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내지 아니하며(고전13:5, 갈2:11-13)

성내지 아니하며(고전13:5, 갈2:11-13)

 

2017년 10월 29일 성령강림절 후 21주 종교개혁주일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하나님, 오늘 뜻 깊은 종교개혁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단풍과 낙엽이 함께 어울려 가을을 노래하는 계절에, 주님의 품에서 진정한 안식을 누리고자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불안과 불평 대신 희망과 사랑이 채워지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시121:3)

 

 

화를 키우지 말라

 

(영상)

 

자신의 힘이 세계에서 제일이라는 헤라클레스가 어느 날 아주 좁은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한참을 가다보니 길한 가운데 사과 크기만 한 이상한 물건이 떨어져 있었다.

“아니 천하에 제일 힘센 헤라클레스 앞길을 방해하다니 에잇…”

그는 발로 그 동그란 물건을 툭 찼다. 그러자 사과만한 것이 어느새 수박처럼 커졌다.

“어, 이게 뭐야 나를 놀리네”

흥분한 헤라클레스는 다시 그 물건을 발로 힘껏 찼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바위만큼 커져 버렸다.

“그래 천하의 헤라클레스를 이겨보겠다고?! 어림도 없다. 이놈”

더욱 열이 오른 헤라클레스는 이번에는 자신이 들고 있던 커다란 쇠몽둥이로 그것을 휘둘렀다. 놀랍게도 그것은 아까보다 두 배나 더 커져 마침내 좁은 길을 막아버리고 말았다.

너무나 화가 난 그는 잔뜩 얼굴을 찡그린 채 웃옷을 벗어던지고 한참동안 그것을 들어 올려 던지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져 보기 흉해졌고 덩달아 그것은 더욱 커져서 마침내 산더미 만해졌다.

결국 산더미 만하게 변해버린 그것에 눌려 험상궂은 얼굴로 노려보고 있는 헤라클레스 앞에 아테네여신이 나타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가 산더미만한 물건에게 웃으며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자마자 그것은 순식간에 사과크기가 되어 길 한 모퉁이에 툭 떨어졌다. 깜짝 놀란 헤라클레스에게 아테네 여신이 웃으며 말해주었다.

“그것은 더 이상 건드리지 마세요. 그것은 당신 마음속에 화와 같아서 건드리지 않고 두면 작아지지만 건드릴수록 더 커지는 것입니다. 화는 낼수록 더 커지는 법이지요. 조금만 참으면 곧 잊혀지는 것이 마음속의 화이니까요.”

 

 

2. 논쟁과 다툼

논쟁이나 작은 말싸움도 이와 같다. 사소한 문제로 다투다가 큰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많다. ‘성내다’라는 말은 수동태로서 누군가 다투다가 격분하는 것을 말한다. 사랑은 성을 내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오래참고 감싸주는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눈 줄 앎이라.”(디모데후서2:23)

 

예전에 바울도 바나바와 심각하게 다투었다. 2차 전도여행을 시작하면서, 바나바의 생질이었던 마가를 데려가는 문제로 이야기 하다가 그랬다. 1차 전도여행 때 중도하차했던 전력이 있다. 처음부터 크게 싸웠겠는가? 서로 이야기 하다 보니, 그간 섭섭했던 것이 드러나고, 생각이 갈라지고 차이가 나다보니,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순간 상처 주는 말이나 모욕적인 말들도 흘러나왔을 테고 결국에는 피차 갈라섰다.

 

보통 시간이 지나고, 시간이 흐르면, 그 때 참지 못하고 흥분하며 싸웠던 것을 후회하게 된다.

 

갈라디아2장에는 바나바와 바울이 크게 다투게 된 동기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 나온다.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이때 그 유명한 예루살렘회의가 있었다.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졌다는 선교보고 후에, 구원은 율법이나 할례에 있지 않고 믿음과 복음이라는 것이 천명됐다. 예수의 정신을 자꾸만 어지럽히는 이들이 있었다. 바울은 거짓형제들이라고 칭하고 있는데, 할례와 그렇지 못한 자들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심어놓고 차별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하려고 했다. 그들은 겉으로는 신앙이 좋고, 의롭고 정통성이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바울의 입장에서는 예수와는 상관없는 거짓형제들이나 마찬가지로 보였다.

바울은 자부심을 느끼며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헬라인 디도가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려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지켜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회의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구원은 할례와 율법이 아니라 오직 은혜와 믿음이었다. 달리 말하면 율법과 할례로 누군가를 정죄하거나 구원의 길에서 소외시키거나 외면할 수 없다. 엄청난 성과물이었다. 바리새인이나 유대적 기독교인들 가운데에는 여전히 유대교적인 전통 속에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 예루살렘 회의는 교회를 한 층 더 예수님의 뜻에 가깝도록 만들었다. 세계선교와 이방선교의 정당성도 얻게 되었다. 예수님을 잘 이해하게 되었다.

갈라디아서2:9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이 좋은 성과물을 들고 안디옥에 돌아왔다.

안디옥에서 바울이 생각하기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게바 베드로를 책망하기 까지 했다.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안디옥에 왔다. 게바와 다른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안 먹은 척 외식했다. 떳떳하지 못한 행동이었고, 비겁하게 보였다. 갈2:13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새번역 성경은 더 실감나게 번역했다.

마침내는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갔습니다.”

베드로와 바나바 둘 중에 누구에게 더 실망한 것일까?

 

이방인들을 위해 2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이런 바나바의 위선적인 모습으로 어떻게 복음을 전할까? 믿는 대로 살지 않는 바나바의 모습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마가의 동행문제에 서로 이견을 보였다. 나중에는 신학적 논쟁과 언쟁으로 번졌다. 그리고 마침내 서로 심하게 다투어 갈라서게 됐다.

 

세월이 지나니 바울은 바나바를 이해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유익한 것이 아니다.’라는 인생의 모습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말과 논리로 말하자면 못할 것이 없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인식과 이해가 다르기 때문에 괜한 오해와 불필요할 시시비비가 가려짐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을 숱하게 목격했다.

 

성내고 언쟁을 하게 되고, 말로 상대방을 굴복시키고 이긴다고 해도, 이기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시간이 들고, 나이가 들자, 그리고 숱한 고난의 현장을 목격하고 경험하자, 그에게 참고 인내하며 너그럽게 승리하는 참 비결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

 

그가 이 말을 깨닫고 편지하기까지 그의 변화를 생각해보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전8:13)

 

베드로나 바나바의 행동은 처세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때 예루살렘 회의직후에 생각이 후퇴하거나 외식했던 것이 아니라,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려고, 괜한 분란거리를 만들지 않으려는 나름대로 자리를 피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이렇게 행동을 한다면, 얼마나 이중적이고 위선적이게 보일 수 있을까? 그러나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9:23)

 

그는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내려놓고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바나바와 다투었던 일을 후회하고,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경험들 때문에 그는 더 성숙됐다. 바울은 혹시 자기 같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아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까지 한다.

 

여러분 말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성내고 언성을 높이고 언쟁을 해서라도 끝까지 해야 한다. 사회, 공동체, 아니 가정에서, 자녀에게, 누군가에게. 그러나 그것이 자칫 성내는 것으로 비춰지고 언쟁과 논쟁으로 번진다면, 차라리 삼가라.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

 

바울의 목회경험 때문에 그는 디모데에게 두 번의 편지 모두에 이와 관련된 말을 언급한다.

 

딤전6:20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딤후2:23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그러고 보니까, 오늘은 종교개혁 500주년 되는 기념주일이다.

종교개혁 다섯 가지 신앙고백 ①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솔라 스크립투라) ②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솔라 크리스투스) ③ 오직 은혜(Sola Gratia; 솔라 그라티아) ④ 오직 믿음(Sola Fide; 솔라 피데) 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Soli Deo Gloria; 솔라 데오 글로리아)

 

예루살렘 회의결과와 정신을 생각해보자.

 

덕을 세우기 위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참고 견디고 사랑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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