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10일, 성령강림절 후 8주)

 

영원토록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사랑의 하나님, 복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무더위의 높이가 교만을 생각나게 하는 계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인 겸손으로 예배하기를 원하여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뜨거운 태양 아래 여름이 몸살을 앓는 것처럼, 저희들의 마음은 뜨거운 성령으로 주님을 향한 사랑앓이를 하게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거룩의 말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1. 성찰을 위한 고요와 침묵

명나라의 문인 진계유(1558-1639)의 글 중 연후(然後)라는 명문이 있다.

후에야-신선도

고요히 앉아 본 뒤에야

평상시의 마음이 경박했음을 알았네.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의 언어가 소란스러웠음을 알았네.

 

(김기석,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꽃자리, 161)

 

한 주간 큰 정신을 가졌던 몇몇 거장들을 만나면서 무람한 마음을 가졌다. 공부가 철저하지 못하면서 주장이 폭력적이고, 패거리를 지어 그 속에서 안주하려는 것을 행복이며 성공이라 말하는 이들과는 차원이 전혀다른 삶을 살겠다는 결단을 하나님께 바쳤다.

 

“역사 속에 별들처럼 빛났던 거장들을 만나본 뒤에야 내가 번거충이였음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야, 하나님의 참사랑을 알았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확신했고, 저주와 사망권세에서 구원받은 복된 삶으로 불러주신 참 은총을 깨달았다. 지상에 가장 큰 목표는 하나님께 나아가 영화로움을 옷입는 것이다.

 

우리가 본질로 돌아가기 위해서 고요함 지녀야하고 때로는 침묵을 해야 한다. 본질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자기 이기적인 욕망을 주님께 호소하는 차원은 신앙의 초보단계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뜻을 사랑하며 순종할 수 있는 단계라야,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이다.

침묵하지 않고, 아니 침묵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는가? 진정한 침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내 생각과 내면의 복잡한 소리를 그치고 멈추는 것이 빛나는 정신을 이루었던 거장들의 한결 같은 가르침이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이 길을 충실히 따랐던 분이 아니시고 누구시겠는가? 십자가의 번민과 갈등 속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를 드렸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을 기도하신 후에 ‘이제 때가 왔다.’ 말씀하셨다. 그냥 즉흥적인 결단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친 후에 빚어낸 ‘순종’의 아름다운 향기였다.

 

 

  1. 하나님의 중심에 안착하기

현대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시인이었던,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돌의 정원>이라는 책에서 들려주는 어떤 이야기가 생각나서 찾아, 읽었다.

우주의 어머니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전쟁의 신이고, 다른 하나는 지혜의 신이다. 두 아들은 늘 어머니의 무릎에 앉기를 원했다. <너희 둘 다 받아 줄 수는 없다. 우주를 한 바퀴 돌고 오너라. 둘 중 먼저 돌아온 사람이 내 무릎에 앉게 될 것이다.> 어머니가 말했다. 전쟁의 신은 재빨리 수레에 올라 타 화살같이 사라졌다. 지혜의 신은 어머니의 발끝에 웅크리고 앉아서 전쟁의 신이 쏜살 같이 달려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어서 일어나 어머니에게 절을 한 다음 그 주위를 세 바퀴 돌고서 어머니 무릎에 앉았다.

몇 해가 지나, 떠나갔던 전쟁의 신이 피곤하게 돌아와서, 그 광경을 보고 화를 냈다. 어머니의 대답은 이랬다.

<얘야, 중요한 것은 우주를 한 바퀴 도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중심을 한 바퀴 도는 것이다.>

(돌의 정원, 146)

 

이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를, 각박한 세상살이 속에서 마음에 새겨보기 바란다.

 

 

  1. 한 소녀가 나아만에게 전해준 복음

오늘은 나아만 장군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아람의 군대 장관이었고, 많은 군공을 세웠다. 아람 왕은 그를 존귀한 자로 아꼈다. 이로써 그의 사람됨을 가늠해볼 수 있다. 그는 무장(武將)으로서 무작스럽지 않았고 오히려 맹장으로서의 기품과 기상이 뛰어나 보인다.

그러나 그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또 그의 인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부모를 잃고 버려진 것으로 보이는 소녀 하나가 있었는데,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시중들게 했다. 어린 소녀가 무슨 죄가 있는가? 불쌍했다. 그리고 긍휼히 여겼다. 3절에서 이 소녀가 나아만을 ‘우리 주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이 부부가 이 소녀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짐작할 수 있고, 그 자상한 인품을 헤아릴 수 있다.

그런데 그는 나병환자였다.

 

주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5:7)

 

그 소녀는 나아만의 질병을 가석하게 여기고 엘리사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엘리사는 나병을 분명히 고칠 수 있다는 것이다. 실낱같은 기대감을 가졌다.

이 소녀의 말을 믿고 왕에게까지 보고를 한다. 이스라엘과는 긴장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 사마리아에 다녀오겠다고 청탁서를 받아쥐었다.

그런데 현실과 다를 것 같은 부분이 있다. 이상하지 않은가? 아람의 군대 장관이 아내를 시중드는 일개 시녀에 불과한 소녀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는 것 말이다. 현실성이 있는 말일까?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경은 절대 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 이유를 깨달았다면 오늘 말씀의 핵심을 들은 것이다. 그 이유가 궁금한가?

 

 

  1. 실망한 나아만과 신앙인의 실족함

더 큰 문제는 지금부터다. 나아만은 엘리사의 집 문 앞에 이르렀다. 첫 인상부터 안좋았다. 엘리사가 직접 나와서 환대하기는커녕, -나아만이 누군데?- 문 밖에 세워두고는 사람을 보내서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번 씻으라.’는 말뿐이었다. 수모를 당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누군데 이렇게 대하는가?’ 참으려고 했다. 그런데 요단강을 보고는 더 실망을 금치 못한다.

 

강으로 치자면 다메섹의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요단강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강물보다 더 나았다. 강에서 몸을 일곱번 씻기만 할 거라면, 뭣하러 여기까지 왔을까! 그런다고 낫는다면 세상에 고침받지 못할 문둥병환자가 어디있을까?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나름 스펙터클한 뭔가를 기대했고 신비한 어떤 체험에 사로잡히는 경험을 원했는데, 그렇지 않자, 언짢을 뿐이었다.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11)

 

여기서 잠깐, 우리의 모습을 돌이켜보자. 종교적인 이벤트나 신비한 체험을 바라고 주님 앞에 나아오지는 않았는가? 나아만이 ‘내 생각에는’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처럼 자기 생각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와 자기식의 기적을 바라고 은총을 바라지 않는가? 그 기대가 무너졌을 때, 어떤 생각이 들어오는가? 할 일도 많고, 약속도 많은데, 시간과 공을 들여 여기까지 와서, 괜한 시간만 낭비했다고 생각한다. 이럴 거면, 세상적으로 더 유익하고 좋아보이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차라리 그거나 할 걸, 이라는 생각을 한다. 화가 난다.

 

그런데, 나아만이 이대로 돌아간다면 정말 말 그대로 타작마당만 밟고 갈 뿐이다.

 

씻더라도 믿음 없이는 단순히 몸만 씻어내는데 불과하다. 순종하는 믿음으로 씻어내야 자기의 깊음까지 씻어내고 질병이든 어떤 문제든 고칠 수 있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참회복, 참 문제해결은 여기서 시작된다. 자기를 비우고, 자기 생각을 버리고, 자기를 죽이지 않으면 결코 순종할 수 없다. 그 순종이 있어야, 회복과 새로움의 가능성은 시작된다.

 

같이 왔던 수행원들이 말한다. 선지자가 더 큰 것을 요구하였더라도 했을텐데, 이것 해보는 것이 뭐가 어렵겠습니까? 누군가를 침착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도 참 좋은 사람인 것 같다. 한편 생각해보면, 수행원들의 말이지만, 우리로 하여금 순종을 해보도록 생각을 바꾸는 의식의 분깃점이기도 하다.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예수님을 처음 믿는 분들은 말씀이 와 닿지 않고, 예배의 순서순서가 낯설고, 신앙생활의 모든 부분에서 이해할 수 없고, 의미를 생각하기 어렵더라도, 그 강물에 들어가 참여하다보면 능력이 일어난다. 하나님을 오래 믿었다고 해도 여전히 자기 생각과 익숙함을 버리지 못해서 은혜의 강물에 빠져들지 못하는 분들도 마찬가지이다.

 

신비는 자기도 모른 사이, 비밀리에, 어느 사이에, ‘뜻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나아만이 어떻게 됐는가?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이대목이 바로 진계유의 글이 생각나는 이유이다. 그리고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생각나는 이유이다. 나아만이 요단강에 들어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며 일어난 변화를 생각해보라.

 

전쟁터와 같은 세상살이 속에서 삶을 돌아보고, 뉘우치고 반성하며 회개하는 시간을 가지라. 마음을 고요히 하고 주님을 바라보라.

 

나아만은 이기적이고 맹목적으로 달렸던 전쟁의 신처럼 자기중심성에서 비로소 어머니의 중심을 돌았던 지혜의 신처럼 하나님중심성으로 바뀌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고치시고 힘주시고 새롭게 하심을 경험하길 바라신다. 상한 심령을 위로하시고, 지친 영혼이 쉼을 얻으며, 독수리 날개 쳐 올라가는 것 같은 용기와 능력이 솟아나길 원하신다.

 

기독교 신앙은 보이지 않는 분의 살아계심을 체험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생각을 초월한, 그래서 없을 것만 같고, 아무런 증거가 없고, 명백함은 더더욱 기대할 수 없는 분, 그러나 존재하시는 분을 체험하는 것이다.

 

 

  1. 복음의 능력이 되는 사람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목하기를 원하는 인물이 있다. 아마도 하나님께 돋보이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전장에서 사로잡혀온 소녀다. 앞에서의 질문대로, 아람의 큰 용사가, 어떻게 이 보잘 것 없는 소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여기까지 왔을까?

 

저는 이 대목을 접하자마자 바로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누굴까?) 애굽에 팔려갔던 요셉이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매사 형통케 되었고, 그것을 본 보디발은 요셉을 그 집의 가정총무로 삼았다. 이 소녀에게도 바로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있는 것 아닌가?

보디발은 이국땅에서 팔려온 소년이었던 요셉을 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는 사람 속에, 바로 그 분이 현존하시는 것을 보았다. 심지어 애굽의 바로왕은 이렇게 말한다. 창41:38에,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요셉뿐인가? 나아만이 이 소녀를 볼 때는 어땠을까? 이 소녀까지만 포함된 것인가? 하나님은 바로 우리고 그 영에 감동되고, 인도함을 받으며,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기를 원하신다. 우리 중심에 거하기를 원하신다. 그는 낙심할 상황에서도 형통하게 되는 것이다. 애굽에서는 소년 요셉이, 아람에서는 한 소녀가, 그리고 우리의 삶의 자리 상황에서는 바로 여러분이 말이다.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23:4] 고백했다. 다윗 역시도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었다. 사울이 악신이 들어 번뇌했을 때, 다윗이 타는 수금을 듣고, 상쾌하여 병이 나았다.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가 나무에게 물었다. (두고두고 새겨도 아깝지 않은 말이기 때문에 반복한다.) ‘하나님에 대해 말해주겠니?’ 그러자 나무는 꽃을 피웠다. 이 소녀에게 요셉처럼 하나님의 은총이 꽃피는 것을 보면서, 나아만이 일개 하녀의 말이라고 무시할 수도 있지만 새겨들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하나님을 향한 진실무망(眞實無望)함으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되길 바라신다.

 

말씀을 마무리하자. 이 소녀는 나아만이 구원에 이르도록 쓰임받은 여종이었다. 기억하라. 여러분의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은 누군가 구원을 받고, 문제가 해결되고, 복을 누리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원하신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 모두는 주님의 은총을 입은 자들이다. 또한 주님은 믿음으로 그 은혜에 참여하기를 바라신다. 주님의 은혜의 강에, 자기 생각을 버리고 순종함으로, 몸과 영혼의 더러움을 씻어버리고 새살이 돋아나듯이 회복되기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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