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 4. / 성탄절 후 2주, 신년주일)

 

새해 첫, 신년주일에 주 앞에 나온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축원한다. 덕담부터 전하고 싶다. 올해 하는 일 마다, 잘되기를 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시라.

 

새해 벽두에 도종환 시인이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작품이 생각났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이 세상 그 어떤 꽃들도 /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

 

‘흔들린다’는 말은 갈등한다는 말일테다. ‘젖는다’는 말은 인생의 비바람을 만난다는 말일 것이다. 2015년에는 왜 이런 일들이 없겠는가? 그러나 그 중심은 뿌리를 내려야 하듯,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살아가는 한 해가 되길 빈다. 주님 안에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형통케 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란다.

잎눈이 터지고, 꽃눈이 터지는 모습을 생각해보라. 진통이 있지만, 그 사이로 줄기가 생기고, 꽃이 피는 것이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은 꽃피며, 위기는 기회가 되고, 인내와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 특별히 당부 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첫째는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을 잊지 말라. 둘째는 권능을 체험하는 신앙을 가지라는 것이다. 셋째는 신앙이 더욱 돈독해지며 성숙해 가길 원한다.

 

그 비결이 있을까? 있다. 체험신앙의 비결이 있다. (이게 이렇게 선명히 보이기까지 왜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 언제?

 

바로 예수님을 전하고 증거할 때이다. 그 때는 필히 그 능력이 나타나다. 열매도 딸 줄 아는 사람이 먹을 수 있다. 예수님을 전하고 복음을 증거하면, 이상하고 신기하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가 복을 비는 것 같고, 축복하는 것 같은데, 이때는 하나님이 대신 책임져주시더라.

주님의 능력은 선교하고 전도하는 것을 통해 나타났다. 예수님은 지역을 두루 다니시면서 역사를 일으키셨다. 제자들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면서 주님의 권능을 체험했다.

 

오늘은 그 대표적인 한 장면이다.

누가복음 10장 1-16은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교여행, 전도여행을 보내셨다. 그 발이 닿는 곳이, 선교지며, 전도지였다. 오늘 읽은 말씀은 그 체험을 보고하고 나누는 장면이다.

 

제자들의 흥분과 감격의 모습이 보이는가?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가만히 있었다면 몰랐을텐데, 주님의 명을 붙들고, 온 고을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거기서 역사가 타나났다. 자기들은 아무 능력도 없는 줄 알았는데, 믿음으로 나아가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할 줄 알게 되었다. 우리에게도 이 은혜와 체험이 있기를 바라신다.

귀신이 항복하고 사탄이 번개 같이 떨어졌다. 주님은, 부활하신 주님의 몸된 교회의 각 지체들에게서, 바로 우리에게서 이 권능과 체험이 있기를 원하신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지 상상해보라. 조금 뒤에 자세히 다뤄보겠지만, 정말 의미 있는 일들을 제자들이 많이 해냈다. 한 동네가 정화되고 마을이 깨끗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임하는 역사가 이루어졌다. 가정은 회복되고, 병자들은 치유되며, 주님의 능력과 역사들을 경험했다. 나를 통해서, 우리를 통해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면 얼마나 보람인가?

 

그 전에, 우리가 과연 이런 일들을 할 수 있고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아니 사모하는 마음으로 사명을 붙들 수 있을까? 동기가 부여되고 동력이 생길까? 여러분, 그렇게 되셔야 한다.

 

신학대학교 졸업할 때,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부르며 가슴 뜨거워졌었다. 어떤 친구는 졸업식 때 부르는 이 찬송이 가장 두려웠다고 하더라.

사명을 받지 못하면 피하고 싶고 꺼려지는 부빈이다. 두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러분,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키를 조금만 돌려도 배가 선회하는 것처럼, 조금만 삶의 방식을 바꾸면 된다. 우리가 가야할 곳은 딴 세계가 아니다. 바로 우리의 삶의 자리이다.

 

주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염려도 걱정도 가지고 계셨다. 3절에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세상에서 가장 천사 같은 존재가 사람이기도 하지만, 가장 악마 같은 존재가 또한 사람이기도 하다. 찢기고 상함을 받고, 위협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한다.

우리의 인생사가 이렇다. 한 손에는 권력이라는 칼과 다른 한 손에는 회유라고 하는 미끼를 들고 ‘슈퍼 갑질’을 한다. 그 세상에서 굴복당하거나, 먹히고 만다. 또 굴복하면 적어도 잡아먹히지는 않을 줄 알았는데, ‘배신’을 당하고 만다. 결국은 잡아먹히는 것과 같다.

 

주님도 알고 계셨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런데, 그 어린 양 같던 이들이 지금 돌아와서, 뭐라고 고백하고 있는가?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주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라고 말씀하신다.

 

이미 주님을 증거하고 사명을 감당하는 자에게, 주님은 합당한 능력을 주신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축복할 때, 하나님이 대신 책임져주신다.

제자들은 이것을 경험한 것이다.

 

누가복음9:57-62은 주저하고 망설이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실 때,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또 ‘내가 주를 따르겠다.’하는 사람이 있는데, 조건이 있다. ‘나로 먼저 내 가족과 작별하게 하소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아마도 자기의 삶을 내팽개치고 주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유와 변명이 있어 주님의 일을 먼저 자기 일로 삼지 못하는 삶의 방식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주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일을 하긴 해야 하고, 기뻐하시는 일에 순종해야 하는데, 담대한 믿음이 없어 그러지 못한다.

자기 일이나 가족을 먼저 돌보고, 자투리로 하겠다고 마음을 먹어서는 기필코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다.

베드로는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나이까?” 주님께 묻는다.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나이까?’ 이것도 제자들의 파송기에서 일어난 일과 함께 잠시 후에 생각해보겠다.

 

그 전에 주님께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란 무엇일까?

 

송구영신예배때, 톨스토이의 작품이야기를 해드렸다. ‘사람은 무엇을 사는가?’라는 작품에서 한 부자가 시몬의 집에 아주 좋은 가죽을 들고 찾아와서 가죽장화를 만들어달라고 했다. 그 집에서 일하게 된 미가엘은 그 가죽으로 죽을 때 신는 실내화를 만들었다. 시몬이 망쳤다고 낙심했는데, 그 부자의 하인으로부터 연락이 오기를, 주인이 갑자가 죽어서 실내화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내용은 말한다. ‘사람은 자기에게 정말 무엇이 필요한지 아는 것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말이다. 사람이 자기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신다.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천부께서 아신다.’(마6:32)

나에게 ‘이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엉뚱하게 ‘저것’을 주실 때가 있다. 그런데 정말 나중에 보면 하나님이 옳았음을 깨달을 때가 있다.

 

베드로가 묻는다.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나이까?’ 과연 주님은 무엇을 주실까? 묵상하다가 영원하신 하나님,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을 발견했다.

 

주님께서 70인을 파송하시면서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말씀하시고, 행동규칙을 말씀해주셨다.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아마도 주님의 일에 일용할 것들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일 것이다. 어느 집에 들어가면 평안을 빌고, 그 집에 유숙하며… 등등

 

그런데, 사도행전의 모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도와 복음이 증거되는 원리도 이 속에 있고, 나타난 역사와 능력도 여기에 있다.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이 있자, 제자들이 다 흩어졌다. 온 유대로, 사마리아로, 땅 끝으로. 바울은 땅 끝을 향해 가고자 했던 사도였다.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는 말씀처럼 처음에는 누구나 위태롭게 생각됐다.

주님은 사탄이 번개와 같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제자들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셨다고 말씀하신다. 복음을 증거하면서, 주님의 일을 하면서, 어려움과 시련은 있겠지만, 그러나 ‘너희를 해칠자가 결코 없으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증거하는 것이 이것이다. 정말 가는 곳마다 복음이 증거되고 역사가 나타났다. 예수님 때, 70인의 제자들을 통해 나타났던 역사가, 초대교회시대 사도들의 흩어짐(그것은 영적인 파송이다.)을 통해서 나타났다. 저는 동일하게 오늘 우리에게도 이 역사는 나타나리라 믿는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며, 복의 원리로 내일을 맞게 하시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의 역사를 보면,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이고, 오늘 우리에게도 일어날 믿음들에 대해서 알 수 있다.

그 중에 한 가지 주목해 보고 싶은 것이, 욥바라는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다.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있었는데, ‘암사슴’이라는 뜻이다. 번역한 이름을 ‘도르가’다. 이름답게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모른다.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고 증거한다. 그런데 그가 급작스레 중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그 때 마침, 베드로가 근처 ‘룻다’라고 하는 지역에 와 있었다. 두 사람을 보내서, 빨리 와주기를 간청한다. 어떤 마음으로 불렀을까? ‘이 사람은 꼭 살아야 한다.’, ‘이렇게 허망하게 죽으면 안된다.’ 죽었는데, 와 달라고 간청한다. 적어도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 그 마음 알겠는가?

세상적으로 보면, 그는 사실 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복음으로 보면 그는 사람스럽고 너무나 귀한 존재이다.

누군가가 자기를 위해 ‘이 사람만큼은 꼭 살아야 한다.’고 간곡한 마음으로 애원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우리 공동체가 이런 공동체 되길 원한다. 이 사람만큼은 꼭 주님께서 도와주셔야 한다고 서로 중보할 수 있는 교회. 여러분 다비다가 살아났다. 베드로의 마술적인 신비의 능력이 아니다. 주님의 권능과 능력이다. ‘예수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항복하더이다.’ 했던 예수 이름의 능력이었다.

 

너무나 아름답지 않은가? 이사람은 살려야 한다고, 도와줘야 한다고 안타까워하며 기도해주는 사랑이 있고, 염려해주는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다. 그 때문에 죽은 생명이 살아나고,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는 그 마음이 고마운 것이다. 그 사랑은 생명을 영원하게 만들어주고 값지게 만들어준다. 이러한 역사보다 더 좋은 선물과 능력이 어디있는가?

예수의 이름으로 가정이 생명을 얻고 화목해지고, 그 이름을 믿고 회복과 치유가 일어나며, 사도행전이 곳곳에서 전하는 바처럼, 말씀이 흥왕해져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 이것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땅에서 선물로 누리는 삶을 살길 원하신다.

 

여러분 눅9:62에 “주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말씀하고 계시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가? 삶과 사역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오해다. 주님께서 선교와 전도와 어떤 사명을 맡기실 때, 그것이 삶과 결별하거나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삶의 터전, 깊숙이 들어가서, 복음의 쟁기를 붙잡는 일이라고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거나 자꾸 과거에 얽매여서 살것이 아니라, 희망과 소망으로 복음을 일구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여행, 선교여행을 보내셨다. 우리에게는 전도적 삶과 선교적 삶을 살기를 바라신다. 그것은 무엇인가? 예수의 이름을 믿고 사는 것이다.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무엇을 주셨는가?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주님을 증거하면 하나님이 대신 책임져 주신다고 했는데, 바로 이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그 이름을 믿고 복음을 듣는 자에게 그 복음대로 나쁜 것들이 굴복하고 꺾이는 역사가 나타나겠지만, 영적인 비결은 그 은혜가 자기에게로도 돌아온다는 것이다. 또 이렇게까지 생각할 것은 없겠지만, 복음이 외면당한다면, 그 외면당한 복음까지 내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여러분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할 때,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자, 그 옷을 털면서 누가복음 10장 10-11절 말씀처럼, 그 옷을 털면서 나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고 자리를 옮긴다.

 

그때 주님께서 바울에게 밤에 환상 중에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행18:9-10)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셨고, 지키고 계셨으며, 도우시고 예비하셨다.

 

여러분 영혼을 귀히 여기고 살아하고 아끼고 복음을 전하고 위로하고, 이런 복음의 쟁기질로들로 우리 삶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가슴 뛰지 않는가? 우리의 중보와 기도와 믿음으로 전하는 복음을 통해서, 암환자가 치유된다. 우울증 환자가 기쁨을 얻는다. 실패한 사람이 일어선다. 죄악 가운데 있던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온다. 불화한 곳에 화평이 찾아온다. 이런 일들이 우리 교회를 통해서 있게 되기를 바란다.

 

꼭 가야 하는가?

2절 말씀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기억하라. 분명히 그 와중에 주님은 필요할 사람, 도울 사람을 붙여주신다.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사람을 붙여주시고, 사람을 통해 도우신다. 또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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