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23일 성령강림절후 23주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하나님, 오늘 뜻 깊은 종교개혁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단풍과 낙엽이 함께 어울려 가을을 노래하는 계절에, 주님의 품에서 진정한 안식을 누리고자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불안과 불평 대신 희망과 사랑이 채워지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12:12)

 

만민에게 부어주리라(요엘2:28-32)

 

  • 우리를 부르신 힘과 능력의 주님

시험과 환난을 만났을 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무엇인줄 아는가? 누구나 시험과 환난을 겪는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것을 이길 만한 힘과 능력이 없을 때이다. 어떻게 해야하는지 지혜와 용기가 있다면, 시험이 찾아오고 환난이 찾아오나,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래서 야고보서는 누구든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고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말씀한다. 그러기에 시험까지도 기쁘게 여길 수 있다고 우리를 다독거린다.

 

오늘 말씀은 절망하며 신음하는 백성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때로는 힘에 부친 삶의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하나님의 능력과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1. 요엘시대의 환난

요엘시대의 환난을 보자. 첫 번째로 메뚜기의 재앙이었다. 농부들이 열심히 농사를 했는데, 갑자기 몰려온 메뚜기 떼로 인해, 추수할 것이 없게 됐다. 그 심각성이 이루 말할 수 없다.

 

“팥중이가 남긴 것은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은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욜1:4)

 

설상가상으로 극심한 가뭄이 찾아왔다.

 

“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마르니 곡식이 떨어지며,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10)

 

2차 농작물이라고 할 수 있는 포도, 무화과, 석류, 대추, 사과할 것 없이 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어버리고 말랐다.

 

이전에도 자연재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식량문제는 한 사회의 큰 혼란을 초래한다. 생존의 기반을 흔든다. 게다가, 기호식품은 삶의 만족도를 높여준다. 사회적인 윤활유 같은 역할도 한다. ‘새 포도주’가 말랐다는 것은 기호식품을 찾기 어렵게 됐다는 것이다. 사회적인 금단현상이 발생한다. 그래서 1장 5절에서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이는 단 포도주가 너희 입에서 끊어졌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현실이 한두 해로 끝날 것 같지 않다. 씨앗을 심는데, 흙덩이 아래에서 그대로 썩어버린다(1:17). 가축들이 울부짖고 소 떼가 소란을 피운다. 마치 불이 온 세상을 태워버린 것 같게 되었고, 전 국토에 내린 자연재해가 되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치명적인 화상을 입은 것처럼 심각했다.

 

여러 해 식량을 비축해두었던 곳간도 텅텅 비었다. 심지어 하나님 앞에 소제와 전제로 드릴 모든 것들이 동났고, ‘여호와의 성전에서 끊어졌다.’고 말한다. 얼마나 어렵게 되었으면?

사정이 이러한데, 더 심각한 위기가 있었다. 외국 군대가 쳐들어왔다. 마치 메뚜기 떼를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침략으로 나라는 초토화가 됐다. 2장 4절부터 11절은 그 군대가 얼마나 잘 훈련된 군사들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7절에,

 

“그들이 용사 같이 달리며 무사 같이 성을 기어오르며 각기 자기 길로 나아가되 그 줄을 이탈하지 아니하며.”

 

철저히 훈련된 군사들이 착착 군화발소리를 내며 무서운 기세로 침략해왔다.

이 시대에 귀 기울이다 보면 이런 소리가 들려온다. 짓밟히고 상처받고, 절망한 심령들의 탄식과 절규소리를 말이다.

 

저는 원인은 다르지만 오늘날도 상한 심령들의 탄식과 절규들이 도처에서 들려오는 것을 듣는다. 마음에 상처를 입고 삶의 기반이 흔들리고 위태로움에서 오는 통곡소리는 비슷하다.

 

 

  1. 절망에 휩싸인 백성

이 백성의 희망은 어디서 일어날까? 어찌해야 하는가?

 

개인만의 위기는 그나마 괜찮다. 사람에게는 자비심이라는 게 있어서, 누군가의 딱한 사정을 보면 온정의 손길을 보내기 마련이다. 그런데 사회적인 위기는 어떤가? 다들 어려워서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다.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다. 사람들의 마음은 인색해지고 무정해지고 각박해진다.

 

아람왕 벤하닷이 사마리아를 에워싸고 성으로 들어가는 물과 양식을 모두 차단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성 안은 자급자족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귀 머리(가장 맛없는 음식_평소에는 줘도 안먹음)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의 비싼 가격에 팔렸고 비둘기 똥(요세푸스는 음식 소금 대신 사용됐다고 함)이라고 불리는 것이 1/4 갑에 다섯 세겔이나 했다고 전한다.

더 큰 비극은 이웃의 꾐에 넘어가 자식을 잡아먹는 일까지 생겼다. 열왕기하 6장 말미에 이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데, 너무나 비참해서 차마 입에 올리지도 못하겠다.

예수님 당시, 로마체제 아래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소개한 바 있다. 실물경제체제에서 화폐경제체제로 변화하면서, 여기에 적응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앉은 자리에서 코를 베이는 일들이 벌어졌다. 고이율의 대부업과 세금, 그리고 수탈로 인해 서민경제는 황폐해졌고, 작은 땅이라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소작농은 날품팔이로, 그래도 안되면, 자녀를 종으로 팔거나, 윤락녀로 내몰 수밖에 없는 사태도 종종 발생했다.

가족을 먹여 살리려면 어쩔 수 있는가? 그런데 벤하닷의 군대에 둘러싸인 사마리아에서 자식을 잡아먹은 사건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오늘 우리 사회의 청년들과 어린이들이 ‘헬조선’이라는 용어로 이 시대를 표현하는 것을 보면, 우리의 현실이라고 다를까?

 

그러고 보면 비전을 가지고 살고, 꿈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그나마 얼마나 행복한 소리겠는가? 지금은 어렵더라도 그래도 희망이 있고 이상이 있어, 오늘을 견디고 이길 수 있다.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하고 부모는 같은 꿈을 꾸고, 청년들이 세속에 물들어 현실적이고 계산적이지 않고 순수하게 이상을 꾸어갈 수 있다면, 소박하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행복한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당시의 현실이 그렇지 못했다. 요엘은 한 마디로 이렇게 말한다.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요엘2:2)

 

 

  1. 요엘의 제안과 주님의 긍휼

요엘이 제안하는 것이 있다. 2장 12절-14절. 첫 번째는 같이 울자는 것이다. 애통해 하자고 한다. 그리고 다 같이 모여서 금식을 하는 것이다. 어차피 먹지 목하고 굶주린다. 차라리 금식하는 게 났지 않은가? 같이 우는 것은 공감과 연대의식을 높여준다. ‘나만 아니면 돼’라는 생각이나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서는 더 상황을 어렵게 만들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결국 파국을 맞고 만다.

주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차라리 애통해하면,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에 위로가 든다. 물론 더 큰 위로가 있지만 말이다.

 

두 번째는 마음을 찢자고 한다.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 옷을 찢는다는 것인 인간적인 혈기를 부리거나 화를 내거나 성질을 부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러나 ‘마음을 찢으라.’ 내가 변화돼야 한다. 하나님을 몰랐던 둔감한 마음을 도려내야 한다. 자기를 뉘우치고 반성해야 한다. 회개 말이다. 이러고 나면 경험하는 영적인 체험은 무엇인가? 마음이 청결해진다.

주님은 약속하셨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을 찢지 않으면, 하나님이라는 분이 보이지 않는다. 아시는가? 하나님을 보면, 그분의 능력도 보인다.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 어리석고 우둔한 사람은 혈기를 부린다. 그런데 지혜롭고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은 그 마음을 찢어버린다. 속상한 마음이 드는가? 옷을 찢지 말고 그 마음을 찢으라. 화가 올라오는가? 그 마음도 찢어버리라. 원망과 미움이 미칠 듯 나를 지배하는가? 그것도 찢어버리라. 자존심이 상해서 보복하고 싶은가? 그 마음도 찢으라.

옷을 아무리 찢어도 그 마음 그래도 가지고 있으면, 자기에게 칼이 되고 독이 되고, 자기를 망치는 것 모르는가? 그러기에 여러분 이 시간 그 마음을 찢기로 결단하라.

 

그런데 여러분, 이것을 결단하고 행하는 이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이것은 이미 교회와 세계의 역사를 통해 검증된 신앙의 원리이다.

 

먼저 29절부터, 잠깐 보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더글라스 스튜어트는, 이 대목을 “성령의 민주화”라고 명명한다. 폭력적인 차별과 불평등을 끊임없이 양산시켰던 종교와 정치, 사회의 부조를 여기서 비판하고 언급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주님의 은총은 누구에게나 풍성히 허락된다는 사실을 우선 마음에 새기라.

 

요엘이 제안하는 것, 마음을 찢고 금식하며 울고, 애통해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된다. 2장 18절을 보라.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의 땅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

 

21절에서부터 27절은 회복을 약속해주신다. 교독해보자.

1) 자연의 풀과 나무들이 다 자기에게 주어진 대로 힘을 발한다(22).

2) 이른비와 늦은비를 적당히 내리심으로 농사의 소출이 넘친다.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23).

3) 햇수대로 갚아주신다. 손해와 손실을 만회하게 하시고 풍족히 채워주신다.

4) 하나님의 백성이 당했던 수치가 끝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찬송받으신다.

 

종합하자면, 무엇이란 말인가? 주님의 은혜로 회복이 일어나고 힘을 내게 된다. 힘이나고 힘이나서 승리하게 된다.

 

 

  1. 만민에게 부어주리라

그렇다면, 28절에서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라.”는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 황홀경에 빠지고, 예언자가 되고, 너나 할 것 없이 다 선지자가 될 것이라는 말씀일까?

 

하나님께서 은혜의 영을 부어주시면 힘을 내게 돼있다.

여러분 오늘 고통 속에 힘드신가? 절망 가운데 있는가? 답답한 인생을 만났는가? 괴로움으로 울고 있는가? 하나님은 회복의 영을 여러분에게 부어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새 힘을 내기를 바라신다. 32절에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했다.

나에게는 방법이 없고 능력이 부족하여 안 될 것 같다. 지혜도 없고, 말주변도 없고, 상황대처능력도 없어서 하는 일마다 용기가 없고 자신이 없다. 그러나 안 될 것 같아도 된다.

오늘 우리의 시대가 어둡고 힘들다고 해도 주님으로 인하여 힘과 용기를 내라. 주님이 그 영을 부어주신다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자녀들이 미래를 말할 것이다. 그것을 듣는 부모의 마음은 흐뭇해질 것이다. 나이든 분들은 꿈을 꿀 것이다. 더 나은 내일에 대한 꿈으로 자녀세대에 축복하게 될 것이다. 젊은이들이 이상을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젊은이가 젊은이다워지는 것 아니겠는가?

 

베드로가 오순절날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선포했다.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베푸셨던 예수가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다. 십자가와 부활의 선포였다.

 

여러분 십자가의 죽음만한 ‘고통’과 ‘절망’과 ‘끝’이 어디 있는가? 하늘빛이 어둠으로 바뀌고 예수의 얼굴빛이 창백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망의 고통에서 예수를 풀어, 살리신 분이다. 어두운 하늘빛과 창백한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게 하셨고 살아있는 소망의 빛을 비추셨다. 바로 우리를 위해서 말이다. 오늘 예수님께서 그 능력의 빛으로 여러분에게 임하신다.

 

조창환 시인의 ‘하늘과 땅 사이에’라는 시가 떠올랐다. 감나무에 달린 까치밥을 보면서, 이렇게 노래한다.

 

“하늘과 땅 사이 아득하구나 // 홍시 같은 마음 하나 / 붉게 매달려 / 동짓날 예수처럼 / 떨고 있구나 / ”

 

어둠이 가장 길고 긴 동짓날이라는 시상으로 여러분의 현실을 바라보라. 예수님께서 붉은 홍시와 같이 십자가 위에서 아득함으로 떨고 있다. 조창환 시인이 말하는 ‘홍시 같은 마음 하나’란 무엇일까?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공중의 새에게까지도 먹을 것이 되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길 가던 나그네를 위해서까지도 준비된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까, “만민에게”라는 말이 새롭게 다가온다. 이 말을 다른 말로 말하면 이렇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까지도. 가장 낮고 천한 사람에게까지도. 큰 문제를 겪으면서 연약해질 때로 연약해진 이를 위해서도. 세상에서 상처와 아픔이 심해서 곪을 대로 곪은 사람까지도. 어느 누구하나 예외하거나 소외됨 없이.

 

 

‘마지막 날에~’ 찬양과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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