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3일 사순절 5주

 

선한 목자이신 사랑의 하나님, 사순절 다섯째 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꽃샘추위가 봄을 시샘해도, 곧 더 따뜻한 봄기운이 새생명의 새삭들을 틔우고 있음을 봅니다. 그 새로운 생명으로의 변화를 바라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은혜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참 포도나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골1:4-5)

 

  • 길을 잃은 문명은

이세돌이 알파고에게 대국에서 패하면서 4천년 바둑의 역사뿐만 아니라 인간 두뇌와 정신사가 길을 잃은 것 같다. 과학문명의 발달은 반길만한 일이지만, 길을 잃을 경우 무섭다.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의 뼈아픈 교훈이 그랬다. 인류문명과 과학의 발달, 이성의 발달에 대해 낙관하고 맹신했는데, 인간은 얼마든지 무시무시한 일을 벌일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줬다. 전쟁과 학살의 도구로 사용하고, 이성은 이데올로기를 맹신하면서 괴물로 변했다.

인류의 역사가 길을 잃지 않도록 도전과 응전을 잘 해야 할 시기이다.

 

  • 길을 잃었던 바울

1) 바울이 빌립보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빌립보 교회가 길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해 있다. 바울은 로마에 투옥돼 있으면서, 그 위기에 처한 빌립보 교회에 편지한다. 그것이 빌립보서이다.

 

바울은 무엇 때문에 길을 잃었던 것일까? 그리고 지금 빌립보 교회는 무엇 때문에 길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는가?

 

바울이 빌립보에 처음 복음을 전할 때는 2차전도 여행에서였다. 그때는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도 없었고, 모임도 없었다. 회당을 기반으로 복음을 전하던 바울에게는 참 난감한 일이었다.

빌립보는 마게도냐로 진출하는 첫 관문이었는데, 여기에서 복음의 문만 열린다면 나머지는 수월할 거라고 생각했다.

몇날 며칠 방법을 찾다가, 답답한 마음에 기도할 곳이 없을까, 찾다가 강가에 앉아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여인들을 만났다. 거기서 우연처럼 자색 옷감 장수였던 루디아를 만났다. 그게 인연이 되어 빌립보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2) 왜 길을 잃었다고 하는가? 그가 기도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 가다가, 매일 그를 괴롭히는 여인이 있었다.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사도행전16:18이 전하는 말이다. 그는 귀신들린 사람이었는데, 점치는 일을 함으로, 그 주인에게 상당한 이익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가 매일 바울에게 따라붙어 소리를 지르며 괴상한 행동을 했다. 소란을 피우고 괴롭혔다. 복음을 전하는데 소란은 결코 이로운 것이 아니다. 걸림이 된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다. 그는 ‘바울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한다.’ 외치면서, 영적인 영역에서 만큼은 바울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신기한 일이다.

 

처음에는 이 귀신들린 여인의 행동이 귀찮아서, 외면하다가, 나중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기로 마음을 먹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그랬더니, 귀신이 나갔다. 여인은 온전해졌고, 더 이상 점을 치거나 귀신에 사로잡힌 행동을 하지 못했다. 정상처럼 되었다. 멀쩡해졌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됐을까?

3) 이러한,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 때문에 잘되기는커녕, 바울에게 시련이 따른다. 귀신들린 여인을 노예처럼 부리며, 이를 이용해 뒤에서 큰 수익을 올리던, 포주가 화가 났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심하게 구타를 가하고, ‘풍속을 어지럽히는 자’라는 혐의를 씌워서 로마의 관리청 상관에게 고발한다. 그래서 감옥에 갇히게 됐다.

여러분 바울의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잘한 일일까? 못한 일일까? 괜한 행동을 했던 것일까?

바울이 한 일은 당연한 것 같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의 제사장이나 레위 같이, 그런 심정이 들었다. 더 많은 사역을 위해서 피해갔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가 감옥에 갇히게 되자,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이렇게까지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바울은 이미 길을 잃었다.

 

4) 그런데 성경이 이것을 객관화시켜 증거하는 것은 우리에게 이것을 일깨워준다. 인간적으로 말한다면 괜한 행동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인간이 믿음없이는 알 수 없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었다.

우선은 바울과 실라에게 기도와 찬송을 주셨다. 어떤 체험이 스며들었을까? 곧 마음의 평강이 찾아왔다. 여러분 길을 잃었을 때, 기도와 찬송만큼 길을 찾게 하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불속에서라도, 물속에서라도 주님은 은혜와 평강을 주시고 살 소망을 주신다. 그제서야 그는 다시 길을 찾을 수 있게 됐다.

귀신들렸던 여인은 어떤 사람인가? 학자들은 이 여인이 귀신들렸던 이유에 대해, 그 원인이 빌립보에 있었던 로마의 군사작전 때문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전쟁의 상처 때문에 온전치 못하고, 심령의 상처가 심하고 허약해지다 보니, 귀신에 붙잡히게 됐다. 바울을 괴롭힌 이유는 귀신에 사로잡힌 심령이 자유와 구원을 간절히 바라는 절규였는지도 모른다.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구주가 없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바울을 그것을 외면한 채 불편해하고 괴로워하기만 했다.

그가 맞서야 할 것은 자신을 괴롭히는 이 여인이 아니라 그 여인을 교묘히 이용해서 돈벌이 수단으로 삼고, 그 많은 수익에 침을 질질 흘리며 악마적인 미소를 짓던 주인의 탐욕이었다.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나, 잘한 일이다. 이러한 십자가가 없다면 그는 예수를 믿고 증거하고 전해도, 사실은 예수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바울을 낯선 도시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겠다는 생각에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자기 앞에 다가온 사람의 고통을 미처 살피지 못했다(김진호, 리부팅 바울, 93). 또한 그녀의 고통 뒤에 가려진 빌립보 사람들의 고통을 짐작하지 못했다.

 

5)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푯대를 잃어버리면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에서는,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니”라고 말씀했다.

 

성령의 또 다른 인도하심과 역사가 있다. 이 십자가 때문에 오히려 빌립보에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됐다. 감옥에서 그 찬송과 기도소리를 죄수들이 듣고 감동감화가 있었다. 지진으로 옥문이 열렸는데, 바울이 보인 마음의 평정 때문에 간수가 감동을 받았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구원을 받으리라.” 그것이 기회가 되어 그와 그 가정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

그러니 십자가를 두려워하지도 말라. 거기에는 성령의 역사가 함께 있다. 보혜사. 사람이 측량하거나 계산할 수 없다.

 

  • 길을 잃을 위기에 처한 교회

빌립보 교회는 사회저변에서부터 고통당하는 영혼을 외면하지 않고, 십자가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며, 고난 가운데 주님께서 주신 평강 위에 세워진 교회이다.

 

그렇다면 빌립보 교회는 왜 길을 잃을 위기에 처해있는가?

오늘의 말씀, 2절을 보면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들은 누구를 말하는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할례당 사람들이다. 즉 유대인이다. 3절에서 ‘우리가 곧 할례파’라고 말하는데, 그때의 그 의미는 아니다. 앞에서의 단어는 ‘카타토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고, 바울이 스스로를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페리토메’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음가가 비슷하다. (카타토멘/페리토멘) ‘카타토멘’은 본래 정신과 내용은 상실한 외형적인 할례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고집스럽고 완고하다.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 이 한마디가 할례의 올바른 정신을 자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페리토멘’은 그 참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이들은 타지방에서 들어와 바울이 이루어 놓은 일들을 무너뜨리고 어지럽히려고 했다. 바울은 이들에 대해서 다소 격분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순전한 공동체를 거짓으로 물들이고 복음을 훼방하는 위협을 가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는 먼저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이타적인 사랑과 헌신과 수고의 십자가 정신보다는 율법적인 규율과 배타적인 사랑과 이기적인 복을 받고 잘되는 것을 신앙의 기준으로 일삼는 이들이었다. 자기의 의를 자랑하고, 그 공로와 업적을 내세워, 믿음의 사람들 속에 있는 예수를 흔들어 놓는 사람들이었다.

 

과연 예수를 믿은 신앙이 쉽게 변질 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의외로 영적인 분별력을 잃고 쉽게 변질될 수 있다. 사람들 사이에 자기 공로와 의와 자랑을 늘어놓으면서, 불필요한 경쟁심과 자만심을 부축이고, 남을 정죄하거나 미움과 적개심을 심어놓는 행위를 통해서, 참 그리스도의 신앙은 쉽게 변질되고 왜곡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자신이 옳다고 신봉하는 이데올로기 같은 신념을 가지고 얼마든지 그렇게 만들 수도 있다. 이것이 지난 시대의 뼈아픈 교훈이기도하다. (미국의 한 대선주자 너무나도 히틀러를 닮았다. 그런데도 열광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 악마성에 쉽게 잠식되곤 한다.)

 

여담이지만 오늘 우리 시대의 모습을 보자. 한국교회의 모습도 그런 것 같다. 예수를 잃어버린 한국교회. 대기업같은 성장의 역사를 그리스도의 역사와 능력이라고 위장하고 포장은 하는데, 예수님과 십자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예수의 마음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약자들의 편을 들기는커녕 권력과 부와 명예에 아부한다. 그래서인지 말씀이 흥왕하고 병고침을 받고, 성령의 역사와 능력이 일어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참복음의 역사, 그 모든 것이 사라진 듯하다. 그러니 정말 우리가 예수님 잘 믿읍시다.”

 

다시 빌립보 교회로 돌아와 보자. 누가 옳으냐, 어느 쪽이 옳으냐, 물을 때, 그것은 무식한 변론이 되고 만다. 그리고 어느새 편이 갈리고, 다툼과 분쟁이 시작된다. 예수님과 그 십자가는 사라지고 길을 잃게 된다.

 

  • 길을 찾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공동체의 길, 참신앙과 믿음의 길은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

 

1) 첫째, 바울은 ‘내게 유익하던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처럼 여긴다.’고 말한다. 누가 옳으냐? 어느 쪽이 옳으냐?

바울은 한 때, 할례당에 서있던 사람이다. 우리가 이것을 너무나 잘 안다. 4절에서부터 6절까지의 말씀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성경을 보라.

육체, 혈통, 가문으로 말하자면 손색이 없다. 유대교의 전통에 따라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며, 율법으로는 완벽하고 흠이 없는 바리새인이다. 인간적인, 자랑이 많은 사람이다. 그는 자기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남을 정죄하고,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멀쩡한 사람을 박해하고 미워했다. 기독교인은 찾아내서 죽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던 사람이다. 자고했는데, 그 우월감은 당연하다고 여겼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 모든 자랑, 그것이 뭐가 어떻단 말인가?’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부끄럽다. 이런 행동, 행위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부서졌다. 예전에 신봉했던 것들은 사실 냄새나는 배설물이나 다름없었다(9절).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야 말로 고상한 것이다. 그 삶이야 말로 거룩하고 복된 삶이다.

 

신앙의 진위 여부가 판가름 나는 지점이 어디인 줄 아는가? 누구나 평소에는 자기 생각과 자기 의가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고난이 닥치고 어려움이 닥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자기를 더 의지하다보면, 하나님의 능력과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 능력을 믿지 못하고, 믿음 없이 넘어지고 만다. 그런데 반면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며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 삶은, 그 권능을 크게 믿고 확신에 이르러, 부활의 능력과 영광과 소망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의 훈련이 필요로 하다.

예수를 잃어버리면, 의심이 자꾸만 찾아들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본받으면,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의 확신이 더 강하게 자리한다.

 

2) 둘째,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고자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다.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란 무엇일까? 회개, 사랑, 용서, 감사, 헌신… 이런 체험들을 아시는가?

바울은 귀신들린 여인을 고쳐준 이유 때문에 감옥에 갇혔을 때, 거기서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는 체험을 하고 길을 찾았다. 감옥에서 뉘우침이 찾아왔다. 원망보다 사랑하는 마음이 찾아왔고, 불평보다는 감사가 찾아왔다. 자신을 도왔던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잃었던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면서 주님께 죄송했다. 예수님의 마음이 그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것을 몸소 체험했고 확신이 넘쳤다. 여러분, 이런 평강이 부활의 권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3) 12~14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얻기 위하여 달려가노라.“

 

하나님은 우리 각자와 교회공동체가 올곧게 믿음의 길을 걷길 원하신다.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는 자가 되길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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