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19일 성령강림절 후 5주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가 주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장마 전선이 시작되고 이른 더위가 대지를 진한 푸름으로 색칠하는 계절에, 주님이 주실 위로와 희망을 기대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낙심했던 마음이 새로운 용기로 넘실대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2:19)

 

 

  • 어딜 가든 평안을 비는 성도들

기독교인들은 어디를 가면 먼저 기도하는 모습을 보인다. 특별히 어느 집에 가면 성도들은 도착해서 먼저 기도부터 한다. 이유를 생각해보셨는가? 어떤 내용으로 기도해야 하고, 또 기도하는가? 하나님께 먼저 아뢰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서 별다른 생각을 안해보셨는가? 오늘의 말씀을 잘 들어보시고, 그 의미를 깨닫고 실천할 수 있기를 빈다.

 

 

  • 군대귀신 들린 자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역에서 귀신이 들린 사람을 고쳐주시는 내용이다. 그 귀신의 이름은 군대다. 거라사인의 땅은 갈릴리 맞은편에 있는 곳이었다. 동방무역이 성행했던 곳이라서 부유하고, 로마가 세계 정복의 거점도시로 삼았던 곳 중에 하나여서, 사회 기반시설을 잘 갖추고 있었다.

돼지 떼가 2천 마리나 언급되고 있는데,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가축을 본다. 그래서 기피했다. 이것으로 봐서 이 지역은 주로 이방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천 마리의 양돈 규모를 생각해보면, 이 작은 도시가 얼마나 번영한 곳이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곳 역시 ‘Pax Romana’(로마의 평화)라는 기치 아래, 그 이면에서 벌어졌던 어두운 그늘이 있다. 번영의 이면에는 대부분 들춰내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들이 있기 마련이다. 거라사의 광인이 이것을 방증해준다.

 

분명 한 사회의 번영과 발전 이면에는 고통받고 상처입은 존재가 있다. 우리만해도 독립투사로부터 625참전 용사들, 파월용사들, 독일로 파견됐던 광부나 간호사, 민주화운동을 했던 열사들, 산업역군들 등 귀중한 목숨을 희생의 대가로 치뤘던 고마운 분들이 있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꽃분이네 가게를 팔지 않고, 상권 개발을 위해 도장을 찍으러 다니는 사람들에게 맨날 광인처럼 싸움만 하는 할아버지(황정민 역)가 등장한다. 영화 말미에 그 이유가 드러난다. 6.25동난 중에 동생을 자기 때문에 잃어버렸다는 죄책감으로 한 평생을 살아왔다. 한 맺힌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인간의 사연이 이산가족 찾기를 통해서 해결되면서 많은 관객들이 울었다.

어제는 세월호에서 구조작업을 하던 잠수사가 정신적인 치료를 받지 못하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다가 고통 속에, 세 아이들과 아내를 남겨두고 자살해서, 장례를 치뤘다는 소식에 가슴 먹먹했다. 찢기고 상한 심령의 울분이 짓눌리고 그 울혈로 인해 미쳤고, 또 미쳤다고 내몰렸기에 더 광기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그런 삶의 격정은 누구라도 겪을 수 있다.

군대귀신 들린 사람이라고 왜 이런 격정의 삶이 없을까?

 

27절에,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사이에 거하는지라.”

 

광인의 실존상을 함축적으로 반영하는 대목이다. 그는 삶의 모든 것이 망가졌다. 사람들은 이 귀신들린 사람에 대한 인내심이 길지 못했다. v.27 오래 이 사람과 함께, 평범한 사람들도 오래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이와 동시에 그는 혐오의 대상이 돼버린지 오래다.

그래서 잠자코 있어 주길 바란다.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사라지는 것이 모두에게 편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왜 그렇게 여기는가?

로마의 군대가 휩쓸고 간 폭력에 대해서, 살아남은 자의 감격과 감사보다는 치유되지 못한 상처의 고통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그 괴로움이 다른 사람까지도 힘들게 만든다. 어느새 혐오감이 생겼고, 그는 외면당했다. 아무리 생각은 불쌍히 여겨야지 하다가도 사람의 이기적인 본성에 한계가 찾아오면, 비난하고 증오한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근본적으로 혐오하고 미워하고 기피할 대상이 없다. 세상이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믿음의 사람이라는 본분을 잊지 말라.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달라야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쩌면 혐오와 미워함도 자기의 편의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의 발로는 아닌지 자문해본다. 또 누군가를 정죄하고 미워하도록 만들어서 불편해지는 마음을 외면하게 만들려는 고도의 심리적 전략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해지니까 말이다.

교회에 걸인들이 가끔 온다. 예전과는 그 태도가 사뭇 다르다. 무례하고 거친 행동을 보일 때가 많다. 막무가내로 돈을 내놓으라고 으르대는 사람도 있다. 자기가 기대했던 것 이상 받지 못하면, 성질을 부리고 욕하면서 돌아간다. 줬던 것도 도로 빼앗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면 마음의 평정은 깨지고 별의 별 생각이 다 든다. ‘그 까짓것 얼마라고 달라는 대로 줄 걸!’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 태도가 기억에 남아 불쾌해진다. 하나님께 죄짓는 것처럼 께름칙하기도 하고, 주변에 누구 이름대면서 꼭 갚겠다고 얼마를 요구하는데, 요즘 그 거짓말에 속을 사람이 누가 있는가? 다니면서 교회 욕이나 하고 다니지는 않을지 걱정도 된다.

이런 고민에 안 빠지려면 단순하다. 이렇게 찾아오는 이들을 단정짓고 정죄해버리면 그만이다. 여기저기 저런 식으로 앵벌이를 하면서, 일하지 않는 게으른 습관을 방조하면 안 된다고, 그것이 그를 위한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면 얼마나 편한가? 그런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묻다보면 주님은 적어도 이렇게는 생각하지 않으셨을 것 같다. 굶주리고 가난한 자에게 줄 수 있으면 주는 것이 당연하지, 무슨 조건을 붙이거나 단서를 달 일이 뭐냐고 꾸짖으실 것 같다.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주면 되지, 치사하게 뭐하고 있느냐고 야단치실 것 같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서도 받아들여지는 경험이 없었던 이에게 그것을 선물로 주지 못해서 자책하는 것이다.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며” 라는 시가 생각났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王宮)의 음탕 대신에

오십(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二十)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중략)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정말 분개해야할 일에는 분개하지 않으면서 작은 일에 분개하는 자기 속좁음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위선이 여지없이 민낯을 드러내는 것 같아서 부끄럽다. 주님을 위해 불태우기 위해서 아직 희나리(덜마른 장작)에 불과한 모습에 스스로의 가슴을 친다.

여러분, 우리가 이런 모순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 타인에 대해서는 엄격하거나, 자신도 연약한 존재이면서 타인은 연약하다고 비하한다. 여러분, 자기 자신 역시도 죄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마음이 주님을 향하도록 바루시길(비뚤어지지 않도록 곧게 하다) 빈다.

 

 

  • 군대귀신을 몰아내신 예수님

오늘 말씀을 통해 제가 먼저 크게 은혜 받은 대목이 있다. 군대귀신 들린 자가 예수님께 와서 엎드렸는데, 큰 소리로 말했다. 행동조절이 안됐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주님을 알아본다.

성경은 이에 앞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29a. 예수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에게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다. 주님께서 귀신들린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하신 말씀일 수도 있지만, 주님께서 그 지역에 당도하시자마자, 영적인 영역에서 이미 그렇게 하셨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귀신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았고 그 앞에 엎드렸다.

은혜와 깨달음을 얻은 대목이 바로 이 대목이다. ‘이미 나오라 하셨다.’ 마음속으로 기도하는 영적인 차원에서의 우리가 헤아리지 못하는 신비한 능력이 일어난다.

귀신에게 명령하심, 그리고 쫓아내시고, 광인이었던 그를 온전케 하심. 그 지역을 정화하시고 귀신들린 사람에게 불었던 광풍을 잠재우셨다. 혐오하거나 외면해야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회복되고 온전케 돼야할 사람으로 여기셨다. 어디를 가든지, 주님은 이런 마음으로 가셨고 대하셨다.

 

이 부분이 믿음과 확신이 되고 은혜가 되는 이유는 성경을 좀 더 읽어가다가 만나는 대목에서 그렇다.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주님께서 70명의 제자를 보내시면서, 어느 마을 어느 집에 들어가든, 평안을 빌라고 말씀하신다. 거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주고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전하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명령하심으로 귀신이 굴복하고 쫓겨났는데, 제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함만으로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 70인이 기뻐하며 돌아왔다.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이러한 소망이 있는 것 아닌가? 적어도 우리는 기도할 수 있다. 주님은 명령하셨고 제자들은 선포했다면 우리는 적어도 기도할 수 있다. 그런데 여러분 주님은 어느 아버지의 귀신들린 아들을 고쳐주신 뒤에, 제자들에게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기도에는 명령, 선포 못지않은 능력이 있음을 가르쳐 주셨다.

바울은 전신갑주를 취할 때,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으라.’고 말한 바 있는데, 그 신을 어떻게 신을 수 있는가? 왜 어디를 가든 기도해야 하는지 알겠는가? 가는 곳 마다, 있는 곳 마다. 제일 먼저 기도부터 할 일이다.

 

 

  • 귀신들의 자멸하는 능력

귀신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승리할 수 있음을 믿는가?

귀신에게는 우리가 몰랐던 능력이 하나 있다. 바로 자멸하는 능력이다. 보라.

군대귀신이 예수님께 말한다. 돼지떼에게 들어가기를 청했다. 왜 돼지 떼에 들어가겠다고 말했을까? 자기들을 무저갱에 빠뜨리지 않기를 원해서, 기껏 돼지 떼에게 들어가더니 비탈을 내리달아 결국 자멸하고 만다. 악은 꾀를 부리는 것 같아도, 그 꾀 때문에 스스로 망한다.

 

돼지 떼 2천 마리가 몰사하자, 이 소식이 동네에 알려졌다. 엄청난 사고가 발생했는데, 손해배상을 청구한다면 누구에게 해야 할까?

사람들 눈에는 돼지 떼들이 스스로 빠진 것이지, 예수님께서 한 마리씩 물에 던져 넣은 것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순식간에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렇기에 직접적으로 뭐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귀신들렸던 자가 멀쩡해서 주님 앞에 있는 것을 보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주님께 그 지역에서 나가달라고 말한다.

 

친분 있는 사람이 이 대목을 이렇게 간증하는 것을 들었다. 참 재밌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수년간 동대문에서 막대한 돈을 벌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과는 멀어졌고 돈 버는 데 열중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동안 벌었던 것을 일시에 날렸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가져가셨다고 여긴다. 깨끗한 방법만으로 돈을 번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욕심이 생기니까, 반칙도 있었고 부정도 있었다. 돼지 떼가 몰사했듯이 자기가 그동안 번 것을 처박고 나니까, 아깝다거나 속상하다거나 한 생각보다도, 돈은 버는데 만족함은 없고 그동안 돈에 미쳐있던 자기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온전케 하시고 쓰시려고 빼앗아 가시고 쓰시려고 계획하셨단다. 지금은 선교사로 제 3국에 가있다.

 

아무튼 이것은 양돈축사 농가에 예수님께서 피해를 입힌 사건이 아니다. 공관복음이 이것을 주목하여 기록하고 있는 이유가 있다. 앞에서 말했던 대로 당시 돼지는 부정한 가축이었다. 문화의 수수께끼를 푸는 마빈 헤리스는 돼지가 인간과 먹거리 경쟁에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 화합을 깨는 식문화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금기시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돼지 떼가 몰사한 사건을 주목해서 기록한 이유는 이방 땅까지도 정화하고 깨끗케 하신 예수님의 사역과 능력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주님의 역사가 일어난다.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고 이루어진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지역에서 쫓겨나지 않으셨는가? 그렇다면 실패한 것 아닌가? 복음이 전해지기는커녕, 사람들의 공분만 샀으니 말이다.

그런데 정화된 곳이라야 꽃이 필 수 있고, 잡초라도 필 수 있는 것이다. 이 지역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39절 하반절을 보자.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돼지를 치던 자들이 이 성에 손실을 알렸다면 주님을 체험한 자는 복음을 전했다. 당장은 잘 못된 것 같아 보여도, 주님 안에서 안 그렇다.

 

여러분 어디를 가서, 먼저 기도하고 어떤 기도를 해야할지 아셨는가? 여러분 어디를 가든, 예수님의 이름으로 먼저 기도부터 하라. 그 곳에 주님의 특별한 복이 임재하고 평화가 있기를 구하라. 음부의 권세가 몰락하고 귀신이 자멸하며 병마는 사라지고 사탄은 번개처럼 떨어지도록 기도하라.

Leave a Comment

빠른 문의

이메일로 문의를 남겨주시면 빠른 시간 내에 연락드리겠습니다.

Not readable? Change text. captcha t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