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26일 성령강림절 후 6주

 

 

  • 인간예수

예수님은 하나님이신가? 인간이신가? 웬 시답지 않은 소린가 싶어하실 지도 모르겠다.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100% 인간이시다. 반신반인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교회사가 이단으로 규정한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성경에서도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듬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2;5-8)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14)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은 상태로 화육하셨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것을 외면한 채 예수님을 믿으려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가능한데, 인간이 우리는 불가능하다고 하는 틀을 만들어 놓고 예수님을 믿으려 하니까, 실천력이 약해졌고, 본받거나 따라가려고 하지 않는다. 예수님 따로, 신앙 따로, 생활 따로 여도 아무 문제를 못 느낀다.

 

 

  1. 주님의 결심

51절, 굳게 결심하시고 승천하실 때가 돼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결심하셨다. 예수님이시니까 쉬운 결심이었을까?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주님의 결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십자가의 길을 걷기로 작정하신 마음인데, 그 과정에서 고통과 수치와 수모와 외로움과 고독을 몸으로 겪어야 하는 것임을 알면서 하신 결정이다. 그냥 쉽게 하신 결정이 아니다.

 

‘굳게 결심하시고’라는 표현을 의미있게 설명할 말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찾은 말은 ‘도스르다.’는 우리말이다. 그 뜻은 “무슨 일을 하려고 별러서 마음을 가다듬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고, 십자가 순종의 길 이외의 다른 방법은 없는지 찾고 또 찾았다. 몸을 가졌기에 마음속에 일어난 수많은 갈등을 벼르고 또 벼르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마침내 모진 바람에도 그 마음이 변함이 없고 흔들림 없이 가다듬는다. 진리가 몸에 베어들고 든든히 뿌리내리기 까지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인내와 연단의 시간 말이다.

 

작은 목표와 계획을 세워놓고도 이런 저런 상황적인 이유 때문에 바장이기 쉬운 것이 우리의 속절없는 마음인데, 주님의, ‘마침내 굳게 결심하셨다’는 것은 하늘의 음성에 타울거렸던 용기있고 아름다운 주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베드로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신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하셨다. 뜻은 세웠지만 육신의 한계와 고통 때문에 언제든 뜻이 무너짐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주님은 기도로 주님의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면서, – 이런 표현이 불경하다고 여기실지도 모르겠지만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의 몸을 입으셨던 점에서 바라보자면 –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굳세게 붙들어주심을 체험했고, 베드로에게도 일러서 말씀하신 것이다.

 

베드로에게도 바라셨던 것처럼 주님은 우리 역시,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 그 손에, 장중에 붙들리기를 바라신다. 보혜사 성령의 그느르심 속에, 주님을 따라 걷기를 바라신다.

 

 

  1. 결심에 대한 방해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을 향하기로 결심하고 좇았다. 물론 그 정확한 이유에 대해서는 무지했지만, 결심은 결심이다. 그런데 여러분, 굳은 결심만을 가지고 모든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52절-53절을 보면, 제자들을 앞서 보내셨다. 그런데 사마리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예루살렘에 가시기 때문’이란다. 사마리인들의 뿌리 깊은 예루살렘 중심주의에 대한 반감 때문인데, 그 설명은 차치하자. 그러나 문학에서는 이런 것을 복선이라고 하는데, ‘예루살렘에서는 어떨까?’에 대한 암시를 주고 있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게 화를 낼만한 일이 아니지만, 제자들 자신들을 대하는 태도에 화가 났다. 이렇게 거절 당해본적이 없어서인지 모욕적이라고 느꼈고 그래서, 악담을 쏟아 놓는다.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할까요?”

사람의 마음이 어떤 큰일에 대해 느끼는 분노보다, 작은 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분노가, 큰 일 보다 더 클 때가 있는 법이다. 달리 말하면 어떤 결심을 하고 의기투합을 하고 무슨 일을 추진하려고 하는데, 굉장히 사소한 것이나 작은 걸림돌에 분개하고 격정의 감정을 겪을 수 있다. 그래서 작은 일에 노여워하지 않기 위해서는 늘 사태를 객관화 하고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피에르 신부는 프랑스에서 빈민의 아버지라고 불리던 분이다. 프랑스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분이다. 어릴 적 어느 날 아버지는 자녀들을 데리고 리롱 변두리의 어느 불결한 장소로 갔다. 이가 들끓는 거지와 부랑자들이 40여명 모여살고 있는 집이었다.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 몇 분이 현직에서 은퇴를 하고 봉사하는 모임을 결성해서 전념하다시피 했다. 그분들도 미리 와 있었다. 머리도 깎아주고, 수염도 깎아주고, 더러운 빨래도 세탁해주고, 여분의 속옷도 가져다주고 성심을 다했다.

피에르 신부는 그날, 어린 아들로서 잊을 수 없는 깜짝 놀라는 경험을 하게 된다. 아버지가 걸인 한 사람의 머리를 깎아주다가 거친 욕을 듣고 수모를 당했다. 아마도 머리 깎는 기계에 머리카락이 끼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린이로서 당하던 충격보다 더 인상에 남는 것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들려준 아버지의 한마디 말이었다.

 

“얘들아, 불쌍한 사람들을 보살필 자격을 갖추기가 얼마나 어려운 지 보았지?”(피에르신부, 단순한 기쁨, 마음의 산책, 80)

 

감동을 주는 사람은 역시 다르다. 이런 큰 존재가 될 수 없을까? 이것을 부당한 경험이라 여기고 관둬버릴 수도 있지만, 자신의 감정과 의로움에 받은 상처보다도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사랑하기에 의연히 할 수 있는 말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데도, 제자가 되는 데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 교회에서 일 할 때, 혹은 선한 일을 도모하고 추구할 때, 어떤가? 시험 드는 일도 생기고 감정에 휩싸일 때도 있다.

 

사마리아를 통과할 수 없게 됐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길은 갈 수 있는 수많은 길들 중에 하나이지 꼭 그 길로만 가야하는 것은 아니었다. 목표나 목적지를 바꾸었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다른 길에서 더 좋은 것을 만나고 경험하고 체험할지 누가 알겠는가?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주님은 격앙된 제자들의 마음들을 꾸짖으시며, 다른 마을로 돌아서 가자고 하신다.

 

 

  1. 더 좋은 길

길을 돌아가게 됐는데 위로가 되는 점이 있다. 득이 훨씬 많다.

57-62절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도다.” 말씀하신다. 겉으로 보이는 사역에 대한 인상과 실제 당하는 현실은 굉장히 차이가 날 수 있다. 또 어떤 이에게 따르라 했을 때, 먼저 할 일이 있어 마무리 짓게 해달라고 요청을 한다. 주님은 이런 말로 제자가 되기 위한 중요한 마음가짐을 말씀하신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57절을 보면 ‘길 가실 때에’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 표현은 누가복음을 세밀히 읽어보면 이런 표현들과 연결돼있다. 10장 38절에서도 ‘길 갈 때에’ 13:22 ‘각 성 마을로 다니사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17:11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8:35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19:1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19:28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그리고 마침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사마리아에서 거부당하시고 길이 막힌 것 같지만, 성경이 증거하는 것을 통한 위로는 무엇인가? 멀리 갈 것도 없다. 10장에 보면, 70인의 제자들이 등장한다. 마을마다 고을마다 제자삼은 이들을 파송하셨고, 그들이 돌아와 예수님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굴복하고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체험들을 나눈다.

 

57절에서 62절까지만 보면 제자가 되는 길은 까다로운 많은 조건을 극복하고 다부진 결단이 필요해서 제자된 이들이 드물 것 같지만 아니었다. 제자들이 늘어나고 삶의 자리에 들어가서 샬롬을 일구는 이들이 늘어났다. 주님은 그들을 얻으셨다.

 

한 길이 막힌 것 같지만, 수많은 기회가 찾아왔다. 고을고을을 다니시며 예루살렘까지 가시는 과정을 보니까, 단순히 장소이동이 목적이 아니다. 가는 곳곳 마다 어떤 의미에서는 또 다른 예루살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나사렛에 있는 회당에 들어가서 이사야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눅4:18-19). 이사야61:1이하의 성경말씀이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가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경을 덮으시면서 주님은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은 이러한 기대를 담아내지 못했다. 어쩌면 관심조차 없었는지도 모른다.

 

칼릴 지브란의 말이 떠올랐다. 칼릴은 일곱 살이 되기 전에 부모를 여의고 수도원에 보내져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천덕꾸러기로 자랐다. 그는 수도원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됐는데, 자기가 수도원에서 쫓겨나게 된 까닭을 이렇게 말한다.

 

“어찌해서 당신들은 여기 수도원에 편히 앉아 가난한 사람들의 땀과 눈물로 빚어진 빵을 먹으면서, 그 지식을 필요로 하는 백성들과는 동떨어져서, 저들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는커녕 고지식한 그들의 피를 빨아먹고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당신들 보고 이리떼로부터 양들을 지키는 어진 목자들이 되라 하셨는데, 어떻게 당신들은 양들을 잡아먹는 이리떼가 될 수 있습니까? … 겉으로는 이 세상의 모든 세속적인 것들을 질색인 양하면서도 속마음을 탐욕으로 부풀어 있습니다. … 못난 백성들의 눈물은 잘난 당신들의 거드름피우는 웃음보다 더 아름답고 가난한 이웃을 돕는 저들의 소박한 마음씨는 이 수도원 곳곳에 세워지고 걸려 있는 우상들보다 거룩하며, 걸인이나 창녀를 측은히 여기고 동정하는 저들의 따뜻한 한 마디 말은 우리가 매일 같이 빈 말로 허공에다 뇌이는 길 기도문보다 더 숭고한 것입니다.” (김기석 목사,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122-123, 재인용)

 

예루살렘이 이와 달랐다고 할 수 있을까? 예루살렘뿐인가? 예수님께서 걸으며 향하고 있는 마음들 마다 모두 마찬가지다. 예루살렘이다. 예수님은 그 예루살렘들을 잔다리밟듯이 걸어가셨다.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현실속의 예루살렘으로 먼저 달려가 헌신하면서 사명을 감당하는 길이 곧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임을 아셨다. 이렇게 보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고난과 수난과 죽음의 길이 아니라, 죄와 사망과 권세와 불행과 저주를 깨뜨리시는 길이었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가 어쩌면 예루살렘이다. 욕심 사납고 이기적이며 탐욕이 가득한 곳에서 경쟁을 하고, 자기의 의와 공로를 쌓아야 하고, 업적을 세워야 한다. 물질이 사람을 속이고 굴욕감을 주고 지배한다. 사람을 비인간화 하고 차별하고 배척한다.

그러나 주님은 예수의 이름으로 승리하길 원하신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물으면서 권세와 능력 주심을 확신하면서 승리하라. 주님의 명령이자 약속이다.

 

막16:17-18 / 눅10:9 / 행1:8

 

세상과 동의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기는 것이다.

 

 

Leave a Comment

빠른 문의

이메일로 문의를 남겨주시면 빠른 시간 내에 연락드리겠습니다.

Not readable? Change text. captcha t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