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24일, 주헌절 후 제 7주

 

피난처요 힘이시며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 되시는 사랑의 하나님, 주현절 7째 주,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암담했던 시절에 분연히 일어나 나라의 독립을 외쳤던 조상들의 열기가 초봄의 훈풍을 타고 귓전에 들리는 때에, 공의로 세계를 다스리시는 주님의 섭리를 생각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나라와 민족을 위한 저희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7:1)

 

 

  1. 일체 오래 참으심

오늘은 주현절 후 7주이다. 3.1절 기념주일이기도 하다. 어느 때보다 길다. 주현절의 가장 큰 의미는, – 주님께서 공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셨다. – 우리의 삶 속에 임하시는 주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깨달으며, 믿음을 갖는데 있다. 3.1만세운동 참가자 중 95%가 기독교였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믿음의 선조들이 하나님을 믿고 분연히 일어났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자유와 해방을 향해 나아가도록 힘과 용기를 주신다.

광야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경험하고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서도, 또다시 의심하고 믿음이 약해질 때도 있다. 제자들은 오병이어를 경험하고서도 주님이 바리새인의 누룩을 이야기하실 때 떡의 관한 이야기로 오해했다. 베드로는 물위를 걷다가 물속에 빠져 들어갔다. 풍랑을 만났을 때, ‘죽게 된 우리를 안돌아보십니까’, 원망했다. 귀신들린 아이를 고칠 수 없어 서기관들과 논쟁에 빠졌다. 예수님께서 깨어 기도하라고 하실 때 잠들어 있었다. 아이가 주님께 나오려는 것을 나무랐고, 바디메오가 소리질러 주님을 찾는 것을 막아섰다. 죽은 소녀를 만났고, 나사로의 죽음을 마주했다. 그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소망을 찾지 못하고 소용없다고까지 했다. 자기 생각대로 판단해버리고 낙심하는 모습은 성경속 인물들과 우리가 다르지 않다. 주님을 믿지 못하고 오해하고 깨닫지 못한 모습이다.

올해 이렇게 주현절이 긴 이유는 오래 참으시는 주님의 은혜 역시 우리가 깨닫기를 바라신다. 주님은 연약한 믿음을 도와주셨다. 물속에 빠져 들어가던 베드로를 건져주셨고, 풍랑을 잠잠케 하셨고, 물론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주시기까지 했다. 아이가 나아오는 것을 용납하셨고, 바디메오의 눈을 뜨게 하셨다. 달리다굼, 죽은 소녀를 살리셨고, 나사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셨다. 질병을 고치시고 악하고 더러운 것을 깨끗게 하실 뿐만 아니라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며 죽음에서 생명을 주실 수 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가 성숙하고 발전하며 충만해지기를 주님께서 바라신다.

 

얼마나 충실했는지 다시 한 번 자문하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시다. 우리의 믿음 없음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일체 오래 참으시는 주님의 뜻을 깨닫기를 바라신다. 주님을 잘 믿는 제자의 본으로 삼으시기를 바라심을 믿고 새로운 결단이 있기를 바란다.

 

 

  1. 잘못된 과거를 생각하면

형들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요셉의 형들 때문에, 애굽까지 왔다. 그때를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 노예로 팔려와 종으로 전락했다는 것, 아버지를 볼 수 없었다는 것, 문화 언어 모든 것이 생소하고 막막했다는 것, 지난날을 생각하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롭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였던 빅터 프랭클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

 

“사랑은 영적인 존재, 내적인 자아 안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된다.”

 

대부분 가스실로 직행했지만 자신은 잠시 죽음이 보류됐다. 자신의 아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른다. 알 수 있는 방법도 없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24시간 사랑하는 아내를 떠올리는 영상을 그 무엇도 방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내의 모습을 떠올리는 일에 모든 시간을 바치다시피 했다. 나중에는 정말 그 곁에 있는 것처럼 너무나 생생하게 아내를 떠올렸다.

 

‘나를 그대 가슴에 새겨 주오. 사랑은 죽음만큼이나 강한 것이라오.’ 이러한 고백을 생생하게 떠오르는 아내에게 바치면서 하루하루 견뎠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을 떠올리는 사람은 어땠을까?

 

강남의 100억대의 고급 아파트에 사는 어느 사람이 경비원에게 폭언과 폭행을 가했다. 그 중에 가장 심한 말이 무엇인가? 처자식 앞에서 똑같이 대해줄까, 하며 폭언을 퍼부었던 것이다. 얼마나 저질인가?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비참한 것이다.

 

요셉이 애굽에서 승승장구하는 삶을 산 것 같지만, 그의 가슴에는 이에 준하는 그리움과 한을 가지고 살면서 하루에도 수십 번 가족을 떠올렸을 것이다.

 

형들이 자기를 팔아넘기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을 겪지 않았더라면, 마음이나 머릿속에서 끊이지 않고 돌아가는 영상이, 단순히 영상이 아니라 현실이고 현존이었을 텐데, 그렇지 못했다.

 

세상에서 때로는 치사하고, 아니꼽고, 더럽고, 서럽고, 괴로운 일들을 만나고, 그러면서도 참고 견디며 인내해야 하는 시간들이 분명히 있다.

 

  1. 아버지는 아직 살아계십니까

요셉이 애굽에서 총리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의 묻어두었던 마음은 무엇인가? 1절,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소리질러” 이 짧은 한 마디로, 참 기가 막힌 세월을 다 읽을 수 있다. 요셉이 얼마나 크게 울었는지, 2절은 “바로의 궁중에 들렸다.”고 증거 한다.

 

처음에 형들이 극심한 기근으로 애굽까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왔을 때, 딱 보자마자 알아봤다.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44장까지 요셉은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형들을 시험하고 있다. 왜 바로 자신의 신분과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을까? 복수냐? 용서냐? 갈등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아직 살아계십니까?”

 

기가 막힌 대목이다. 몰라서 물은 게 아니다. 그간 형들의 대화를 통해서 짐작하고 있었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者)입니다.”

 

“아버지는 아직 살아계십니까?” 이 물음에 특별히 주목하는 이유는, 빅터 프랭클의 말 때문이다. 아내에 대한 그리움 끝에, “사랑은 영적인 존재, 내적인 자아 안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된다.” 고난과 역경 가운데 사랑으로 견뎌온 세월의 견딤이 읽혀진다. 아버지와 가족 한명 한명에 대해, 그것이 무의식적인 영역이라고 하더라도 영적인 존재, 내적인 자아 안에서 숱한 영상을 떠올리고 떠올리면서 씻어내고 다듬어냈다. 아직 정리가 되지 않은 내적인 갈등과 괴로움이 있더라도 분명한 것은 그 심령의 사랑의 흔적이 각인돼있었다. ‘아버지는 아직 살아계십니까?’는 단순히 안부를 묻는 차원이라고 볼 수 없다. 그가 최종적으로 어떤 결정, 결단을 했는지 드러내 준다.

 

내적인 자아 안에서 존재의 소중함을 완성시킨 것이 사랑이다. 원망을 키워갈 수도 있고, 낙심에 주저앉아 일어서지 못할 수도 있다. 존재에 대한 소중함보다 불평불만이 커서 사랑했다는 것 마저 잃어버릴 수도 있다. 자기가 소중히 여겨 선택했다는 것 역시 망각하고 책임을 회피할 수도 있다.

 

“아버지는 아직 살아계십니까?” 이 한 마디는 오늘 선포하려는 말씀과는 별개로 그 소중함을 다시, 현실의 세계로 소환하게 만든다. 이에 비춰본다면 우리는 흔히 사랑을 잊고 산다. 때로는 그 소중함을 망각한 채 살아간다. 아내의 소중함, 남편의 소중함, 자녀의 소중함, 부모의 소중함. 매일 매일의 삶 속에 후회하지 않을 만한 소중한 사랑의 능력으로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란다.

 

 

  1.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요셉의 유명한 말이 있다. 5절, 7절-8절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이와 같은 믿음의 눈으로 본 고백 없이는 하나님의 현존하심이 드러날 수 없다.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그의 믿음의 선택과, 삶 속에 나타난 영적인 깨달음을 통해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비하시는 분이시다. 인간의 생각을 뛰어 넘어 계획을 가지시고 섭리하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하나님 하시는 일의 시종을 다 헤아릴 수 없다. 선한 계획을 가지시고, 안 되는 것 같아 보이고, 안 되는 것 같아 보이지만, 되게 만드시고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고난 가운데에도 피할 길을 내시고,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고, 실패가 변하여 승리를 이루시는 분이시다.

 

형들이 자신을 애굽에 팔아넘기지 않았더라면, 또 그로 인해 애굽에서 드문드문 회한의 감정이 발생했을지도 모를 불행, 말로 다 할 수 없는 한 맺힌 삶들은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영광의 옷을 입을 수 있게 된다. 지난 과거를 원망하거나 아쉬워하기 보다는 믿음의 눈과 사랑의 내적인 깊이를 통해 하나님의 현존하심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란다.

 

강은교 시인의 물길의 소리라는 시가 떠올랐다.

누군가로부터 ‘물소리는 물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는 생각한다.

“그럿ㅎ군, 물소리는 물이 돌에 부딪히는 소리, 물이 바위를 넘어가는 소리, 물이 바람에 항거하는 소리, 물이 바삐 바삐 은빛 달을 앉히는 소리, 물이 은빛 별의 허리를 쓰다듬는 소리… (중략) 물이 길을 찾아가는 소리…”

 

그러면서 이런 소리를 들어본다고 말한다.

 

“물끼리 몸을 비비는 소리, 물끼리 가슴을 흐들며 비비는 소리, 몸이 젖는 것도 모르고 뛰어오르는 물고기들의 비늘 비비는 소리가…. 심장에서 심장으로 길을 이루어 흐르는 소리가, 물길의 소리”

 

오늘 말씀의 제목을 “아버지는 살아계십니까?”로 정했다. 요셉이 아버지의 안부를 묻기 위해 한 말이지만, 다른 의미로 우리 삶과 마음과 믿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살아계신지 묻기 위해 정했다. 주현절 7째 주,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경험하고 복습하며 신앙을 키워갈 우리에게 자문해보자.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이 선함을 믿고, ‘심장에서 심장으로 길을 이루어 흐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소중한 사람의 마음소리를 듣고 사랑의 온전함을 이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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