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31일 성림강림절 후 11주

 

죄인들을 불러서 거룩하게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오늘 복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곳곳에서 아픔과 상처를 당한 이웃들의 고통 때문에 온 국민의 마음이 무거워져 있는 때에, 주님께서 펼치실 치유의 역사를 소망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닫혔던 마음이 열리고 상심한 마음이 위로 받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레 하시리라.(베전5:10)

 

 

1.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길 축원한다.

 

한 주간 무더위에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는가?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셨다. 이 시간 조금이나마 주님 안에서 쉼을 청하고 힘을 얻으시기 바란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이것도 주님 앞에 죄송할 뿐이다. 세계 도처에서 일어난 테러와 수많은 무고한 죽음으로, 애도의 시간도 다 채우지 못했는데, 우리의 영혼이 제자리를 찾기도 전에, 또다시 터지는 테러와 전쟁으로 폭력으로 인해, 우리가 정말 이것에 대해서 무감각해지는 괴물로 변하고 있는 것 같다.

 

어제 뉴스를 보셨겠지만, 4살짜리 아이가 통학버스에 8시간 동안 갇혀 있다가 발견돼 의식이 없다는 소식을 접했다. 안타까움을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저는 이것이 우리의 자화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자유주의, 신냉전시대의 꽉 막힌 세계 속에 갇혀서 탈진해가는 인간상. 인간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없어 보인다. 발버둥 쳐도 소용없어 보인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죄악 때문임을 하나님께 고백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영혼이 괴물이 될 것만 같을 때, 오늘 우리가 수련회를 간다. 단순히 놀러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심신을 회복하고 돌아와 더 주님의 일을 잘 섬길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와중에 성서일과의 말씀을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음성을 들려주신다. 이 음성이 너무나 크게 들려온다. 바리새인의 누룩이란 무엇일까? 세속적인 권세와 부와 명예에 대한 욕망이자, 세계를 부패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자, 세계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를 복된 길로 부르시기 위해, 주님은 왜 이 음성을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지, 살펴보자.

 

 

2.

이것을 아는가? 결혼식이나 어떤 기념식을 하고 나면 케이크커팅을 한다. 그 유래는? 일본 오사카 대학 교수인 가와기타 미노루는 이렇게 설명한다. 과거에 설탕은 터무니없이 비쌌다. 국왕이나 귀족들이 파티에 설탕으로 만든 데코레이션을 장식했다. 그럼으로써 그 부와 권력을 나타내려 했다. 나중에는 그 설탕 데코레이션을 부숴서 참석자들이 나눠먹었다고 한다(설탕의 역사, 71).

 

미노루 교수는 계속 설명한다. 영국의 근대사는 설탕을 얻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바꾸어온 역사라고 말이다. 사탕수수를 재배할 광활한 정복지가 필요로 했고, 거기서 일할 노동력을 얻기 위해 노예산업을 성장시켜 갔다. 아프리카인들은 짐승 사냥하듯 유린당했다. 그는 심지어 근세의 불행한 역사는 이 설탕 때문에 벌어진, 피로 얼룩진 역사라고 말한다.

 

고품격의 신분을 상징했던 설탕을 일반 사람들도 쉽게 먹을 수 있었고, 홍차와 곁들여 먹음으로써 고상한 문화를 누린다고 생각했다. 영국신사, 플랜티어들은 영국의 젠틀맨이 되기를 소망했다.

 

미노루 교수가 특이하게 주목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에게는 굉장히 친숙한 이름이다. 영국 시민사회가 설탕을 얻음으로 잘살게 되었다고 부요하게 되었다고, 그래서 노예사냥과 그 산업은 우리에게 유익하고 좋은 것이라고 선전하고 있을 때, ‘아니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설탕을 즐기는 것을 부정적으로 여겼다. 그것을 먹기 위해, 사회와 세계 이면에서 벌어지는 불의를 통찰하고 있었다. 수많은 노예들의 희생의 대가였다. 모두가 잘 살게 되었다고, 영국의 신사가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처럼 여기며, 노예산업의 경제적인 효과 때문에 모두가 옳게 여길 때, 이들은 유독 그것에 비판적이고 반대했다. 누군가? 존 웨슬리와 감리교인들이었다는 것이다.

감옥에 갇힌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회적인 약자와 가난한 사람,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보살폈다. 말로만 신앙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아니라 경건과 실천으로 산업혁명의 그늘에 가려진 부조리를 보듬어 내기 위해 희생과 헌신을 불살랐던 자랑스러운 전통위에 감리교가 서있다.

 

이러한 신앙적인 행동 때문에 어려움도 많이 겪었다. 이들에게 영국신사가 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 더 큰 목표가 있었다. 인간의 죄악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자녀가 되는 것이다. 노예산업을 정당화하기 위해 어떤 말들을 내세웠을지 생각해보라. 그리고 죄악된 거리와 마을에 복음을 전할 때, 어땠을까를 생각해보라. 전도하는 도중에 수많은 테러와 위협을 당하고, 갑자기 날아온 돌에 맞아 피를 흘리긴 했지만, 진정한 복음을 위해 굴하지 않았다. 여러분 주님을 믿는 것이 곧 승리임을 확신하라. 그 믿음으로 결국 영국사회의 성령부흥 운동이 일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신다. 자신의 행복과 권익을 위해서 누군가를 정죄하고 짓밟아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려는 사람들, 마치 영국의 신사가 되기 위해, 자신들이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 지 생각하지도 않고, 번영을 구가했던, 그렇게 자신의 신분을 공고히 하려고 했던 사람들처럼, 세속적인 가르침이나 그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신다. 부패하고 썩기 때문이다.

 

 

3.

주님은 바리새인이 되려고 하고, 그렇게 되지 못하면 열패감을 갖고 스스로를 미천하게 여기거나 자괴감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12장 6절에서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주님이 말씀하셨다. 자신을 참새 값만도 못하다고 규정당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의 눈에는 ‘민중은 먹을 것만 채워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개나 돼지’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머리털까지 소중하게 세시는 귀한 목숨이다. 세상의 일을 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단 한명이 아니라 더 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싹한 느낌이 들었는데, 더 오싹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 뭔가 하면, 사람들에게 자꾸만 미움과 혐오와 갈등과 분쟁심을 갖도록, 그것을 퍼뜨리는 사람들이다. 그것 또한 바리새인의 누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2절 이하에서 주님은 바리새인의 누룩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과 가르침이 옳다고 믿는 이들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주신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근심하는 사람’에게 목숨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유명한 말씀, 까마귀도 백합화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신다고 그 존재감을 최고로 높여주셨다. 자연의 이치요, 그 자연을 지으시고 만드신 하나님의 섭리이다.

오히려 주님은 자꾸만 쌓으려고 하고, 모아두려고 하고, 그래서 보물에 대한 욕심만 키우는 꼴 되지 말고, 그것을 하늘에 쌓는 일을 모색하라고 말씀하신다.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다고 말이다(33).

 

 

4.

그렇다면 오늘의 말씀은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주님의 말씀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오늘 말씀은 그 사이에 있다. 마태복음의 평행본문과 비교해보면 배열이 다르다. 마태복음 6장, 10장, 12장, 그리고 24장의 내용을 여기서 함께 다루고 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누가만의 독특한 자료다.

누가는 주님의 말씀을 정말 진지하게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말씀을 듣는 청자들에게도 묻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주의하라’고 말씀을 듣는 둥 마는 둥 허투루 듣지 못하도록 말이다.

주님의 말씀을 분명히 믿는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자기 생각대로 하는 사람들을 숱하게 봐 왔다. 그것은 바리새인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세상사람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신앙인에 불과했다.

그러나 반면에 누가는 주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받아들이고 철저히 따르려고 부단히도 노력하는 사람들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었고, 부활하신 몸으로서의 교회에 일어난 일은 주님의 말씀으로 일어난 일임도 알았다. 그러기에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사도행전으로 기록하면서, 예수님의 모습과 겹치는 부분이 많음을 알 수 있다.

 

5.

형과의 재산분할의 문제로 어떤 사람이 주님을 찾아왔다. 형에게 명령을 내려서 재산을 분할하도록 해달라고 한다. 형은 재산을 분할할 생각이 없다. 그런데 주님은 서운하게 들을 수도 있겠다 싶은 말씀을 하신다. 14절에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을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한 부자의 이야기를 비유로 들려주신다.

 

내용은 무엇인가? 한 부자가 있다. 소출이 많았고 지금의 곡간으로는 모든 것을 저장할 수 없어 더 크게 짓고자 한다. 여러 해 쓸 것을 쌓아두고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한다.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께서 그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하고,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부르셔서 죽으면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해서 말이다.

 

전도서 6:2도 비슷한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주님께 나온 동생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주님을 재판장 삼으려했다는 말씀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억울한 부분이 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그가 받아야할 정당한 몫을 요구하는 것뿐이지, 그것을 탐심이라고 말씀하시면 어떡하는가? 그러면 포기하고 손해를 봐야 마땅한가? 세상은 그래서 늘 욕심 사나운 사람들의 몫이 되지 않았던가?

오늘날 실제 재산분할 문제로 형제간에 법정다툼이 일어나는 경우도 참 많다. 어느 것이 옳은가? 그러면 누가 알아주는가? 고맙게 여기고 감사해하는가? 주님은 세상물정을 참 모르시는 것 같다.

 

 

6.

은유를 좋아하는 학자들은 형은 당대에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바리새인을 의미하고 동생은 죄인, 세리, 가난한 사람, 사회에서 주변부에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데, 이런 해석 역시도 1절 말씀과 연관 짓지 못한 해석의 결과이다.

 

자 그것은 차치하고 물음을 던져 보자. 주님의 비유의 말씀은 누구를 빗대며 적용하라고 들려주신 말씀일까? 형? 바리새인? 동생은 아닌가? 여러분은 아닌가?

만약 동생이 원하는 몫의 유산을 물려받았다면 그는 그 유산을 어디에 쌓을까? 부자가 쌓는 곳에 쌓지 않을까? 보물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하셨는데, 자기도 모르게 바리새인 행세를 하는 것은 아닐까? 어찌보면 자기의 정당한 몫을 받게 해달라는 동생은 예수님의 제자라기 보다는 잠재된 바리새인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바리새인이 누룩을 퍼트린 세계, 프레임, 틀 속에서 결국 갇힌 삶을 살 뿐이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솔로들이 대결을 펼치는 장면이 있었다(솔로워즈). 두 명의 남자가 여자들 30명에게 자신을 어필한 다음, 투표로 생존 여부가 결정된다. 한쪽 남자가 자기는 제주도에서 고깃집을 운영하는 CEO인데 연매출 30억원이라고 말했다. 여자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열광했다. 상대편 남자가 인물은 훨씬 더 있어보였는데, 어땠을 것 같은가? 만약 그 상대편 남자가 혹 매출액 40억을 이루고 있었다면, 기가 죽거나 자존심이 상했을까? 여러분 사람이 30억, 40억 그 비교 때문에 존재가치를 평가 받고 그렇게 규정당하며 산다.

 

 

7.

주님은 이와 같은 것들이 모든 탐심에서 비롯된다고 말씀하신다. 재물을 쌓아두고도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하신다. 그러기에 삶의 행태와 모습에 변화가 찾아오기를 바라신다.

33-34절에서는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 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세상적인 권력과 부와 명예에 대한 가르침이 만들어 놓은 삶의 틀, 그 틀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가?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으로 살고 있는가? 플랜터들이 ‘영국신사’가 되고 싶어했던 것처럼, 우리 속사람이 예수를 닮으려 하기 보다는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출세한 사람을 추앙하고 있지는 않는가?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한 일에, 우리의 욕심을 내려놓고, 우리에게 주신 물질들을 아름답게 사용되길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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