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6일. 사순절 4주
피조물을 통해서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사순절 넷째 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봄비와 함께 남녘땅에 꽃망울이 터진다는 소식이 겨우내 움츠렸던 어깨를 활짝 펴게 하는 때에, 주님께서 주시는 힘과 용기를 바라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만져주심으로 움츠렸던 어깨가 활짝 펴지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수5:15)
- 맥락
오늘 말씀의 맥락부터 살펴보자. 본문의 위치는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를 차지하기 전에, 첫발을 내딛은 가나안 길갈에서의 이야기이다.
- 요단강을 건너다
이스라엘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섰다. 그 많은 인원이 홍해를 건널 때처럼, 요단강을 건넜다. 성경은 ‘마른 땅으로’(3:17)으로 건넜다고 전하고 있다. 홍해를 건널 때도 그랬는데, 요단강을 건널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큰 물줄기 거세게 흘러내리던 물이 그치고, 백성이 다 건널 때까지, 무사했다. 어느 누구도 익사사고를 당하지 않았다. 그 감격은 벅찼다.
하나님은 이런 마음을 주셨다. 12돌 ; 12지파가 무사히 생존할 수 있도록 도우심을 기념하기 위해, ; 12돌을 길갈에 세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다음 세대 역시도 그 좋으신 하나님을 잊지않고 영원히 의지하여 살아가기를 염원하고 기리기 위함이었다.
여러분, 신앙의 체험을 들려주는 믿음의 유산만한 위로와 격려가 없다. 생각해보라. 우리의 자녀들은 인생의 고난과 어려움을 만나지 않는가? 위기와 곤고한 일을 당하지 않는가? 그때 무엇이 위로며, 격려며 도와주는 것인가? 내가 경험한 신앙체험, 그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언하는 것, 용기를 내도록 하는데 그 만한 위로와 격려가 없다.
“너희 자손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묻기를 이 돌들은 무슨 뜻이니이까 하거든”
그러면 이렇게 간증하고 힘과 용기를 주어야 한다.
“홍해를 가르고 건너게 하셨던 하나님께서, 이 요단강을 건널 때에도 마른 땅 같이 건너게 하셨다. 하나님의 손이 강하신 것을 믿고, 항상 경외해야 한다.”(수4:23-24)
저는 제 자녀인 은지와 수지가, 이런 믿음의 유산을 꼭 간직했으면 좋겠다. 인생의 참 도우심이요, 살아계신 분이라고 말이다. 그분께서 너희를 도우실 것이니, 굳세고 담대하며 힘과 용기를 내라고 말이다. 이만한 유업이 없다. 이걸 모르고 주일도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고, 나중에 믿음생활을 하라고 가르치는 부모가 있다면 정말 어리석은 것이다.
- 상천하지의 하나님
이제 강을 건너면, 모든 것이 완료되는 것이 아니라, 차지해야할 산지들이 있다.
우리 인생은 3고를 잘해 내면 승리가 온고 한다. ‘참고’, ‘견디고’, ‘이기고’
애굽은 ‘참고’의 삶이었다. 광야는 ‘견디고’의 삶이었다. 가나안은 ‘이기고’의 삶이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라.’라고 말씀하셨는데, 가나안에는 여러 부족의 왕들이 있다. 예전에 아낙자손이라 겁을 먹었던 것을 기억해보라.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왕들의 ‘간담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다.’(수5:1) 이스라엘을 보고 그렇게 됐겠는가?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그렇게 된 것이다. ‘상천하지의 하나님’(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다.)
- 할례를 명령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뜻밖의 명령을 내리신다. 그곳 길갈에서 할례를 행하라고 말이다. 애굽에서 나온 백성들은 할례를 받았지만, 광야에서 난 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오늘 말씀은 바로 그 대목이다. 그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난공불락이라고 불리는 여리고성을 점령한 사건이 기록되고 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가나안 땅에 입성 → 할례 → 여리고성 정복
할례가 뭔줄 알고 있지 않은가! 남성의 민감하고 주요한 부위에서 둔감한 표피를 잘라내는 것이다. 낳은 지 8일만에 할례를 행하고 하나님과 계약을 맺으며 백성이 되는 중요한 의례였다. 그래서 무할례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제한이 있었다. 무할례(창34:14)를 수치스럽게 여겼다.
은유적인 의미로도 사용된다.
신10: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롬 2:29,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의미, 그것은 알겠는데, 과연 지금이 할례를 행할 때인가?
우리 인생은 늘, 내 뜻과 방법 하나님의 뜻과 방법이 달라서 갈등하고 시험에 들 때가 있다. 내 방법은 현실적이고 명료하며 즉각적인데, 하나님의 방법은 비현실적이고 애매하며 희미하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첫발을 내딛었는데, 첫 대결이 여리고성이다. 난공불락, 철옹성. 이 말이 여리고성을 설명해주는 좋은 말이다. 이런 단어가 보여주는 삶을 우리가 인생에서 만날 때, 어떤가?
사정이 이러한데, 할례라? 어떻게 싸움에 나가서 이기겠는가? 예전에 야곱의 딸 디나의 일로 세겜에서 벌어진 일을 기억해보라. 세겜의 남자들이 모두 할례를 행하고 고통받는 동안, 야곱의 아들들(; 고작 얼마나 되겠는가)은 너무나 쉽게 그 지역을 도륙했다. 이처럼 여리고성의 정복을 앞두고 할례를 행하면, 여리고성의 군사들이 갑자기 문을 열고 달려나와 도륙하면 어떻게 되는가?
때때로 하나님의 방법과 말씀은 이런 딜레마에 빠지게 만든다. 주님은 강하고 담대하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아무리 극히 ‘담대’(膽大)한다고 해도, 그 담대함만으로는 안 될 것 같다.
아시는가? 우리 불신앙의 포인트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베드로처럼 용기있게 첫발을 물 위에 내딛었을지라도, 거센 풍파를 보면서 점점 물속에 빠져가는 것이다.
3절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를 행하니라.’ 그의 순종이었다.
기회는 위기의 얼굴로 찾아온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움에 빠지고 용기를 잃는다. 하지만 믿음은 ‘위기의 얼굴’ 속에 있는 ‘기회라는 진심’을 보게 만든다. 그는 사람의 방법과 하나님의 방법이 다를 때, 하나님의 방법이 항상 옳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웠고 믿음으로 확신했다. 하나님은 우리 역시도 이 믿음의 신앙을 갖기를 원하신다.
- 신중한 용기
그렇다면, 왜 이제 할례를 행했을까? 미리 하면 좋지 않았을까?
심한 갈증이 난 사람은 우물물을 마시기 전에, 나뭇잎을 띄워 마셔야 한다. 그마만큼 바쁘고 급하고 중할수록 여유가 필요하다는 말일 것이다.
옛날에 어떤 장군이 전쟁터에서 돌아오는 길에 목이 말라서 우물가에 있던 처자에게 물을 청했다. 그랬더니 물에 나뭇잎을 띄워서 주더라는 것이다. 왜 나뭇잎을 띄웠냐고 물으니, 뭐라 말하는가? 급히 마시면 체하니 나뭇잎을 불면서 천천히 마시라는 뜻이었다는 것이다. 장군은 그 처자의 슬기로움에 반해 아내로 삼았는데 그 장군이 훗날 고려를 건국하는 태조 왕건이고 그 처자는 왕비가 되는 유씨부인이며 그때 물바가지에 띄웠던 나뭇잎이 버드나무 잎이라고 전해진다.
마찬가지로 어떤 일을 성급하게 하려고 들거나, 자신의 용기나 담대함을 맹신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을 담대하다 말할 수도 없고, 용기 있다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무모한 용기에 불과하거나 어리석을 수 있다. 맹신이나 미신에 가까울 수 있다. 일을 그르치고 더 큰 낭패를 겪기도 한다. 이점 때문에 어쩌면 더 망설이고 주저하는지도 모른다.
여리고성을 점령한 뒤에 일을 보라. 아이성을 점령할 때, 정탐을 마친 뒤의 판단은 이랬다. 군사 2~3천명으로도 족히 차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정도는 하나님께 묻고 도움을 청할 필요도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결과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그 앞에서 패해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다.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되었다.’(수7:5)
성급한 마음이 가져다준 실수였다. 앞으로 갈 길이 먼데, 걱정이다. 이제 막 약속의 땅에 첫발을 내딛고, 여리고성 하나를 정복했을 뿐, 앞으로 정복해야할 곳이 많다.
여기서도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는가?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전쟁에 능한 것은 이스라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다. 사람은 성급함 때문에 이런 착각을 할 수 있다. 자만하고 교만하여 실수와 실패를 경험하기도 한다. 하나님 앞에 죄도 짓고 (; 아간의 범죄처럼 말이다.) 그분의 뜻과는 달리 행동한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없다는 영적 태만에 빠진다.
왜 이제 할례를 행했을까? 미리 하면 좋지 않았을까? 아마 그것은 중요한 일을 앞두고,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어떤 믿음의 결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 하나님보다 앞서가거나 혼자 가지 말아야 한다. 동행해야 한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할례를 행하고, 곧장 여리고로 달려간 것이 아니다. 8절을 보라.
“진중 각 처소에 머물며 낫기를 기다릴 때에”
충분한 회복과 치유의 시간을 거치면서, 10절~12절, 그 달 14일 유월절을 지켰다. 그 잔치를 생각해보라. 여느 잔치와 다르다. 잔치는 흥이 있는 것인데, 그것만이 아니라, 감사와 감동과 확신이 있었다. 이런 시간을 통해서 무엇을 경험하는가? ‘정화’, ‘새로운 힘’, ‘소망에 찬 기쁨의 확신’ 성급하게 물을 마시지 않도록 바가지에 띄운 버드나무의 꽃말은 ‘정화’, 능수버들의 꽃말은 ‘기다림’이라고 한다.
영적으로 말하자면, 베어냄의 상처와 고통 앞에 낫기를 기다리는 치유와 회복의 시간은, 꽃이 떨어진 자리가 아물어 열매가 맺어지는 것처럼, 좋은 열매와 결과를 위한 은총의 시간이다.
9절.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9b)
그러면서 보니까, 애굽의 노예생활, 척박한 광야생활, 마치 목자없는 양과 같은 줄만 알았던 삶 속에서, 하나님은 구원하시고, 인도하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약속을 지키신 분이었다. 그 하나님의 체험이 새롭게 깨달아지고 느껴지고 확신이 들며, ‘하나’라고 하는 결속의식이 다시 다져졌다. 이것은 여리고를 차지 할 때, 중요한 힘이었다.
11-12절, 그 땅에서의 소산물을 먹었고 만나는 그쳤다. 기쁨과 은혜는 충만했다. 순종의 삶에 대한 주님의 상급과 복이다. 저는 여기서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사람은 성과위주의 삶, 성공과 결과 위주의 삶을 살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는 삶을 바라신다.
1)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하며 순종하라.
2)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가로막고 둔감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제하라.
3)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는 삶의 방향을 택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