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27일 성령강림절 후 1주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사랑의 하나님, 복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은혜로 푸른 숲이 성장에 박차를 가하며, 농부는 희망을 가슴 가득히 채우고 바쁜 일손을 놀리는 계절에, 갈급한 심령을 적실 생명의 물을 바라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은혜로 심령이 새로워지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갈4:7)

 

 

  1. 밤중에 주님을 찾은 니고데모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다. 밤중이었다. 그는 유대인의 유력한 지도자이다. 그러기에 의외의 일이었다. 하기는 예수님께 ‘의외’(意外)라는 것이 어디 있을까? 예수님께는 예상하지 못할 일들이 일어날 뿐만 아니라 수많은 기적과 이적, 표적들을 나타내셨다.

그는 예수님을 어느 정도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2절 하반절을 보면, 표적이라는 말이 나온다. 단순히 이적이나 기적을 일으키는 신통한 능력이 있는 분으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짐작했고, 2절이 또 그렇게 고백하고 있다.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이런 정황에 비추어 그는 어떤 목적으로 예수님을 찾아왔을까? 그가 밤중에 찾아왔다는 것으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만, 만난다는 것에 대해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껄끄러운 오해를 두려워하고 피하는 불완전한 믿음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성경에 충실한 해석이 아니다.

성경은 주님께 처음 나온 사람의 실상을 드러내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19절,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

20절, 악을 행하는 자는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니 아니한다.

21절,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온다.

 

이러한 내막의 전제는 1장 5절,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는 말씀이다.

 

그는 밤에 예수님과 진지한 대화를 나눠보려던 주제들은 이런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는 당대에 의롭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겨지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나다나엘처럼 유대의 지도자로서 어떻게 하면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스라엘의 수많은 모순과 문제들을 해결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다고 할 만한 꿈들을 실현시킬 수 있을까, 고심하던 사람이다.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가정과 사회를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를 바라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기도하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니고데모도 이런 문제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다. 로마로부터 식민지배, 토지정의가 무너지고 유명무실한 율법준수의 문제, 사회적인 수많은 모순들은 사두개파, 바리새파, 젤롯당, 에세네파의 정파 간의 갈등 속에 묻혀, 끝없는 공전만 되풀이 됐다.

기적을 행하시고 이적을 행하시며 능력을 베푸시는 주님과 힘을 합한다면, 뭔가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 주님이 아신다.

이상한 점은 니고데모가 주님께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는데, 주님께서 대답을 하신다. 다른 데를 보면, 부자 청년이든, 관리이든, 율법교사이든 누군가가, 영생에 대해서 문거나 질문을 하면 대답을 하시는데, 여기서는 묻지도 않았는데 대답하신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

 

주님은 니고데모가 가지고 있는 깊은 관심과 고민과 마음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니고데모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은 응답이었다.

주님은 나다나엘을 잘 알고 계셨던 것처럼, 니고데모에 대해서도 그 깊은 속까지 꿰뚫고 계셨다.

 

잠언20:5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내느니라.”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사람의 속을 누가 알 수 있으랴? 그러나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기어낸다고 잠언은 말씀하고 있다. 우리 주님이야 말로 이처럼 명철한 분 아니시고 누구랴?

 

마찬가지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아신다. 주님이 여러분을 모르시겠는가? 답답하고 괴로울 때, 그 속사정을 모르시겠는가? 속사람을 아시고, 심령을 헤아리시며, 마음을 들여다보고 계시다. 그래서 때로는 속사람으로 강건하게 되는 역사기 일어나게 하시고, 마음을 감찰하시고,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이 친히 탄식하며 간구하시는 성령의 생각까지도 헤아리신다.

그리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응답하신다. 성경으로, 기도로, 목회자의 권면의 말과 위로의 말로, 깨닫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시고 내적인 확신을 주시거나, 마음의 긍정과 용기를 주신다. 이 시간도 여러분의 심령에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니고데모가 주님을 찾아 나왔을 때, 그가 잘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이스라엘을 구해보겠다고 하는 열심만 가지고 있을 뿐, 그 스스로 자신이 어둠인지도 모른 채, 주님께 나왔다는 것이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니고데모가 밤중에 주님을 찾았다는 것은 바로 이런 사정을 말하려는 것이다.

자기 답만을 고집하는 사람은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깨달을 수도 없다. 성령강림절을 보내고 있는데, 성령께서 마음속에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자기가 생각하기 좋은 대로 쉬운 대로 편한 대로 생각하는 사람은 사실은 주님 앞에 어둠으로 나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1. 거듭나지 아니하면

니고데모가 갈망하고 추구하려했던 하나님의 나라, 과연 옳을까? 인간이 추구하겠다고 만든 이념, 사상, 법과 제도는 과연 옳은가? 의문을 품을 때가 많다.

주님은 “진실로 진실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말씀하신다.

 

주님의 말씀은 니고데모의 반문과 함께 계속된다.

“진실로 진실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니이까, 두 번째 모태(母胎)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되물었다.

전에도 말했던 바가 있다. 니고데모가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이해못했을리 없다. 다만 거듭난다는 주님의 말씀을 모호하게 여겼거나 자기 확신이 너무나 강해서 자기는 거듭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을 했을 수 있다. 아니면, 거듭남은 자기 비움, 자기를 내려놓음, ‘자기’라는 자아가 죽는 체험을 해야 한다. 그것은 번거롭고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듭남을 불편하게 여기거나 귀찮게 여겼을 수도 있다. 니고데모는 이런 것들을 반증하기 위해서 물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가 사시는 체험과 믿음을 가지고 사는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은혜를 사모하고 있는가?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와 자녀와 옳고 그름으로 다투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잔소리가 되고 감정에 상처를 주고받는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서 말이다. 자신을 죽이고 나니까, 의외로 평안과 화목이 찾아오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근처에 초등학교를 다니는 6학년짜리 남학생이 있다. 그 엄마는 아이가 고집이 세다고 아이를 꺾으려고 했다. 그런데 잘 안되나 보다. 학원갈 시간인데, 학교에서 놀겠다고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가 아이를 다그쳤다. 아이는 계속 놀겠다고 엄마랑 승강이를 벌였다. 엄마가 고집스럽다고 하는 요점은 이랬다. “이미 너는 학원 안가고 놀겠다고 결정을 하고 엄마에게 통보하는 것 밖에 아니잖아. 결국은 너 고집대로, 너 뜻대로 할 거면서 뭣하러 전화해”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누가 옳은가? 엄마 말도 일리가 있고, 아이 말도 이해가 된다.

그런데 엄마가 잘못하는 게 있다. 이미 자기 아이를 고집이 센 아이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말과 언어라는 틀로 말이다. 내가 보기에는 고집이 센 게 아니라, 학원을 5-6개를 다니면서 정말 놀지 못하는 욕구불만일 뿐이다. 아이가 고집이 세다면 그렇게 만드는 것은 아이 자체가 아니라 그렇게 만드는, 욕구불만을 이해하고 헤아려서 지혜롭고 현명하게 충분히 해결해주지 못하는 엄마에게 문제가 있다.

 

한 친구 목사가, 문제 있는 가정을 초대해서 목사님 가정과 24시간 살아보기 프로그램을 했다고 한다. 대단한 용기이다. 단 하루 24시간을 함께 지냈는데, 짧은 시간 속에 작지만 큰 변화가 찾아왔다. 생활습관이나 모습은 다를 바가 없었다. 자신들의 넉넉하고 풍족한 모습에 비하면 그 목사의 가정은 소탈했고, 때로는 누추한 부분도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차이가 있더라는 것이다. 가장 먼저는 그간 자기들이 사용하는 말들이 얼마나 공격적이고 폭력적인가를 배웠다고 한다. 두 번째는 가족을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불신에 가득 차 있었는지 깨달았다고 한다. 가장 따뜻하고 사랑과 이해와 너그러움으로 대해야 할 상대인데, 남보다도 차갑고 더 못한 방식으로 대했던 것을 후해하고 깨달았다고 한다.

마지막에는 서로가 없다면, 어떨지 생각하며 편지를 써보게 했다. 행복은 나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것인데, 한 번도 행복하지 못하고 나중에 행복할 것을 바라면서 지옥처럼 살았던 것을 후회하면서 서로 울더라는 것이다.

참행복을 보지 못했으니, 참행복을 누렸겠는가? 오늘 말씀으로 바꾸어 말하면 이렇다.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었는데, 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

 

니고데모가 주님께 찾아왔다. 나름 하나님 나라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이면 그 나라를 앞당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 나라를 알고 왔던 것일까? 그는 어둠으로 찾아왔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바울이 거듭났더니, 정죄의 대상이 구원이 대상임을 알았다. 세상의 자랑이 배설물일 뿐이요, 오직 자랑은 그리스도의 복음임을 알았다.

이시간 우리는 거듭날 준비가 됐는가? 새로워지길 바라는가? 예수님의 눈으로만 비치는 하나님 나라를 보기를 사모하는가?

다시 한 번,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에 들어가서 행복을 심으라. 복음대로 행하라. 그리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라. 오늘 여러분에게 주님께서 간청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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