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27일 부활주일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새 생명의 기쁨을 온 인류에게 허락하신 소망의 하나님, 기쁜 부활절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하염없이 다가오는 유혹의 깃발들을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피하느라고 지친 심령들이, 무덤을 깨치고 일어나셨던 주님의 승리를 힘입어 소생하고자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머리 숙인 저희에게 희망을 한 아름 안겨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거룩의 말씀)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커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2)

 

  1. 몸짱 씨앗

부활절 아침,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예수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빈다. 특별히 어둠 속에 있거나 고통 가운데 있거나 죽음이나 다름없는 상황 가운데 있는 분들이 있다면, 부활하신 우리 주님과 함께 그것들을 깨뜨릴 수 있기를 빈다. 또 절망과 힘겹게 싸우고 있는 분들이나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막막한 일상이 계속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갈릴리로 먼저 가시겠다고 하신 주님을 믿고 힘과 용기를 내시기를 바란다.

한 주 사이에 산수유가 반갑게 피었다. 개나리는 상냥하게 봄 길을 만들고 있다. 봄의 모습과 부활은 매우 닮았다. 이 정취 속에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사랑이 피어나고 향기로울 것 같다. 행복이 어디 있나? 이 따사로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세상의 모든 것을 다가졌다고 할지라도 불행한 사람이다.

이 아름다운 정취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다. 아무리 세파가 어지럽고 인생이 곤고하다고 하더라도, 물론 무관심하게 그 사회적인 책임을 외면할 수는 없겠지만, 마음의 평강과 작은 행복을 누리는 여유만은 우리가 만들 수도 있다고 말이다. 부활신앙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말이다.

 

아동문학가 이정인의 시(詩)가 떠올랐다.

 

제목 : 몸짱 씨앗.

 

요것 좀 봐!

 

잠자는 척하면서 / 팔운동 / 다리운동 / 숨쉬기 운동 /

부지런히 했던 거야. //

 

안 그러면 / 이 쪼그만 게 / 흙덩이를 번쩍 /

어떻게 들 수 있겠어? //

 

이번 부활절을 맞아서, 우리가 부활의 신앙을 잃어버리고 무기력한 신앙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보았다. 십자가와 부활의 강력한 신앙을 버리고, 세상을 좇다보니까 허약한 신앙의 토대 위에서, 하나님 기뻐하시는 모습대로 살아갈 힘까지 잃어버린 것 아닌가, 스스로 자문해보았다. 부활절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초대한다. 그 때문에 흙덩이와 같은 고통의 무게를 번쩍 들어 올리고, 활기차고 희망차기를 주님은 바라신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믿는 신앙인들의 평범하면서도 일상적인 삶이란 무엇일까, 생각하던 터에, 성서일과를 통해 주시는 오늘의 말씀을 대했다.

 

  • 부활아침

먼저, 예수님이 부활하신 때의 사건을 다시 한 번 기억해보자.

아침에 여인들이 예수의 무덤에 찾아갔는데, 돌문이 굴려있었고 예수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 천사들이 거기서 예수님은 살아나셨다고 일러주었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태복음은 여자들이 무서움과 어떤 기쁨으로 제자들에게 소식을 알리러 달려가다가 주님을 만난체험을 전하고 있다. 마가복음은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렸으나 믿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처음 당한 일이었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누가복음은 말도 안되는 헛소리로 듣고 믿지 않았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가슴이 뜨거워졌다. 엠마오로 갔던 제자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급히 되돌아왔다. 이미 다른 제자들도 함께 모여 있었다. 그리고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다.’고 서로 감격한다. 요한복음은 어떤가? 예수의 시신이 없어져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찾아와, 주님은 “마리아야!” 부르셨다. 처음에는 동산지기인줄 알았다가, 그의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부활하신 주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의심하고 있는 주님의 못자국난 손과 창자국난 옆구리를 만져보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고 말했던 도마에게 찾아오셔서, “본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에게 복되도다.”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아지트 같은 곳에서 두려움에 문을 꼭 걸어잠그고 있었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는 그 문을 용기 있게 활짝 열었다. 마치 동굴문이 열리듯이 말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알렸다.

 

이것이 복음서가 증거하고 있는 부활하신 날의 모습이다. 천사들이 예수의 부활을 알렸으나 믿지 않았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무엇이 바뀌었을까?

 

  1. 믿음과 체험의 우선순위

먼저, 생각해볼 일이 있다.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부활신앙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체험과 믿음 중 우선순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1) 부활신앙이란 무엇일까? 일차적으로는 죽었던 몸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일 테다. 그리고 살아계신 주님께서 여전히 우리에게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놓칠 수 없는 중요한 것이 있다. ‘주님은 사망과 어둠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이길 힘과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이다. 십자가 고난 뒤에 분명히 부활영광이 있다. 현재 고난은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믿는 것, 이것도 부활신앙에 기초한 것이다.

 

2)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믿을 수 있는 것인가? 믿으면 만나고 체험할 수 있는 것인가? 흔히 억지로 믿어지지 않으니, 체험하고 믿을 수 있도록 증거나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주님께서 도마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보라. ‘본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되다.’고 말씀하셨다.

여러분 신앙체험의 신비는 보여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에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어서 복된 약속이 보이는 것이지, 약속에 대한 증거 때문에 믿는 게 아니다. 이 신앙의 원리를 잘 간파하라. 믿음을 갖고자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허락된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부활하셨다는 것을 증거한다. 의심이 가다가도 성령이 우리의 영과 더불어 증거하심으로 하나님을 믿게 된다.

 

3) 그렇다면 무엇이 바뀌었는가?

한 마디로 말할 수 있다. ‘부활의 첫 열매되신 주님과 동행하며 삶을 이기었다.’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체험 때문에 일어난 일을 보라. 성경이 전체적으로 증거하고 있는 내용은 이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자들을 위해 기도하니, 병자가 나았다. 귀신들린 자를 위해 기도하니 귀신이 떠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제자삼고 세례를 주었을 때 성령이 임했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마술적인 신비를 절대화하고 맹신에 빠지는 것이다. (신사도주의)

성경을 보면 마치 사도들이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을 부여받고 그렇게 한 것처럼 읽힌다. 그래서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을 찾거나 불신한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전이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또 이것은 성경이 금하고 있는 내용이다.

 

오늘 말씀에서도 고넬료에게 베드로가 찾아오자, 발 앞에 엎드려 절한다. 그때 베드로가 뭐라 말하는가? 26절에, ‘나도 사람이라.’ 베드로가 고넬료를 일으키며 만류한다. 부활의 능력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일이다.

 

부활신앙은 세상에서 창수가 나고 풍파가 일어도 무너지지 않는 든든한 반석 위에, 우리의 존재와 삶의 기반을 올려놓는다.

부활을 체험하고 확신한 이들의 삶은 핍박과 박해에도 그 푯대가 꺾이지 않았다. 고난과 환난 중에도 낙심치 않고 인내와 연단으로 알며 소망을 이루었다. 주님은 부활의 권능과 능력을 위임받았음을 믿고 담대히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바라신다. 그렇다면 그 비법은 무엇일까?

 

  1. 그때서야

1) 첫째, 부활의 능력은 간절한 기도와 열심을 통해 나타났다. 성도들은 믿음을 가지고 열심을 다해 기도했고, 합심하여 기도했다. 그 중에 능력이 나타나고 역사가 일어났다. 베드로가 박해로 인해 투옥됐을 때도 성도들은 그의 석방을 바라며 기도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 그들의 기도와 찬송은 감옥에서 모든 죄수들과 간수들이 들었다. 성도들이 서로 떡을 떼며 사랑하고 합심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말씀이 흥왕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마태복음18:19-20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실로…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때 계신 주님은 누구신가? 부활하신 주님이시다. 합심하여 기도하면서 우리는 그 주님의 능력과 역사하심과 함께 하심을 체험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이라고 고백된다. 교회가 한 몸 되어 기도할 때, 주님이 함께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어떻게 한 몸이 되는가? 우리는 신앙고백을 하면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오늘의 말씀을 보자.

어느 날 이달리야의 백부장이었던 고넬료가 기도하는 중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라는 것이었다. 베드로도 기도하다가 부정한 짐승이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잡아먹으라는 음성이 들리는 환상을 보았다. 베드로가 결코 깨끗한 것을 먹을 수 없다고 하자, 소리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음성이었다. 세 번이나 반복됐다.

도대체 이런 응답과 환상들은 무엇일까? 따로 떼놓고 보면 별개의 것 같다. 하지만 아니다.

그 때, 베로가 머물고 있던 집에, 초인종이 울린다. 고넬료가 보낸 하인이다. 그때서야 베드로가 깨닫는다. 기도 때 보여주신 환상의 의미는 무엇인지, 성령의 인도가 무엇인지 말이다.

 

기도 가운데 이런 만남이 주선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10:19-20).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고 동행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기도하면서,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시는 일들을 만나라. 그분이 부활하신 주님이 아니시고 누구시겠는가?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게 하시는 이유를 발견할 때가 있다. 서로 간절한 마음으로 합심기도 하다가 응답받고 문제가 해결된다. 태산 같이 큰 어려움과 환난이라도 이기며 승리한다. 주님은 권능의 하나님이시다. 주님은 섭리하시는 분이시고 부활의 능력이 되어주신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주님께서 도우시고 힘이 되어주신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을 살기를 바라신다. 기도하면서 살 소망을 주시고, 믿음과 확신을 더하신다.

우리교회가 비록 작지만 부활하신 주님의 권능과 은총으로 기도의 역사와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되어야 한다.

 

2) 둘째는, 하나님 사랑을 위해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순종을 따라 삶을 통해서 부활의 능력이 나타난다. 내 뜻, 생각, 나의 세계가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선택해야 한다. 순종하지 못하고 내생각대로 하다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는커녕 복된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베드로가 하인들을 따라가 간 곳은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의 집이었다.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이 다 모여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접촉하는 것을 꺼렸다. 부정하게 될까봐 그렇다. 베드로의 생각은 그렇지만, 그는 자기 생각대로 하지 않았다. 29절을 보면,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부활하신 주님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이러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알면서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순종하지 않거나 못하는 것만 불순종이 아니다. 알면서도 미루고, 미루다가 놓치는 것도 불순종이라 할 수 있다.

베드로가 무슨 일로 불렀는지 묻는다. 고넬료의 말을 듣다보니까, 참 신비하다.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 욥바에 유숙하고 있던 베드로를 부르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 시간 베드로 자신은 어떤 모습의 환상을 보고 있었던가?

여러분, 고넬료에게 베드로를 부르도록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베드로에게 따라가도록 하라는 마음을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33-5절을 보면, 베드로에게 그 이유가 이제 분명해졌다. 33절에서 고넬료가 말한다.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베드로가 감탄한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고넬료를 구원하시려는 계획과 섭리가 이런 신비한 방법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36-41절은 고넬료에게 그것을 가르치며 증거하는 내용이다. 주님께서 고넬료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 그것은 외모나 혈통이나 율법이나 조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때서야 고넬료가 깨닫는다. 베드로에게 이 복음과 구원의 소식을 듣게 하시려는 은혜였다는 것을 말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데, 고넬료는 얼마나 복된 사람인가? 이미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까지도 복음을 듣기 위해 모여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이런 믿음이 든다. 부활의 주님은 사람들 사이에 살아 역사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말이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뜻,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 사랑의 섭리… 이런 것들을 기도하다가 깨닫기도 하지만 순종하고 믿음으로 따르다가도 깨닫는다.

여러분,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주님과 동행하면서, 주님 주시는 마음과 음성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은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라. 그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길을 잃은 삶이 아니라,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도록 사는 사람이다. 기억하라. 그 사람이 복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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