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30일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하나님, 오늘 아름다운 가을의 빛깔이 온 세계를 수놓는 계절에,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단풍과 낙엽이 함께 어울려 가을을 노래하는 것처럼, 주님을 예배하며 찬송하는 우리 모두에게 어울림의 은총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품에서 진정한 안식을 누리고자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두려움과 불안 대신 희망과 사랑이 채워지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이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말3:17-18)

 

  1. 하박국

하박국은 누구인가? v.1:1에 예언자로 알려져 있을 뿐, 이에 대한 단서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외경이나 위경 속에서는 이 이름이 많이 등장한다. 한 곳을 예로 들어보자. “Bel & The Dragon”이라는 기원전 2세기경에 쓰인 책이 있다. 다니엘서의 부록으로 쓰여졌다. 여기서 하박국은 ‘추수하는 일꾼’들에게 고기와 야채 스프를 주기 위해 들판으로 나가려던 참이었다. 그때 한 천사가 나타난다. 다니엘이 사자의 굴속에 있으니 가져다주라고 한다. 그는 바벨론에 가본적도 없고, 그 사자굴이 어디있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러자 천사가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하박국을 들어 올려 사자굴에 내려놓는다. 다니엘이 다 먹고 난 뒤에 천사는 다시 제자리에 데려다 주었다.

여기서의 하박국과 선지자 하박국을 동일인물이라고 연결지을 수는 없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유는, 그 이름이 갖는 뉘앙스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 이름을 명명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고 뜻이 있다. 하브크(hbk). 이 뜻은 “포옹하다. 감싸다. 이해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난의 시대에 그 백성을 감싸 안으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성심으로 도와주며, 운명을 같이 하던 예언자라는 인상을 우리에게 준다.

세상에서 권력가가 아무리 횡포를 부리고 전횡을 일삼아도, 그에 부역하는 사람들은 아첨과 궤변으로 그를 감싸고돈다. 그런데 예언자는 권력자가 아니라 오히려 상실의 시대를 살고, 고통과 괴로움에 빠져있는 백성들을 이해하며 감싼다. 백성의 아픔을 먼저 보듬으려고 한다.

 

그러고 보면 Bel & the Dragon에서 하나님의 부탁을 수행하는 자로 하박국의 이름을 쓴 것은 괜한 것이 아닌 것 같아 보인다. 고난 받는 자를 감싸고 보듬는 예언자, 오늘 우리가 예수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모해야할 덕목이 아닐까?

 

 

 

  1. 탄식과 믿음

1:3-4을 보라.

 

거짓 선지자들은 이런 탄식을 내놓지 않는다. 그저 국가의 조찬모임이나 행사에 참석해서 바알과 아세라 우상이 가득한데도, 뭔가를 칭송하기에 바쁘다. 그리고 “평강하다, 평강하다.” 말한다. ‘구국’이라는 명분으로 국가 행사에 동원되고 우상으로 채워진 권력을 축복하기에 이른다.

물론 전쟁, 기근, 국가의 심각한 위기 앞에 ‘구국’을 위해 기도해야겠지만, 전제는 참다운 회개와, 그리고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참 선지자는 역사와 상황에 대한 사태를 정확히 보고 탄식한다.

 

v.1:13을 보라. 13절은 하박국의 두 번째 탄식이다.

 

그렇다면 탄식하고 문제제기를 잘하고 비판을 하는 선지자는 참 선지자란 말인가? 신천지를 비롯한 이단들이 이런 것을 잘함으로 기성교단의 교인들을 현혹하고 유인한다고 한다. 그리고 잘못된 길로 빠지게 만든다.

참 선지자와 믿음의 사람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있다. 3:17-18을 보라.

 

바라는 문제, 삶의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많은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는 현실일지라도 그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한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 갖겠다는 결단이다.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소망을 얻었고, 이길 힘을 얻었다는 고백이다. 주님은 오늘 우리가 믿음으로 소망을 얻고, – 보여서 믿는 게 아니라, 믿어서 보임을 알고, – 어려운 현실 가운데에서도 소망의 기쁨으로 이겨낼 만한 확신을 갖기를 바라신다.

 

 

  1. 정녕 이루리라.

오늘 말씀은 탄식하던 하박국에게 소망의 비결을 일깨워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박국은 파수하는 곳과 성루에 서겠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비정상이 정상이 되고, 정상이 비정상이 되며, 악인들이 더 잘되는 것에 대해서, 뭐라고 응답하시고 역사하시는지 똑똑히 보겠다고 말한다.

 

2:3은 그러한 그에게 하나님께서 똑똑히 들려주시는 말씀이다. 2절에는 달려가면서도 명백히 읽을 수 있도록 판에 새기라고 말씀한다. 자,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판에 새기고 확신을 더하시기 바란다.

 

1) 정한 때가 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이 없으시다. 이루어지지 않고, 성취되지 않는 것 같지만 아니다.

 

3절 상반절을 보면 “정한 때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appointed time.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모세는 구약의 대표 인물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대표하고, 모세는 율법을 대표한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이삭을 낳았다. 자녀에 대한 축복이 늦어지자 스스로 하갈을 취해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랄 수 없는 중에, 이삭을 갖게 하셨다. 왜 진작 이삭을 주시지 않고, 이스마엘이라는 인간의 방편을 택하게 하셨을까?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이루어짐으로 인간의 공로와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과 약속에 대한 믿음이 중요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appointed time) 이루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아름다운 섭리로 빛나게 하셨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 자랐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40세, 개인의 능력이 최고의 정점에 달했을 때, 모세를 사용하셔서 히브리인들을 출애굽시킬 것 같았다. 그때가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역사하시기 가장 좋은 때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의 때였을 뿐이다. 광야로 도피해서 40년의 시간을 지내고 그는 이미 애굽의 왕자라는 신분을 잃었다. 인간의 힘과 능력이 사라졌다. 그 뒤에 어떻게 하시려고 이 때가지도 하나님은 가만히 두셨을까?

모세가 80세가 되어서야, 하나님께서 바로왕에게 가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때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였다. 그 당시의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구원의 정점이 찾아왔다. 우리가 이점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만약 모세가 광야에 대한 경험을 갖고 거기서 훈련되지 않았더라면 출애굽 이후에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붙들어 사용하는 지팡이가 될 수 있었을까? 누구보다 광야를 잘 이해하고 알았기에, 광야의 인생에 놓인 백성을 인도하는 주님의 지팡이가 될 수 있었다. 모세 능력의 정점은 그의 나이 40세였는지 모르겠지만, 구원의 정점은 모세 나이 80세였다. 하나님은 이것을 생각하고 계셨고 섭리하고 계셨다.

 

2) 약속의 성취

3절의 중반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오늘 세상에 벌어지는 일을 통해서 우리가 이런 것을 보고 있는 것 아닌가? 현대판 이세벨의 농간에 국가가 농락을 당하고, 그 속에서 의로운 사람이 삼킴을 당하는데도, 어찌 가만히 계십니까, 하박국의 탄식과 같은 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왔었다. 그러나 아주 사소한 말에서부터 실체가 드러나고 퍼즐이 맞춰져서 명백해지며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되지 아니한 것을 우리가 보고 있다. 수많은 함마질에도 불구하고 전혀 깨질 수 없을 것 같은 큰 돌멩이도 어느새 한 순간 쫙 갈라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섭리와 나라와 약속은 한 순간 속히 이루어진다.

 

우리의 일상과 삶의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의 고난이 쉬 사라지지 않는다고 괴로운가? 가정에서, 삶의 자리에서 자신의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고 낙심하는가? 자녀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면서, 건강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면서, 여러 가지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하면서도, 길이 보이지 않고,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아 믿음이 약해지는가? 그러나 여러분 3절 하반절에 “더딜지라도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담대한 믿음과 용기를 가지시기 바란다.

 

하나님의 정한 때가 반드시 이루어짐에 대해 확신을 갖기를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바라신다. 우리가 그것을 믿고 하박국3:17-18절처럼 기쁨의 노래가 있기를 바란다. 우리의 상황이 여전할지라도, 또 내 뜻과 내 맘대로 하지 않으실지라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와 기쁨이 넘치길 축원한다.

 

3) 기다리라

이런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것을 요청을 하신다. 무엇일까? 하나님께 탄식하던 하박국에게 하나님께서 이것을 배우라고 하신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기다림’을 배우라는 것이다. 그가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고, 의롭고 옳아도, 행동하는 실천력과 희생과 헌신을 다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기다릴 줄 아는 인내와 믿음을 배우라고 지시하신다. 하나님의 정점이 있기 때문이다.

 

다윗은 이새의 막내였다. 들에서 목동 일을 하다가, 사무엘이 불러오라는 말에 달려왔다. 하나님은 그에게서 한 왕을 보았다고 말씀하시고 기름을 붓게 하셨다. 무엇을 보고 그러셨던가? 키인가? 외모인가? 능력인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신다고 말씀하신다. 그 심령 중심에 하나님이 계신 이는 이미 왕이다.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니 그는 골리앗도 쓰러뜨렸다.

그런데 그를 더 위대하게 만들었던 것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오늘 주어진 삶에 충실했다. 그를 계속적으로 어려움에 빠뜨리는 사울에게 보복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판단과 심판을 기다렸다. 나발에게 멸시를 당해, 그 가문을 완전히 멸절시키고 싶었지만, 나중에 왕이 될 것을 믿고 참고 인내했다.

때가 오니 그는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반역을 한 것도 아니었고, 사울의 나라를 빼앗거나 억지로 된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은 왕성하게 하셨지만, 사울의 가문은 수많은 좋은 여건과 상황에도 불구하고 점점 가물어 쇠락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 하심으로 그 나라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리라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누구나와 함께 하길 원하시지만, 그 중심에 하나님을 둔자여야 진정으로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때’를, 믿음으로 기도하며 기다려 나쁠 것 하나 없다. 참는 것, 인내하는 것은 후회함이 없지만, 기다리지 못하고 참지 못한 것은 꼭 후회하게 된다.

 

요셉은 억울한 누명으로 감옥 갇혔다. 거기서 큰 공을 세웠다. 술맡은 관원장이 풀려나서 그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감옥에서 나오게 해줄줄만 알았다. 그러나 그는 잊혀지고 말았다. 얼마나 큰 낙심과 실망이 찾아왔을까? 그런데 그 시간까지도 참고 인내해야 했다. 억울함과 절망을 견뎌야 했다. 아무런 변화도 없고 기회의 가능성도 없는 막막한 시간이 무한정 흘렀다. 그런데 하나님은 2년 후에 요셉을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로 사용하셨다.

 

사람의 생각이 하나님을 앞질러가지 않도록 기다려라.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다 깨닫기도 전에, 사람의 생각을 앞세우지 않도록 기다려라.

하나님의 ‘정한 때’, ‘시간’이 임하기도 전에, 먼저 왔다가 지나치지 않도록 기다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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