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c_row][vc_column][mk_audio mp3_file=”http://moonpoch.org/wp-content/uploads/2014/09/140831.mp3″ audio_author=”김경호 목사”][mk_padding_divider size=”40″][vc_column_text disable_pattern=”true” align=”left” margin_bottom=”0″](2014.8.31. / 성령강림절후 12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역작들이 넓은 들녘에서 고개를 숙이며 황금 노을을 이루어 가는 계절에, 알곡 되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원하여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신앙의 아름다운 열매를 내어 놓을 수 있도록 변화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히7:19)
오늘의 말씀은 인생에서 불운한 인생과 고통의 과정을 겪었던 이에게 소망과 그 비결을 주는 말씀이다. 인생의 나락에 처했던 이들에게도 힘과 능력이 되는 말씀이다. 성경속 등장인물들은 참 볼품없고 불쌍한 인생을 살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라. 누구나 자기의 밝은 미래를 꿈꾼다. 그런데 기대와 어긋날 때가 있다. ‘이런 게 아이었는데…’라고 아쉬워한다.
룻기는 룻이 남편을 잃었고, 시 홀어머니였던 나오미로부터 재가하도록 허락을 받았지만,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따랐다는 내용이다. 전통적으로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바람직한 관계, 아름다운 관계의 본보기가 되는 본문으로 이해해왔다. 고부간의 갈등에서 며느리의 효성을 강조할 때면 선택하는 본문이 룻기였고, 룻이 보인 높은 도덕적인 모습을 통해 기독교는 자랑스러운 전통을 빛내온 것도 사실이다.
현대의 세상 풍조는 그렇지 못하다. 그렇더라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다보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복을 약속하신다. 오늘 본문도 그 복에 대한 약속이 이루어진 내용이다. 그 가정에 기업무를 이가 없었지만 오벳을 낳고 사람들이, 오벳을 보며 이스라엘의 유명자가 될 것이라고 축복했다.
물론 살기 어렵고, 현실이 따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를 지고 감당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 있다는 것을 믿는 이들이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십자가의 도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이면에 있는 이야기를 좀 말씀드리려고 한다. 1장 첫 부분을 읽다가 참 기가 막힌 사실을 발견했다. 볼품없는 사람들에 대한 볼품없는 모습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1장 1절 ‘흉년’ 이 단어부터 그것을 연상시킨다. 얼마나 살기 어렵고 힘들었으면 한 사람이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했다고 했을까? 있다가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모압’이라는 지명도 그것을 연상시킨다. 이민을 갔는데, 동남아 어디쯤으로 갔다고 생각해보라.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고 하면 좀 그럴 듯한, 물가나 경제수준이 아주 낮은 동남아지역으로 갔다고 하면 어떻게 인식되겠는가? 모압이라는 지역이 그런 이미지를 주는 것이다.
2절에서는 이름들이 소개된다. 엘리멜렉 “하나님은 왕이심”, 나오미 “우리의 즐거움” 이런 뜻이다. 이스라엘의 이름은 그들의 인생을 엿보게 해주는데, 과거에 참 좋았던 때가 있다. 잘 살았다. 그 인생이 잘못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인생의 암초를 만났다. ‘흉년’이라는 인생의 암초였다. ‘모압’은 추락하게 된 인생 밑바닥을 삶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엘리멜렉이 타국에서 잘되기는커녕 죽었다. 허망하다. 게다가 더 곤고하고 가엽게 만든 것은 ‘자녀’에 대한 불운한 문제였다. 그 두 아들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인데, 말론은 ‘약골, 허약자’라는 뜻이다. 기룐은 ‘결핵병’이라는 뜻이다. 자녀들이라도 건강하게 자라서 기업을 일으켜야 하는데, 그런 소망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허약하고 질병을 안고 있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아들들을 결혼까지 시켰지만 너무 일찍 요절하고 말았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두 며느리 오르바와 룻은 모두 모압여인이었다. 이 사실이 굉장히 포인트가 된다. 왜일까?
룻기의 배경은 사사시대이다. 그러나 이 글이 기록된 때는 바벨론 포로기를 거쳐 주전 4-5세기쯤이었다. 그동안 황폐했던 이스라엘의 재건시기이다. 저자는 무슨 이유에서 사사시대의 역사에 주목하고 있을까? 어떤 메시지를 얻고자, 그리고 주고자 했을까?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민족의 흥망성쇠와 국가발전과 기틀을 다시 세우는데, 중요한 기로에 서있던 상황임을 고려하자. 모두가 일심으로 단결해서,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재건과 회복을 위한 리더는 스룹바벨과 느헤미야와 에스라였다. 스룹바벨은 성전을, 느헤미야는 성벽을, 에스라는 율법을 복원하는데, 주축이 되었다. 이 세 가지는 3대 회복의 열쇠였다.
독자들은 이스라엘에서 살기 어렵다고 모압에 가서 살게 된 것에 대해서 “꼴 좋다”는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아무리 살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그렇지, (누구는 안힘들고 흉년을 만나지 않은 사람이 있나? 자기들만 흉년을 만났나?) 그 땅에 뭣하러 가서, 그 꼴을 당한 담!’
재건하는 과정에 있는 당시의 유다인들에게 이 이야기는 교훈을 줬다. 지금 어렵다고 이곳을 떠나면…, 다른 데 가서 더 좋을 것을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느헤미야 에스라. 주전 4백년, 포로기 이후 민생경제는 바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신분으로 페르시아의 총독이 된 느헤미야는 고국에 이스라엘 성벽을 빠른 시일 내에 건축하고자 했다. 그리고 에스라는 율법을 완성시켜 나갔다. 그런데 이 재건비용은 어디서 마련할까? 재건이라는 이념 앞에 희생을 감수하는 것은 힘없는 백성들이었다. 포로기 이후여서 모두가 그랬던 것일까? 다들 경기가 안좋았던 것일까? 그렇게 여론을 만들기 쉽다. 느헤미야 5장에서 확인되는 사실은 가난한 백성들이 먹고 살 양식이 없다고 느헤미야에게 부르짖는다. 확인을 해보니 밭과 포도원등을 저당잡히고(느5:3), 나중에는 다 빼앗기고 자녀들도 종으로 윤락녀로 팔아야 하는 처참한 상황이 벌어진다.
느헤미야가 이 사실을 확인하고 총독의 자격으로 귀족들과 민장들이 합법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렸던 횡포와 관행을 엄하게 꾸짖는다. 힘없는 서민들은 무리한 세금을 내고, 높은 이자의 이중고에 시달렸다. 하지만 귀족과 민장들은 손해를 보거나 헌신하지 않으면서 그 비용을 가난한 사람에게 돌아갔다.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모습이다.
느헤미야와 같은 탁월한 지도자 상과 리더십이 필요하다. 그는 총독의 봉급을 받지 않고 모두 사회에 헌신했다. 당시 재벌들의 부조리한 수입구조를 개선하고 서민들의 민생을 살폈다. 그것은 자기부터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할 때에야 가능한 일이다. 자기는 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다른 사람에게 하라고 하면 하겠는가? 그것이 황금률이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공공의 사업 자체만으로도 폭력적으로 여길 수 있다는 엄연한 단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솔로몬 때도 그랬었다. 그래서 나중에 나라가 분단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어쨌든 느헤미야와 에스라는 방해자들의 음모와 공격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저력 있게 일들을 완성해갔다.
민족적인 정체성을 바로세우고 조상들의 법을 회복하도록 확고부동한 신념을 가지고 재건사업을 추진해갔다. 그 왕국의 모델은 다윗왕이나 솔로몬 때의 영화였고, 핵심은 율법이었다. 그런데 룻기의 저자는 그 시대 속에서 재건과 발전이라는 이념 속에 가려 보지 못하는 엄청난 폭력성을 보고 있었다. 짐작이 되는가? 속히 일을 추진하고 마무리하려고 하는 성과주의는 엄청난 빈 구멍을 만들고 있음을 룻기의 저자는 보고 있었다.
크로산은 룻기를 부푼 풍선 앞의 바늘(예리한 못)이라고 말한다. 이유가 있다. 어느 정도는 느헤미야와 에스라의 운동과 추진하는 사업은 알겠지만 그것이 과도하고 지나치면 안된다는 것이다.
폭력성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단일 혈통, 순수혈통, 이런 생각 자체부터도 폭력적이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어떤 특정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에스라가 중요시하는 율법에 의하면,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주의 총회 회원이 되지 못한다. 그 자손은 십대가 아니라, 영원히 주의 총회 회원이 되지 못한다.”(신23:3)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느헤미야와 에스라는 외국 여인들과 결혼한 사람은 모두 즉시 끝장낼 것을 요구했다.
룻이 모압여인이었다는 것이 왜?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가? 모압 여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 폐쇄성을 넘어 굉장히 배타적이었고, 도가 지나쳐 극단으로 치우치고 있었다. 룻은 이스라엘의 구성원이 절대 될 수도 없고, 돼서도 안된다. 그것이 시대적 인식이었다.
룻기에서 ‘모압’은 자주 반복되고 강조된다. 룻이 이스라엘 여인이 아니라 모압 여인이라는 것을 청중들이 결코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다. 왜 그랬을까? 또 하나 강조 되고 있는 것이 있는데, 다음의 사실이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자랑하고 선망의 대상으로 여기는 다윗 왕이 보아스와 룻의 자손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의 섭리가 없었다면, 보아스와 룻도 연결되지 않았을뿐더러, 이 둘이 아니었다면 다윗은 이 땅에 나올 수도 없었다.
정말 룻기는 터질 것 같이 팽창한 풍선 앞에 날카로운 못과 같다. 바로 그토록 모델로 삼고자 하는 다윗 왕, 그 증조모의 출신은 어디인가? 모압여인이었다.
극단주의를 지양해야 한다. 요즘 느헤미야 운동을 신앙적으로 부르짖는 경우들이 많은데, 그 이면에 감추어진 폭력성과 폐쇄성을 바라볼 줄 아는 것도 예수의 눈이다.
룻기를 다시 읽어보자. 1장에서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모압으로 갔다는 이야기 속에 그들의 인생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독자들은 통쾌해했을 것이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모압은 가지 말아야지, 또 지금 국가적으로 이혼을 장려하고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며 자랑하는 풍조에 속에, 모압여인들과 결혼했던 많은 이들에게 이혼에 대한 마음의 부담감을 덜어주는 대목으로 인식됐을 것이다. 그런데 점점 반전이 다가온다.
2장, 3장으로 갈수록 보아스와 룻이 가까워지고 결국에는 혼인을 하게 된다. 이 과정을 듣는 독자들의 마음, 청중들의 마음은 어떨까? 사실은 당시의 독자들은 굉장히 불편하다. 보아스가 모압여인과 가까워지고 결혼을 하다니 말이다. 그런데 정말 절정은 어디인가? 17절과 22절이다. 두 번씩이나 다윗이 바로 그렇게 해서 나온 사람이라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
이 내용은 당시 이념이나 사조에 대한 정면 반박이나 다름없다.
룻과 보아스가 아들을 낳았다. 오벳이었다. 여인들이 그를 나오미 품에 안겨주며 하는 축복의 말을 들어보라. 14절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스라엘 사람은 이름이 유명해지기 위해서는 율법의 길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율법적인 인간의 공로와 업적이 그를 유명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다. 학교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들에게 뒤처지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력을 쌓아야 하고 다른 것에 한 눈 팔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디모데에게는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말라.
단순히 나오미와 룻의 관계가 고부관계만이 아니다. 그 효성의 모범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나오미는 좋은 환경에 대한 기대와는 달리, 참 어려운 시절을 겪었다. ‘흉년’을 만났고, ‘모압’ 땅이라는 위치에 이르도록 형편이 어려웠고, 자녀들 때문에 고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룻이 나오미에게 하는 말이 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게 나오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한다.
나오미는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현존)을 드러냈다. 십자가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룻은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삼겠다고 말한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 축복의 말은 율법 때문이 아니다.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삼겠어요.’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에겐가 본이 되는 것이다. 희망이 되고 전도가 되는 것이다.
어려운 중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냄을 통해, 그것을 배우고 자란 자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옮겨 붙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들어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한 왕을 보았다고 말씀하셨는데, 무엇을 보고 그렇게 말씀하셨는가? 외모를 보신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셨다. 그 중심에 하나님께서 살아계셨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가? 죽음 가운데 아들을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가?
여러분의 삶의 어려움을 이기게 하신다. 병마를 이기게 하신다. 고난을 이기게 하신다. 눈물을 극복하게 하신다. 하나님께 도우시고 하나님께서 힘주시리라 믿는다.[/vc_column_text][/vc_column][/vc_r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