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7일 성령강림절 후 12 주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신 사랑의 하나님, 8월의 첫 번째 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찌는 덧 한 더위로 온 대지가 타들어가는 계절에, 주님 안에서 쉼을 얻을 수 있는 시원한 사랑을 바라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나태해진 심령에 귀한 은사가 넘실대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의 처음과 나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표니(히2:3)

 

 

  1. 통학버스에 갇혔던 어린이

광주에서 통학버스에 갇혀 의식불명이 된 아이의 사건, 아신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아이들에게 이렇게 안전교육을 해야 한다는 어떤 아빠의 글이 SNS에 올라왔다. 당국자들이 내놓은 대비책이나 장황한 매뉴얼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아이에게 클랙슨(경적)을 울리게 하는 것이다. 시동이 꺼져도 클랙슨은 울릴 수 있으니까, 누군가 와서 도와줄 때까지 울리도록 하면 된다. 아이에게 도와달라고 소리치라고 해봐야, 소리가 들리지 않을테니, 별 소용이 없다.

 

수지에게, 어린이집 갈 때, 이 내용을 가르쳐줬다. 어린이집에서 올 때, 비슷한 상황을 만들어봤다. 수지를 차에 두고, 리모콘(띡띡이)로 문을 잠그고 자리를 피했다. 금방 차 앞으로 가더니, 경적을 울렸다.

 

김수한무거북이와두루미삼천갑자동방삭(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치치카포 사리사리센타~ 워리워리 새프리카~무두셀라 구름이~ 허리케인 담벼락~ 서생원에 고양이~ 바둑이는 돌돌이) 그 이름을 대다가 아이가 물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장황함이란 게 위급상황에서는 이렇다. 쉽고 간단해야 한다.

 

아이가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것 같은데, 빨리 의식을 되찾기를 기원한다.

 

 

  1.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광주에 다녀올 예정이다. 가서 위로라도 하고, 기도라도 하고 와야겠다. 그 부모와 가족이 참 힘들고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텐데, 누군가 기도하고 있고 힘을 내길 바라고 있다는 메시지를 들으면, 그래도 용기를 낼 것 같다. 갈릴리로 먼저 달려가시겠다고 하신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곳에 함께 계심을 믿는다.

 

세월호 사건 때, 한 번도 팽목항을 찾아가거나, 안산을 찾아서 추모하지도 않았는데, 그 먼데까지, 유별난 행동은 아닌지도 생각했다. 그래도 이대로 있으면 안된다는 확신이 자꾸만 든다.

 

우리 주변에 참담한 일들이 너무나 많이 벌어져서, 으레 그러려니 하고 넋놓고 있다가는 우리의 영혼이 상한 심령을 위로치 못하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 괴물로 변할 것만 같다.

세계 도처에서 테러가 벌어지고 있고, 폭력이 평화로운 일상을 잠식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너무 무력한 것은 아닐까? 세상이 어두워지고 있고 불의와 부패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우리도 동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삭막해졌다고 해도,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주님의 이름으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우리의 최소한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한다.

 

말로만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고 할 것이 아니라,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할 수 있는 데서부터 그 사랑을 실천하고 헌신하고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1. 외면하고 방관하는 죄의 결과

성주 군민들이 ‘사드’에 반대한다고 관청 앞에서 촛불집회를 하는 동안 어느 아주머니의 말이 뇌리에 남았다. 성주시민들은 86%정도가 여당과 대통령을 지지하는데, 어느날 하루 아침에 자신들을 종북이라고 하고, 외부의 불온한 세력과 결탁하거나 잠식당했다고 매도하더라는 것이다. 자신은 성주로 시집을 왔지만 뼛속깊이 경상도사람이고 평범한 소시민에 불과한데, 자신에게 외부세력이라는 딱지를 붙이더니, 불온한 세력으로 혐의를 두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성주 군민 모두가 반성해야 한다고, 자업자득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세월호 유가족을 이런 식으로 매도하고 고립시켰고, 밀양의 송전탑 문제에 대해서 자신들은 상관하지 않거나 외면했고, 아니 불온한 세력으로 여겼었고, 제주 해군기지 건설로 설 땅을 잃은 강정마을 주민들의 외침도 무시하거나 지역이기주의 때문이라고, 앞장서서 종북이라고 매도했는데, 그 죗값을 자신들이 톡톡히 받는 거라고 했다.

 

 

  1. 사람 앞에서 주를 시인하면

왜 돌보고 위로하며 복음을 증거해야 하는가? 그러기 위해서 광주에 다녀와야 하는가? 이런 경각심이 들었다.

 

마태복음10장 32-33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단순히 ‘나는 예수 믿소.’하는 말로 고백하는 것일까? 주님은 사람이 두려워서 생명을 구하고 살리는 일에 주저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신다. 목숨을 살리고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왜 주저하고 사람을 두려워할까? 이권이 개입되면 그렇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눈 먼 자의 눈을 뜨게 하셨을 때, 사람들이 바리새인이 두려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시인하고 동조하지 못한다. 요한복음은 출교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한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마10:28)

 

사람 앞에서 주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단순히 ‘나는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소!’ 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내가 주릴 때, 목마를 때, 나그네 되었을 때, 헐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 주님을 돌봐준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았던 사람이 있다고 양과 염소를 들어 말씀하고 있다. 양쪽 다 평소에 ‘나는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소!’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양으로 구분된 이들은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을 돌보았습니까?’ 묻는다.

염소로 구분된 이들은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을 돌보지 않았습니까?’ 반문한다.

 

언제인가?

 

‘여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누군가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돕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 일을 만났을 때, 주님께서 ‘도무지 너를 알지 못하겠다.’고 말씀하시면 어쩌겠는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일하시기도 하는데,

아무도 돕는 사람이 없고, 도와줄 사람이 없다. 억울하고 원통한 일에 대한, 사람들의 무관심과 외면 만큼 괴로운 것이 없다.

 

 

  1. 그들이 처음 왔을 때

니묄러 목사님의 글이 생각났다. 독일 기독교인들이 나찌를 지지하고 동조하고 있을 때, 나찌에 협력하기를 거부하고, 바른 믿음을 견지하려고 했던 고백교회(디트리히트 본회퍼)의 지도자 가운데 한 분이시다.

 

이스라엘이 선지자를 핍박했던 것처럼,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팔아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고 이익을 중시했던 것처럼 중세 가톨릭교회가 예수님을 팔아 욕심을 채우고 있었다. 스데반이 유대당국자들 앞에서 선조들이 죄악을 범했던 것처럼 바로 당신들도 똑 같은 일을 저지르고 있소, 라고 했다가 처형을 당했는데, 바로 독일의 교회가 그와 같은 일을 똑같이 하고 있었다.

 

구약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은 듣기 싫으니 자신들이 듣기 좋은 소리만 하라고 선지자들의 입을 막으려고 했을 때, 베드로는 ‘하나님을 좋게 하랴, 사람을 좋게 하랴.’ 당신들이 그 옛날 잘못을 저질렀던 선조들과 똑 같은 사람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독일교회가 히틀러를 지지하고 똑같은 죄악을 반복하고 있을 때, 디트리히트 본회퍼나 니묄러 목사님 같은 분들은, 그 위협에 굴하지 않고, ‘아니오.’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니묄러 목사님은 젝센하우젠에 수감됐다. 이곳은, 1936년 평화의 제전인 베를린 올림픽이 열려 전세계 젊은이들이 실력을 겨루기 위해 집결하던 그때(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때가 이때다), 나찌는 정치범, 양심수, 사회부적응자, 전과자, 동성애자, 여호와의 증인, 집시들을 가두기 위해 대규모 수용소를 만들었다. 나중에 유태인을 대량으로 끔찍한 학살을 자행하는 곳으로 사용했다. 악마적인 인권유린이었지만 사람들 사이에 혐오감을 확산시키고 대량학살을 정당한 것으로 여기게 했다. 당시 교인들은 이러한 나찌에 동조하고 방관하고 부역함으로써, 히틀러라는 악마를 탄생시켰다.

 

마틴 니묄러 목사님의 유명한 시, ‘처음 그들이 왔을 때’

 

그들이 처음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가 아니었기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유대인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내게 왔을 때, 그때는 더 이상 나를 위해

말해줄 이가 아무도 없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배은망덕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을 하고, 그래도 그를 용서하고 따뜻하게 대해주려고 하는데, 보고도 못 본 척 하거나 모르는 척 한다고 생각해보라. 필요가 없어지니까 안중에 없다고 생각해보라. 나중에 정말 그가 어떤 큰 어려움을 만나고 나를 필요로 하고 도움을 청한다고 가정을 해보면, 주님의 이런 말씀이 우리에게 경고처럼 들려오지 않는가?

 

우리가 지금 돌볼 사람, 위로할 사람, 품어야 할 사람,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 고난당하는 자를 외면하여, 우리가, 자기 자신이 그 고통을 당하거나 어려움을 처해도, 아무도 도와줄 사람을 찾을 수 없다면, 자업자득 아니겠는가?

 

  1. 주님을 시인하며 사는 것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이기심으로 잘 사는 것이 아니다. 이타심으로 잘 사는 것이다. 누군가를 정죄하고 미워하고 혐오하는 것으로 안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함으로 평강한 삶을 사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멋진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셨다.

 

우리와 직접적인 상관도 없는데, 주변에서 누군가 돕겠지 하는 마음도 주님 원하시는 마음이 아니다. 천사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먼저 갈릴리로 가셨고, 거기서 뵈오리라고 전해주었다. 그러니까, 고난의 자리, 섬김의 자리, 보살핌의 자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은혜의 자리이다.

나도 힘들고 어려운데, 어떻게 그럴 겨를이 있느냐고 말할 수 있지만, 주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려고 할 때, 주님께서 채우시고 복주시고 상주심을 믿으라.

 

잠언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흩어 구제 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야겨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잠11:24-25)

 

누가복음16장의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는 그 해석이 난해한 내용인데, 이런 맥락속에서 이해하면 깨달아지는 말씀이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눅16:9)

 

불의한 세상 속에서,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적더라도, 작더라도,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이웃을 섬기려고 할 때, 주님은 잘했다고 칭찬하신다. 그리고 보람과 행복을 느끼게 된다.

 

이 마음을 품고 있는데, 금요일 밤에 전화가 왔다. 10월에 서울남연회에서 주관하는 컨퍼런스가 있는데, 강연자로 섭외하고 싶다는 연락이었다. 비전교회 지원의 1차 선정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선정되지 않아도, 괜찮다. 그러나 이것을 깨달았다. 주님은 선한 마음, 예수님을 따라 살려는 마음,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는 자의 마음과 중심을 미리 아시고 달아보신다는 것이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보다 못한 목숨일지라도 주님은 그 머리털까지도 귀하게 여기셔서 세실 만큼 사랑하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 사랑을 전하고 실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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