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21일 성령강림절 후 14주
여러분 모두를 환영하고 축복한다. 하나님은 여러분 모두의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실정과 상황이 그렇지 않은 것 같아보여도, 십자가 속에, 고난 속에, 부활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은총의 꽃이 숨어있음을 발견하길 바란다. 이 믿음으로 우리 인생을 이겨낼 수 있기를 주님께서 바라신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찌 됨인고”
탄식한다. 길르앗의 유향은 유명한 명약이다. 창상과 모든 피부병에 잘 듣는 약이었다. 치료제가 있고 의사가 있어도 백성의 상처를 고칠 수가 없다. 왜인가? 단순히 질병이 아니다. 백성들이 신음하고 고통을 받고 있다. 무엇 때문에?
사회,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부분에서 부패하고 죄악이 뿌리 깊다. 이것은 예레미야의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민감히 반응했던 선지자를 통해, 읽힌 하나님의 마음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병을 진단하고 아픈 것을 알면, 치유되고 회복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도 함께 따라온다.
슬프다고 하는 이유는 비극을 맞게 될 국가의 운명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평화와 생명이 위협받지 않는 세계 속에서 참된 존재로 살기를 바라신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참뜻이 죄악으로 붕괴되고 무너지는 현실 속에서, 파국을 맞이하고 비참한 참상을 겪게 될 인간상을 본 것이다.
오늘 우리의 현실을 보라. 단편적으로 손님은 구매력이 높을수록 왕이라는 가치가 팽배하고 그 속에서, 사람을 무릎 꿇리고 마는 비인간화 된 세상은 얼마나 불행인가? 가슴이 멍들고 심한 타격을 받는다.
예레미야는 사회와 국가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부조리와 불의를 보면서,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종교의 영역이었다. 한 사회의 최후의 보루여야 했던 성전 중심의 종교지도자들,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을 총망라해서 욕심과 거짓에 빠져있었다.
예레미야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꼭 그 백성을 딸이라고 표현한다),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한다. 그러나 평강이 없도다.”
당시 종교지도자들 역시 나름대로 백성들의 고통을 싸매고 치료한다고 했다. 외형적으로는 말이다. 위로하기 위해, 평강하다, 평강하다, 한다. 그러나 ‘왜 평강이 없도다.’라고 말하는 것일까? 상처를 가볍게 여기는 탓이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악한 일들을 주도면밀하게 살피지 못하는 탓도 있겠지만, 이런 영향이 크다.
종교적인 권력과 부요함, 그리고 그것을 가져다주는 성전체제의 편안함 속에 있기에, 백성들이 체감하는 고통을 살피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아라.”(렘7:4)
참람한 것은 단지, 성전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성전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실상은 인간의 욕심을 우상화하고 절대화했을 때,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도둑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단언하신다.(렘7:11)
- 신앙의 덫
이런 모습은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열여덟 해 동안 고통을 받았던 한 여인을 고쳐주신다. 귀신들려 앓았고, 여기저기 꼬부라지고 뒤틀린 사람이었다. 그를 보시고 부르셔서 낫게 하셨다.
참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일이다. 그런데, 회당장이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는 것 때문에, 분을 내고 있고, 안식일에는 이런 일을 하면 안된다고 무리들에게 말하고 있다. 회당장은 병든 사람의 치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안식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규정과 규칙에 얽매여 생명중심의 사고를 못하는 사람이다.
‘예레미야 때도 이런 식이었겠구나!’ 예레미야 때, 하나님의 기대가 무너지고 참뜻이 실종됐던 현실과 무엇이 다른가? 비록 성전과 회당은 역할과 기능이 다르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런 점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은 저편으로 잠식됐던 것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의 전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예배를 드리고, 주님의 보좌 앞에 감사함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첫째, 율법의 덫을 주의하라. 우리의 신앙생활도 율법의 덫에 걸리는 경우가 있다. 자기 신앙의 곤조나 고집, 생각, 경험과 지식으로 하나님을 믿으려 하다보면 율법주의에 빠지고 만다. 누군가를 정죄하고 판단하고 불평불만을 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경건의 모양은 있을지 모르지만 내용을 사라지고 만다.
둘째, 시기질투의 덫을 주의하라. 14절을 보면 회당장이 분을 품었다. 단순히 예수님께서 율법을 어겼다고 생각이 들어서가 아니라 시기질투였다. 무리에게 말한다.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판단력이 흐릿한 사람들에게는 회당장의 말이 그럴 듯하다. 오랜 세월 그렇게 배워왔을 것이다. 정말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믿었다면 예수님께 직접 말했을 텐데, 무리들에게 말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무리들이 예수님께 동조하면서, 권위있게 여길 것을 염두에 둔 나머지, 예수님의 행동을 간접적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시기질투하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일지라도 새 일을 행하시리라는 것(요5:17)을 생각지도 못한다.
시기질투는 이렇게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고 방해하게 된다. 역사의 오류와 불행은 이런 것 때문에 벌어졌고, 보다 더 나은 세상은 늘 제동이 걸려왔다.
셋째, 외식하는 덫을 주의하라. 외식하는 것은 주로 자기의 의로움을 드러내려하고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행동하는 것일 때가 많다. 그런데 이런 것도 있다. 자기에게는 관대하면서 타인에게는 엄격한 것! 자기가 하면 괜찮은 것이지만, 남이 하면 안 되는 것.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너희는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여기에는 누가가 들려주려고 하는 또 다른 의미가 있는데, 아무튼 자기 행동과 타인의 행동의 잣대가 다르다. 주님은 율법에 얽매여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외식하는 자(위선자)라고 말한다.
- 건강한 신앙
예레미야 때나, 예수님 때나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역사는 반복됐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주님은 오늘 우리를 통해서 그 반복된 역사를 그치고, 정말 복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바라신다. 그 일에 쓰임받고자 우리를 부르셨다.
그렇다면 주님은 우리가 어떤 믿음과 신앙으로 살기를 바라실까? 주님 안에서 회복, 치유, 새힘을 얻고 강건하려면 우리가 사모해야 할 믿음은 무엇일까?
첫째, 우리가 자유하게 되길 원하시는 주님을 믿으라.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12) 이 놓였다는 말은 ‘아포루오’라는 말이다. 그런데 15절,
“외양간에서 풀어내어”에서 풀어내다는 ‘루오’라는 말이다. 누가가 이렇게 풀어내다, 놓다, 해방시키다는 말을 중복해서 사용하는 이유는 누가복음4장 18절~19절 이사야의 글을 읽으면서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는 말씀과 연관을 지어 읽어야 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에게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가난에서 놓이고, 포로됨에서 풀려나며, 눈 어두워 인생길 모르는 어둠이 밝아지고, 눌린 자가 자유케 되길 바라신다. 주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믿고 순종하는 이에게 하나님은 ‘자유함’을 선물로 주신다.
둘째, 누구라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존중받기를 원하신다.
‘아브라함의 딸’이라는 표현. 사람들은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자손’,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익숙하고 친숙한 표현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딸’은 낯설다. ‘아브라함의 자손, 아들’이라는 특정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만 사랑하신다고 생각했을 텐데, 주님은 ‘아브라함의 딸’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18년 동안 귀신에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서, 여자 하나까지도 그 대상에 포함된다고 선포하고 계시다. 천대 받던 미천한 사람을 그 귀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우리가 건강한 세상을 만들어가고 건강하게 사는 것은 다름 아니다. 사랑하고 존중하고 존중받으면서 사는 것이다. ‘민중은 개나 돼지’와 다를 바 없다는 취급받아서 우리가 병들고 상하게 되는 것 아닌가? 있다고 해서 대접받고, 없다고 해서 무시당해서 다들 세상을 폭력적으로 경험하게 되고 상처받지 않는가?
셋째, 주님의 일이 얼마나 기쁘고 보람있는 일인 줄을 깨닫고 믿음으로 실천하라. 17절을 보면 어떤 무리들은 부끄러움을 느꼈고, 어떤 이들은 주님의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했다. 누군가가 예수의 이름으로 고침받고 회복되며 치유되어 강건케 됨이 얼마나 보람있는 일인지를 체험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이 바라신다.
아무리 세상적인 기쁨과 재미가 즐겁고 행복하게 만든다고 해도, 보람과 의미를 찾지 못하여, 나중에는 재미없어지지 않는가? 그러나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그래서 고난까지도 견디고 마침내 승리하는 일은 우리에게, 인생에서 사는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