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2. 28. / 성탄절 1주 및 송년주일)
———————————————–
송년주일, 주님 앞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를 환영합니다. 좋으신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1. ‘시간이 참 빠르지요?’
시간이 참 빠르지요? 벌써 우리는 한해의 마지막 예배로 드리는 송년주일, 주님 앞에 서있습니다. ‘시간이 참 빠르다’는 새삼스러운 말을 건네기가 송구한 생각까지 듭니다.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앞에, 굳이 이런 말로 우리 인생사가 ‘허망하다는 것’을 상기시켜드리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또 개인적으로 열심을 낸다고 냈지만, 알차게 시간을 선용하지 못하고 뚜렷하고 뭔가를 이루지 못한 아쉬움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해봤습니다. 2014년은 우리가 많은 가능성과 기대를 확인한 해였습니다. 사랑의 터가 굳어지고, 모두가 열심을 내서 부활하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겼습니다. 교회가 조금씩 성장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결혼을 하기로 약속한 연인이 프러포즈를 할 때, 이렇게 말해야 정답이라죠? ‘너의 아픔, 상처와 고통, 연약함까지도 내 것이야!’ 이렇게 말입니다. 좋은 것, 아름다운 것, 장점이나 강점만을 보고 하는 사랑은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분명 실망을 안겨줄 수밖에 없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부족한 것이 있고, 부정적인 면이 비춰진다고 해도 그것까지 사랑하고 끌어안을 때, 영원해지는 것입니다.
잠언 16:31은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빠른 세월을 모질게 이겨온 인생을 말하는 것일 겁니다. 아픔도 있었고 기쁨도 있었고,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고, 실패도 있었고 승리도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일부였습니다. 그러기에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결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영화로운 면류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해 동안,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여러모로 아픔도 상처도, 즐겁고 유익한 일도,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들은 ‘사랑의 터’ 위에 우리를 세우는 일이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시간이 참 빠르다는 것’은, 인생의 강을 만날 때, 마른 땅 같이 건너고, 끝날 것 같지 않던 시간이 어느새 지나가고, 더 새로운 희망을 갖는 시간의 연속성이라고 여겨도 좋을 것 같은 말입니다.
고통의 터널을 지나고 있습니까? 어둡습니까?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까? 어느새 어슴푸레한 새벽녘이 밝아오고 새날을 여는 태양이 떠오름을 보게 될 줄로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멈춰있다고 생각될 때, 끝이 없다고 생각될 때, 이미 목적하는 곳, 코앞까지 다 다다른 것이나 마찬가지 일겁니다. 시간은 참 빠르게 지나 갈 것입니다. 희망이 더딘 것 같아도, 어느새 하나님은 ‘정녕’ 이루십니다.
2. 미완의 과제에 선 이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위로와 구원의 선포입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청종하고 있는 이들이 누구일까요?
주전 538년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희망의 원년과도 같은 해입니다. 바벨론이 무너졌습니다. 586년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완전히 패망했고, 성벽은 무너졌습니다. 성전이 불타고, 많은 사람들은, 죽거나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왔습니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바벨론 제국은 페르시아의 고레스에 의해서 또다시 세계질서의 패권을 넘겨줘야 했습니다. 538년 페르시아가 제국을 제패하고 통치하기 시작한 해입니다. 그래서 ‘고레스 왕의 원년’이라고 말합니다. 이 때, 고레스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있던 유다인들이 고국땅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예루살렘이 정복될 때, 빼앗겼던 성전제구들까지 모두 돌려보낸다는 칙령이 반포됐습니다.
몇 차례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시온의 포로들, 그들이 돌아올 때, ‘꿈꾸는 것’ 같았다고 환호합니다. 그날의 흥분과 감격을 단 한마디로 요약하는 것이죠. 칙령이 반포된 그 다음 해였던 537년, 첫 번째 포로귀환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부푼 꿈으로 시작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부흥을 위해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바벨론의 포로’라는 역사적 경험이 주었던 교훈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무엇입니까?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보다 우상을 섬겼고 하나님 앞에 범죄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미쉬팟), 정의(체다카), 사랑(헤세드)을 외면했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당한 것이라고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에서의 경험은 그들의 세계관에 중대한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세계 만민 중에 자기들 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바벨론은 더 넓은 세계였습니다. 더 선진화되고 문명화된 세계였습니다. 티그리스 강, 유프라테스 강은 가나안 지역에서 보았던 요단강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장대했습니다.
바벨론이 믿고 있는 신이 있었는데, 마르둑이었습니다. 티아마트라는 신은 모든 만물의 어머니인데, 그 손자는 마르둑이었습니다. 마르둑은 티아맛을 검으로 죽이고, 그 시체를 반으로 나누어 하나는 하늘을, 다른 하나로는 땅을 만들었습니다. 티아맛의 눈을 빼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원천이 되게 했고, 그 꼬리로는 은하수를 만들었습니다. 바벨론은 그 신화를 믿고 있었습니다. 살육과 전쟁에서 이긴 자 만이 살아남고, 힘의 경쟁에서 강자만이 살아남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는 세계관이었습니다. 강자가 곧 진리이고, 정의이며 법입니다. 꼭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질서와 모습을 말해주는 것만 같지 않습니까?
바벨론의 포로에서 유대인들이 깨달은 신앙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은 유일신이라는 것입니다. 세계의 신들이 무수히 많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사람이 만든 이야기와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태양이, 바다가, 바람이 어떻게 신일 수 있습니까? 그 형상은 사람이 깎아 만든 것, 손으로 만든 것은 모두 우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둘째, 하나님은 창조주라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신으로 섬기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시야는 넓어졌지만, 더 하나님께 집중됐습니다. 만군의 하나님만이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이며 역사의 주관자 되십니다. 그 믿음의 눈이 열렸습니다. 믿음대로 됐을까요?
전쟁에 가장 능한 신이라고 자랑하던 마르둑, 그 마르둑을 섬기던 바벨론도 페르시아에 의해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페르시아를 들어서 사용하심으로 바벨론을 꺾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역사의 주관자이셨습니다.
더 넓은 세계와 문명과 문화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대한 시선이 흐려지기는커녕 더욱 또렷해졌습니다. 이것이 고난이 가져다주는 정화하는 신앙의 힘입니다. 우리 역시 고난이 심할수록, 어려움이 클수록, 고통이 가중될수록 신앙적으로 바로서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선명히 바라봐야 하고, 하나님을 향한 집중도가 또렷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주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믿음을 굳세게 하고 승리하기를 바라십니다.
포로귀환자들은 역사의 주관자이요,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우선적으로 벌인 공동사업이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것은 새로운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었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와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믿으며, 함께 힘을 합치면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의 기초를 세우는데까지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더 이상 진척을 보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경제적인 궁핍이 찾아왔습니다. 폐허지와 황폐한 곳이 점점 더 늘어갔습니다. 일은 시작했지만, 중간조차도 공정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설상가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난과 어려움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찾아옵니다. 게다가 사마리아인들의 방해가 있었습니다. 시기질투심에 휩싸인 사마리아의 몇몇 지도자라는 이들이 페르시아왕에게 편지를 써서 포로에서 귀환한 유다인들이, 성곽을 짓고 있다고 거짓 보고를 올렸습니다. 돈으로 관리들을 매수하고 뇌물을 써서 진실이 바뀌도록 왜곡했던 것입니다. 실상은 성전을 짓고 있으나, 성곽을 짓고 있다고 이간질을 하고, 그 성곽이 다 완성된 뒤에는 페르시아에 패역한 일을 저지를 위험한 일들을 꾀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업은 아예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정치적인 불안정이 지속됐습니다. 돌파구가 없습니다.
이런 느낌 아시죠? 내일이 와도, 새해가 밝아도 돌파구는 없다고 느낄 때 말입니다. 희망과 위로의 말조차 냉소하게 됩니다.
3. 위로와 구원의 소식
그런데 주님은 이들에게 이 복된 소식, 구원과 위로의 소식을 전하고 계십니다. 오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이들은 바로 이런 처지와 형편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시작은 했으나 미완의 상태로 진척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이들, 아예 오랫동안 방치하고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가진 이들입니다. 오히려 시작하거나 일을 벌이지 않음만 못한 처지에 있게 됐습니다. 부채가 생겼고, 가난해졌고, 기쁨으로 시작했던 일이 실망과 포기로 추락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적인 방해와 벽에 부딪친 이들입니다. 진퇴양난에 휩싸인 이들, 내일이나 새해가 오기는커녕 차라리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하는 이들, 그 괴로운 심정을 가진 이들이었습니다.
송년주일에, 우리가 한 해를 마감하면서, 우리는 어떤지요? 한 해를 보내면서, 미완의 과제가 있습니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낙망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까? 언제 이 문제가 해결될지, 그날이 속히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이것이 끝이 아니라, 2015년에는 주님께서 새날을 여시면서 들려주시는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위로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까?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가난 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참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누구도 내일을 자랑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주전 522년에는 페르샤에 큰 일이 있었습니다. 왕 캄비세스가 후계자도 없이 죽고 만 것입니다. 세계질서와 형편이 미궁으로 빠지는 것은 아닌지 불안감이 전세계를 휩쓸었습니다. 유다의 입장에서 성전건축 사업에 대한 것이 아무 결론 없이, 그냥 묻히는 일처럼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됐습니다. 거기에 들어간 막대한 예산이, 중도에 포기하면 그냥 사라지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손해와 그로 인한 정신적 고충은 막대할 것입니다. 재건과 복구는 물건너가는 일처럼 돼버리고 말 겁니다.
그때 다리우스가 왕으로 등극합니다. 우연히 이 일을 살피다가, 바벨론의 보물전각을 은밀히 조사하도록 지시를 내렸는데, 기거서 고레스 칙령이 발견됩니다. 이 일은 사마리아인들의 상소와는 달리, 유대인들이 멋대로 계획하고 진행하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왕이었던 고레스왕이 성전을 지어 하나님을 섬기도록 지시한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이방의 왕이었던 고레스가 왜 이런 칙령을 내렸을까요? 다리우스는 분명하게 깨닫는 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상과는 달리 참 하나님이시고 참으로 살아계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짓고 “하늘의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을 드려 왕과 왕자들의 생명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대목에서 저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이들을 통해 ‘이방의 빛’으로 삼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드러나는 것을 봅니다.
게다가 새롭게 알려진 사실이 있는데, 이 모든 경비는 페르시아 왕실에서 보조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리우스는 이렇게 지시합니다. 강 건너편에서 거둬들인 세금을 왕실로 가져오는 대신에 그들에게 주어 성전건축을 끊임없이 진행되어 완성되도록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명령을 누구든지 변조하고 방해를 하면, 그 집에서 들보를 때고 그를 높은 곳에 매어달게 하고 그 집은 거름더미가 되게 하라. 다리오가 조서를 내리노니 신속히 행할지어다.”
여러분, 사마리아인들의 방해와 극심한 재정난이 이런 결과를 가져올지 상상이나 했을까요?
주님께서 바울을 통해 우리가 믿음으로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주님 안에 품은 계획과 뜻은 방해가 있는 것 같고, 어려움이 있는 것 같아서, 멈추는 것 같고, 중단되는 것 같지만, 우리는 낙심치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초기 때, 회당에서 이말씀을 읽으시고, 이것을 근거로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가지 예를 든 것이지만 4절 이하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과 기대와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벌써 12월의 마지막 예배라는 게 믿겨지질 않습니다. 시간이 참 빠르지요? 작년 2014년을 시작하면서 걱정이 많았는데, 결과는 풍성했습니다. 저는 내년 2015년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미완의 역사와 문제를 갖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십니다. 하나님께서 위로하시고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이 우리에게 선포되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보복의 날”은 여기서, 원수를 원수로 갚거나 재앙이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하나님께서 “원수들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심이니이다.”라는 고백과 통하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14년을 마치고 15년을 맞이하면서, 바벨론의 세속적이고 세상적인 가치관이나 삶의 모습을 떠나 예루살렘에서 일었던 하나님을 신뢰하고 주만 바라고 주뜻대로 행하는 신앙운동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3절 말씀은 2015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에 뿌린 것이 움돋게 함 같이’
여러분 인생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계심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동산 같은 분이시며 대지와도 같은 분이십니다.
이미 저와 여러분 가운데 ‘움돋게 하시는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