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c_row][vc_column][mk_audio mp3_file=”http://moonpoch.org/wp-content/uploads/2014/09/140824.mp3″][mk_padding_divider size=”40″][vc_column_text disable_pattern=”true” align=”left” margin_bottom=”0″](2014.8.24. / 성령강림절 후 10주)
선한 목자이신 사랑의 하나님,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가 주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온 누리를 덮으며 거칠게 숨 쉬던 여름이 가을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는 계절에, 자연의 신비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확인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선선한 바람과 함께 주님의 선선한 손길도 느낄 수 있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주께로 돌아와서 이 성전에서 주께 빌며 간구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대하6:24-5)
좋으신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
40여일 세월호 특별법을 위해 단식을 하던 유민이 아빠 이영호 씨가 결국 응급실에 실려 갔다. 많은 이들이 그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다. 이제 제발 단식을 멈추는 게 어떻겠느냐고 설득하려고 여러 사람들이 그를 방문했다. 그러나 끝내 단식을 멈출 수 없었다. 병원에서 오랜 단식상태를 고려해서 맑은 미음 200ml를 준비했다는데, 그것을 거부했다. 그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나머지 가족들은 어떻게 될까? 그 상실감과 고통은 누가 보상해주며 되갚아줄까? 물론 그것을 알겠지만 진실을 향한 외침은, 보상을 바래서가 아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셨다. 지금 그는 광야 위에 서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부모들 걱정이 크다. 아들을 가진 부모는 군대보내기가 겁나고, 딸 가진 부모는 밖에 내놓기가 겁난다. 참 흉악하고 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
석촌동 근처에서 싱크홀과 큰 동공들이 발견돼서 시민들이 불안해하고 있다. 건물들과 아스팔트 아래 빈 공간들에서 우리 사회에 곳곳에 오랫동안 방치된 부조리한 구멍을 보는 듯하다. 그것이 버젓이 감춰져 있고 덮여있다. 실태와 원인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사실은 평안은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이영호 씨의 단식도 아마도 그와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진실에 대한 원인 규명 없이 이 일이 잊혀진다면, 또다시 참사가 일어나지 말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하는 일에 대해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는 것은, 진실규명과 원인규명을 통해, 재발방지의 의지를 가져야 한다.
예수님은 사탄에게 큰 유혹을 받으셨다. 물질, 명예, 권력이었다. 생존의 벼랑 끝에 있는 이에게 이 세 가지는 정말 큰 고통이고 유혹이다. 그런데 예수님께 찾아온 유혹은 언제였는가? 금식 후에 찾아왔다. 금식을 하고 있는 중간에 유혹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금식 후에 찾아왔다.
우리에게 있는 유혹은 무엇인가? 잘 먹고 잘살 수만 있다면, 편하게 살 수만 있다면, 진실이나 원인이, 적당이 덮여지고 가려져도 상관 없다고 하는 것이다. 빨리 마무리되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살자는 유혹이다.
예수님께서 시험을 이기시고 유혹을 이겼던 것처럼 이번 기회에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한 역사가 있기를 바란다.
여러분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면 어떻다고 생각하시는가? 옛날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세상은 더 음흉해지고 잔인해 진 것 같다. 그렇지 않는가?
그런데 바울의 말을 들어보면 이것도 아닌 것 같다. 과거도 악했다.
롬12:2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이 한 마디에서 바울의 걱정이 느껴진다. 그 역시 당시의 세상을 바라보면서 염려했던 것 같다. 세상의 악하고 악랄함을 봤다. 그 문제로 모든 피조물들이 신음하는 것을 그는 통찰하고 있었다. pax Romana 로마의 평화와 안녕은 어느 시대에 견주어도 비할 수 없을 만큼 융성했다. 하지만 그 바울은 그 이면에 나타나는 폐단을 바라봤던 것이다. 휩쓸려가지 말고 동화되지 않되, 지혜롭고 순결하게 살아가야 할 큰 과제였다.
로마서 1장 26~32절은 이때 로마의 상황이 어땠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하는 단서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때, 네로가 로마의 황제로 즉위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사회적 격차와 권력의 격차가 굉장히 컸고 사회적 폭력도 매우 심각했다. 여기서 다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로마시의 귀족과 시민층은 가족은 대가족을 추구했다. familia 이것이 행복한 가정의 이상형이었다. 그런데 대부분 핵가족상태였고, 이혼으로 가족 해체율도 높았다. 양자 입양이 유난히 많았는데, 이런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게다가 엽기적이고 희괴한 일이 있었다. 남성인 주인이 남자 노예를 돈으로 사서 입양하는 경우가 있었다. 왜일까? 그의 인격이 성숙해서가 아니다. 사랑해서였다. 변종 입양이라고 할 수 있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짓을 하게 되었습니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무엇을 엿볼 수 있는가? 귀족과 부유한 평민들이 사회적 약자들을 성적으로 농락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말일 수 있다. 또한 남주인과 여주인이 사회적 약자인 이성을 성적으로 농락하는 것에 대한 비판도 이 텍스트에 반영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롬1: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번영과 성장 이면에 나타난 혼란과 무질서, 혼동을 겪으며 살았다.
여러분 아시는가?
그 와중에도 하나님의 시선은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것을 말이다.
기억하라.
하나님의 시선은 그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들은 고난을 당하고 박해받으며, 때로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처럼 생업의 모든 터전과 재산을 몰수당한 채 추방당한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은 온통 그 고난받고 연약한 사람들에게 있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주시는 세 가지 큰 교훈이 있었다.
-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과 결코 비교할 수 없음을 아는 것.
- 그 무엇도(환란, 곤고, 헐벗음, 굶주림, 질병의 고통, 심지어 저주 받았다고 생각되는 불안까지도)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확신하는 것.
-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게 되는 곤고함, 무엇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저내는가? 바로 그것이 성령이라는 것.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여러분,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일까? 세상이 어지럽고, 혼돈스럽고, 추하고 악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요 구별된 자로 살아가길 바라신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며, 승리하길 원하신다. 광야와 같은 인생의 처지와 형편에서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시험을 당해 낙심치 말고, 또 다시 일어나고, 다시 일어나 하나님의 영광이 되길 원하신다.
오늘 말씀 1절, 2절은 12장의 핵심말씀이다.
1절에서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내용에 대해 3절에서 13절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2절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구별하여 사는 삶에 대해서 14절에서 21절까지 말씀하고 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란 무엇인가? 번영인가? 성공인가? 재물의 운인가? 그것은 누차 말했던 것처럼 ‘변화’라는 선물을 받는 것이다. 신학적인 용어로는 성화라고 한다. 죄인일 수밖에 없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이에게 주님은 변화를 선물로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성화의 삶을 살아간다.
고집 세고 자존심 강하던 자신이 온유 겸손해지며, 죄와 유혹의 멍에에 매여 허탈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의미있고 보람있는 삶을 살게 되며, 그 불안과 염려 속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던 사람에게는 소망과 희망을 선물로 주신다. 절망하며 살던 사람이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심약하게 살던 사람이 담대함과 용기를 얻어 힘차게 살아가는 것이다.
여러분 변화를 통해 새로운 행복이 시작되고, 그 능력이 우리에게 역사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창조적 은총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복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우리 자신을 드리는 삶이란 무엇인가, 악한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어두운 시대다. 세상적인 가치관, 로마의 이념과 황제의 목적이 만들어낸 가치관이 뒤섞여 혼돈을 겪는 세상 풍조 속에서 참된 삶이란 무엇인가? 말씀을 통해 생각해보자.
1. 믿음으로 누군가의 지체가 되어주는 삶이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의미가 되고 꽃이 되는 삶이다. 4-5절.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섬김을 통해 지체가 되어줄 수 있다. 섬김을 받으려 하면 지체가 되어줄 수 없다. 아버지는 아들의 지체가 되어주고, 아들은 아버지의 지체가 되어주고, 서로의 연약함을 보완해 줌으로써 화목한 가정이 된다.
김** 집사님 있으면 찬양할 때, 걱정이 없다.
지난 목요일 건목원 세미나에 서울남연회에 속한 미자립, 개척교회 목사님들이 모였다. 어떤 목사님의 질문, ‘작년에 어려운 일도 있었고, 참 힘드실텐데, 어째 행복해 보이는데, 비결이 뭐냐?’고 물었다. ‘뭐라고 대답했을까?’ 교회가 잘된다? 신앙이 좋아서 범사에 감사하다? 무엇일까? “우리 교우들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다.” “어떤 점이 사랑스럽냐?” 물었다. 곰곰이 생각하다가(장로님 자랑을 할까? 권사님들 자랑을 할까? 전도사님 자랑을 할까? 집사님들 자랑을 할까? 생각하다가) 엄길종 권사님 이야기를 했다. “아무 말 없이 계시기만 해도 힘이 되고 마음이 든든하더라.”
2. 믿음으로 자신에게 주신 삶의 몫을 감당하면 된다. 3절.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어제 어떤 목사님이 전화를 걸어, 어떤 신학적인 문제와 용어에 대해 문의를 해왔다. 여러분도 잘 아는 분인데, 대답을 해주면서, 저도 깨달음을 얻었다. ;지내다(하야), 동행하다(할라크)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는데, 동행하다의 뜻은, 흐르다는 뜻도 같이 있다. 물이 흐르는 게 그냥 흐르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따라 흐르는가? 물길을 따라 흐른다. 분명한 목적과 방향이 있다. 어디인가? 바다. 낮은 곳. 물길을 넘어서면 어떻게 되는가? 범람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주님과 늘 동행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그때 주시는 마음을 따라 살아보자.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이 하늘로 들림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의 삶과 몸 역시 하나님께 들여올려 받으시는 체험을 하는 것이다. 성령이 역사하시고 나를 누군가의 소중한 지체가 되어 의미와 보람까지 느끼게 된다.
3. 진실함으로, 사랑으로 하면 된다. 9-10절
‘서로 먼저’ 무슨 뜻일까? 서로 하면 누가 먼저일까? 동시에 하라는 말인가? 동시에 하지 않으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 경쟁하듯 적극적으로 하라는 말일까?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 위해 터를 찾을 때, 본 어느 우애 좋은 형제 이야기. 쌀을 서로 집에 갖다 놓음.
4. 성실함과 인내로 해야 한다. 12절
삶의 의미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과거로부터 현재와 미래로 나아가는 방향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절망뿐일 것이다.
그런데 신앙은 미래로부터 과거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변화와 은총이라는 선물을 들고 세상에 나아가 승리하길 원하신다.
영상을 보면서 우리가 도전받길 원한다.
영상
고난이 따른다 해도 기독교인으로서 생명의 귀중함을 소중히 여기고 지키는 일에 특히 거룩한 산제물로 귀하게 쓰임을 받길 원한다.[/vc_column_text][/vc_column][/vc_r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