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2. 7. / 강림절 2주)
말씀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 강림절 둘째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삼라만상이 겨울 추위로 오그라드는 때에, 따뜻한 주님의 품에 안기고 싶어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사랑의 온기로 차디찬 저희의 마음을 녹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포로된 유다와 죄인된 우리
주전 597년 587년, 그리고 582년 3차례에 걸쳐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다. 이사야는 남유다가 망하기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고 망대를 세워, 술틀을 파놓고, (하나님께서) 자! 이제 좋은 포도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썩은 포도)를 맺었다는 게 이유였다(사5:2). 포도원은 이스라엘이고, 나무는 유다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한 일이 일어났고,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 있었다고’ 죄를 말한다(사5:7). 통치자들과 세상권력을 가진 이들의 횡포 때문에 백성들이 얼마나 고통을 당했을지 모른다. 당장은 괜찮을지 모른다. 하지만 불의와 포악으로, 가장 큰 문제는 사회통합에 금이 가고 사회는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이사야는 이런 측면을 통찰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고관들이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것들을 자기 집에 쌓아놓고, 하나님의 백성을 짓밟으며 그 얼굴에 맷돌질을 했다고 말씀하신다. 이사야는 고위층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일을 고발하고 있는데, 들어보라.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있을진저, 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공의를 빼앗는도다.” 오늘 우리 사회의 어떤 술자리에서 벌어지는 일과 달랐을까? 조폭 같이 폭탄주를 말아 마시고, 권력의 순서대로 비인격적인 막말을 내뱉으며,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음란과 추행과 불의한 일이 벌어진다. 그러다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을 덮기 위해, 뇌물과 불의한 권력을 사용했다.
그런데, 고관들이나 장로들만 심문하시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도 함께 심판 당한다. ‘하나님 왜 고관들이나 권세자들의 잘못 때문에 힘없고 나약한 이들까지 고통과 피해를 당해야 합니까?’ 물론 그렇지만, 백성들은 거기에 눈감고 동조하면서 자기 먼저 살겠다고 서로 학대하고, 이웃을 잔해하며, 똑 같았다는 것이다.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고 생명을 구원하지 않으면 똑같이 책임을 묻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그의 피 값을 에스겔의 손에서 찾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백성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원치않는 불의한 세상을 만든 데에는 백성들의 몫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했고, 유다는 바벨론에 멸망당했다. 그리고 굴비구름 엮이듯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다.
저는 여기서 영적인 상징을 깨닫는다. 세상적인 이치에서 보자면 죄와 타락은 파국을 맞게 한다. 그런데 영적인 이치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과의 틈이 벌어지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용인한 결과는 멸망과 심판이라는 것이다.
개인 신앙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나님과의 간격은 아직 크게 벌어지지 않아서, 언제든 제발로 건널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괜찮다고, 아직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게 무서운 것이다.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그 간격은 매우 벌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대륙과 대륙사이를 건너야 하듯, 대양만큼이나 간격이 크게 벌어져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런 문제 때문에 심히 고민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지만, 육신 속에 또 다른 법, 사망의 법이 있어,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 사망의 법이 나를 사로잡는도다.’ 탄식했다.
죄의 법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한다. 그것은 사회도 마찬가지이고,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이 악순환을 이해하길 바란다. 사회의 타락은 개인을 더욱 타락하게 하고, 개인의 타락은 또한 사회를 더욱 병들게 한다. 결국은 심한 상처와 고통뿐이라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하지만 선순환도 있다. 개인의 회심이 사회를 싸매고 고치고 회복시킨다. 사회의 회복은 또한 개인을 회복시킨다. 감리교의 창시였던 요한 웨슬리가 그랬다. 그 회심으로 영국사회와 그 복음의 물결이 세계 각지와 아메리카 대륙을 넘어, 오늘 우리에게까지 당도한 것 아니겠는가?
▪희망의 선순환
오늘 말씀을 전하는 이사야는 바로 그 선순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1-2)
바벨론이 세계정복의 위세를 떨치고 있을 때였다. 이사야는 에스겔이 그랬던 것처럼 돌연 희망을 말한다. 포로에서 놓임되며, “내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42:7) 꿈에 그리던 고국땅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위로했다.
공연한 위로였을까? 정말 이 일이 이루어질까? 하나님의 선한 약속과 계획이 나에게 허락되고 이루어질까? 아무런 징조를 발견할 수 없는데, 단순히 희망을 꿀물처럼 주었다가 그 꿀물을 마시고 토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면 불안하다. 두렵다.
저는 어렵고 힘든 형편에서 희망과 꿈을 갖지만, 한편에서는 염려와 불안을 가지고 있는 여러분의 사정을 알고 있다. 어떤 분은 훅 바람을 불면, 그동안 간신히 지탱하고 견뎌왔던 것이 와르르 무너질 분도 있다. 아슬아슬한 희망 속에 간신히 외줄을 타고 계신 분도 있다.
그러기에 “내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라고 말씀하신 이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먼저 있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은 우리 믿음의 눈이 열리기를 바라신다. 바벨론의 위세는 포로된 이들에게 절망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믿음의 눈을 가진 자에게는 하나님의 역사로 나타는 소망이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은 우리와 비슷한 처지와 형편에 있는 그 백성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을까? 갇힌바 되고 포로된 이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들어보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41:10)
오늘 말씀 9-11에서도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팔로 다스릴 것이라.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인도하시리로다.” 말씀하셨다. 이 희망의 메시지는 40장 이하에 곳곳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비록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그 자리가 망한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리여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세상적인 눈은 망한 자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믿음의 눈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은혜의 자리라고 생각한다.
▪창조주의 역사와 섭리
그러나 여전히 의심을 계속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고통을 겪고, 그 처지와 형편이 시든 꽃과 마른 풀처럼 돼버렸기 때문이다.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런데 여러분, 이사야가 이렇게 담대히 외칠 수 있었던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하실 하나님,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이 같이 말씀하시되.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사42:6)
‘이방의 빛이 되게 하시리라’는 섭리를 생각해보라. 그 처지와 형편이 마른 풀과 시든 꽃과 같지만, 그렇다고 불에 살라 없애버리시는가, 그렇지 않고, 하나님은 ‘이방의 빛’으로 다시 피어나는 새창조의 소망을 부어주고 계시다. ‘하나님께서 망하게 하시고 고통을 주시고 이렇게 인도하셨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무지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이방의 빛’으로 삼기 위해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으시고 새로운 비전과 사명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기대와 섭리가 있는 것이다.
기억하라. 창조주이시기에 8절 말씀처럼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는 것이다.”
오늘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무엇이 달라야 하는가? 세상의 희망과 회복되기를 바라는 기대가 아니다. 세상은 스스로 선해지거나 의로워질 수 없다. 그것은 순진한 낭만적 기대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희망으로 삼으신다. 그리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바라신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우리가 어려운 고통에 빠지고 고난을 만나나,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멸망이나 패배가 아니라, 그 상황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길 바라신다.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통해 우리의 실패, 질병, 고통, 슬픔, 눈물 속에서도 영광의 꽃으로 피어내기를 바라신다.
다시 한 번, 8절 말씀처럼,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줄로 믿으라.
여러분, 3절에서 8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약속과 사명을 주시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라.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이것은 사명이다. 약속은 무엇인가? 4절에 언덕과 산지가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5절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보리라고 약속하신다. 6절에서는 외치라. 이것은 사명이다. 무엇을 외치리이까 묻자, 모든 육체는 폴이요, 그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은 실로 그와 같다고 말씀하신다.
여러분, 창조주 하나님의 대반전의 역사와 능력을 보는가?
광야. 그곳은 포로로 잡혀갔던 길이다. 포로로 잡혀가던 사막에서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당했다. 그런데 그 길에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고 대로를 평탄케 하라고 하신다. 왜인가? 포로로 잡혀갔던 그길로 구원을 얻어 돌아오게 되며, 죽음의 사막이었던 길로 생명의 희망을 안고 돌아올 하나님의 섭리가 굉장하지 않은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위기가 기회가 된다. 우리가 고통당한 것 때문에, 그 트라우마와 상처에 머물지 않고, 상처받은 치유자의 새로운 소명과 기쁨이 임하게 되는 것이다. 절망의 길이 희망의 길이 되며, 암울하고 불행했던 길이 기쁨과 소망이 충만한 길이 되며, 고통의 길이 하나님의 영광의 길이 되며, 십자가의 길이 부활의 길이 되는 역사가 있는 것이다. 시온의 포로들이 되돌아 올 때, 꿈꾸는 것 같이 기쁨으로 돌아오는 순간이 온다.
▪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여
그렇다면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예비하고’, ‘평탄케 하고’, ‘외치라’고 하는 사명 말이다.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하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2)
바울은 로마에 투옥되었다. 그 옥중에서 쓴 편지가 골로새서이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당한 박해와 고통과 투옥의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대신 바울에게 들려온 소식은 이것이었다. “예수 안에서 믿음이 더욱 견고해지고, 성도에 대한 사랑이 더욱 쌓여갔다는 것”이다(골1:4). 아시는가? 성도의 사랑과 교제가 깊어지는 모습은 위기 속에 있는 교회와 성도의 삶 속에 ‘또 하나의 열매’였다. 바울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골1:5)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늘에 쌓아둔 소망’ 그것이 무엇인가? 골로새 교회를 위해 얼마나 많이 기도했으며, 소망했을까? 바울은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할 것’(롬5:5)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는 것이다. 소망에 대한 의심을 버리라.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8:24) 여러분 오히려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라.”(롬12:12) 다 성경에 있는 말씀이고, 증언하는 말씀이다.
그는 자신의 기도가 열매로 나타나는 것을, 감옥에 갇힌 처지와 형편에서 깨달았다. 그러기에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 맺어 자라는 도다.”(골1:6)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로를 평탄케 하고 예비하라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굳게 하고, 기도로 소망을 하늘에 쌓아, 결국 열매맺는 삶 말이다.
여러분 험난한 산 길을 헤매고 있는가? 굽은 길이 언제 끝날지 몰라 힘들어 하는가? 어떤 일이 인생에서 잘되기를 바라며 애간장을 태우는가? 주님 안에 소망을 두라. 그러기 위해 기도하라.
세상적인 모든 것은 풀과 꽃과 같다. 인간의 개인적인 영화와 운명도 이와 같다. 그러나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소망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다.
여러분, 이 기쁨 충만한 경험을 가지고, 이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이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여러분은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야 한다. 영원한 영광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렇게 거듭나고 새롭게 지음받아 복음의 빛과 소금이 되길 바라신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승리의 소식을 여러분 모두가 경험하길 축원한다. 그래서 더 담대한 믿음의 반석위에 설 수 있기를 원한다. 또한 바로 예수님을 그 하나님 사랑의 확증의 표로 우리에게 주신 줄 믿으시고 다시 한 번 구주로 고백할 수 있기를 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이시다.
바울이 이사야의 위로와 희망의 말을 고린도교회에 전하면서 했던 말이 생각난다. “지금이 바로 은혜 받을만한 때요, 구원받을 때”(고후6:2)라고 했다. 아름다운 소식을, 그리스도 예수가 나의 구원자이며 또 그를 믿는 모든 자의 구주가 되시는 시식을, 온 땅에 증거하는 삶이 되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