 증거를 삼자고 한다. 브엘세바의 뜻은 ‘맹세의 우물’이라는 뜻도 있지만 ‘일곱 우물’이라는 뜻도 있다. 그러니까 그는 일곱 번씩이나, 성경에서 일곱은 완전수다, 일곱 번씩이나 우물을 빼앗기고 피해를 봤다. 그래도 그는 때를 기다리고 참았다. 그때가 되면 지금의 아브라함처럼 얼마든지 따져 물을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라.”(마5:5-6)라고 말씀하셨다. 십자가 고통을 당하셨던 주님이 부활하셨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일으켜 세우셨다. 안되는 것 같아도 잘되고, 동서남북 보는 곳마다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보는 것들이 이루어진다. 온유함으로 겸손함으로 참고 기다리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기업을 채우심을 허락하신다.

 

그러고 보니까, 아비멜렉은 이런 경험을 한 적도 있다. 예전에 있던 일화다. 사라를 아브라함의 누이인줄 알고 취하려고 했다. 힘으로 얼마든지 강제로 빼앗기고 목숨도 잃을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낸 부조리 때문이었다. 그런데 꿈에 하나님께서 현몽하셨다. 일에 대한 판단은 어쨌든, 하나님께서 막으셨고, 이런 음성을 들려주셨다(창20:7).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성경은 그 전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했던 것처럼 그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아비멜렉을 위해서 기도하고 싶겠는가? 그를 위해서 그의 가정과 범사가 잘 되기를 바라고 싶었겠는가? 그런데 그런 것까지 인내하고 참고 견디는 믿음과 아량으로 기도했다. 그랬더니, 이런 역사가 일어났다.

브엘세바는 맹세의 우물이요, ‘일곱 우물이다. 달리 말하면 고난의 자리였고, 수없이 반복된 눈물의 자리였으며 인내와 연단의 자리였던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승리하시고 현존을 드러내신 영광의 장소다. 여러분 복을 받는 자,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고, 역사하심을 체험하는 자는 믿음으로 인내하고 참는다. 견디고 이겨낸다. 야곱도 그랬고, 요셉도 그랬다. 아브라함과 모세를 비롯해 믿음의 선진들이 공통적으로 그랬다.

 

히브리서11: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의 선조들에 대한 증거를 말한 뒤에 12:1-2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것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4)

 

영원한 소망을 위하고 믿음의 승리와 영광을 위해 참고 견디며 해야 할 일이 있다. 우리를 이 교회로 믿음의 공동체로 불러주신 이유와 사명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33절에 주목한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울며 씨를 뿌리는 자, 믿음으로 심고, 가꾸는 자, 에셀나무가 장차 어떤 미래를 선물할지 소망을 품어보라. 그 우리가 더욱 참고 견디고 인내하는 비결은 에셀 나무를 심는, 헌신과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우리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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