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23일 온라인예배실황
최근 광화문에서 일어난 무질서와 혼란은 코로나19와 수해로 어려워진 우리 사회를, 더 큰 위기와 곤경에 빠뜨린 일임이 분명하다. 마치 이 사회가 붕괴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처럼 절망과 고통에 빠뜨렸다. 전문가들이 이런 말을 한다. 신천지는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거짓 교리와 정보에 세뇌를 당해서, 아무리 진실을 이야기하고 옳은 이야기를 해도 소용이 없더니, 어느 교회와 관련된 이번 사태는 노인들을 중심으로 가짜뉴스와 정보에 세뇌를 당해서 어떤 말과 상식도 통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신천지 사람들은 교주가 하는 말 아니면 어떤 말도 믿지 않는데, 심지어 부모도 믿지 못하는데, 이 어르신들은 가짜뉴스를 전하는 유튜브 방송아니면, 아들딸들이 아무리 종용하고 설득해도 소용이 없더라고, 어느 사람이 방송에 나와서 소식을 전했다.
세상에서 제일 추악한 괴물을 보셨는가? 나는 보았다. 둘째 아이가 보는 만화영화 중에 ‘미랴큘러스 레이디버그’라는 시리즈가 있다. 악당이 평범한 사람을 미혹해서 하수인으로 만들어 세상을 지배하려고 한다. 레이디버그가 절친 블랙캣과 힘을 합쳐 미혹된 평범한 사람을 구해내고 악당을 물리친다. 평범한 사람에게 붙었던 검은나비를 붙잡아서 흰나비로 바꾸어 풀어주면 그 사람이 원래대로 돌아온다. 어느 일화 중에 악당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괴물을 만들겠다고 음흉한 짓을 한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어떤 괴물을 만들어낼까?’ 지켜봤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괴물이 무엇일까? 다름 아니라 레이디버그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 레이디버그를 만드는 것이었다. 친구 블랙캣도 분간이 어려울정도로 말이다. 블랙캣이 누구의 말을 듣고, 누구와 힘을 합쳐야 하는지 혼란에 빠졌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괴물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가 진짜처럼 행세를 하는 것 아닐까? 그게 괴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히든싱어라는 프로그램이 시즌 6을 방영하고 있는데, 거기서도 보면 모창가수가 진짜 가수보다 더 진짜처럼 노래를 부른다. 사람들은 경악하곤 만든다.
주님께서 마지막 때가 되면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 거짓 선생들이 일어나 택하신 자들도 미혹될 것(마24:24)이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다. 주님은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고 하여도 믿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정말 요즘 세상이 이와 같다. 요한1서2:18의 말씀이 들려 온다.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요한계시록이 전하고 있는 환난의 때에는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가? 많은 사람들이 미혹의 영에 사로잡히거나 시험에 들어 신앙을 잃고 주님을 저버린다.
주중에 어느 분의 부탁으로 위례 어느 곳에 다녀왔다. 아이엄마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여기에 못 다니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정말 낯 뜨겁고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교회에 안다니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까지도 실족하거나 시험에 들기 딱 좋은 때다. 온라인 예배를 드린다지만 자칫 신앙적으로 무디어지고 영적 갈급함을 상실하고 영이 소멸돼간다.
반면에 승리한 사람들이 있다. 요한계시록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이럴 때 일수록 여러분 모두가 영적으로 깨어있기를 주님은 바라신다. 여러분 모두는 신앙을 지키고 예수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세워진 부활하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지킬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을 살펴보자.
300명의 용사와 함께 미디안을 물리쳤던 기드온이 죽자 가나안 여인과 혼인해서 낳은 아비멜렉은, 친척외가가 있는 세겜으로 간다. 작당모의(作黨謀議)릉 위해서였다. “세겜 성읍의 모든 사람들에게 물어보아주십시오. 여룹바알의 아들 70명이 모두 다스리는 것하고 한 사람이 다스리는 것하고 어느 것이 더 좋은 지 물어보아주십시오.” – 모두 다스린다는 것은 연합체를 의미한다. 한 사람이 다스린다는 것은 독주권력을 말한다. – “그리고 내가 여러분들과 한 혈육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주십시오.”(삿9:2) 권력의 야욕을 드러낸다. 그 욕심을 가진 사람들끼리 야합한다. 세를 불려가는 것이다.
아비멜렉은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70개를 후원받는다. 그 돈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매수해서 자기를 따르게 했다. 아마도 기드온의 아들 70명의 아들들을 한 사람당 은 1개로 암살하기 위한 청부비용이었던 것 같다. 간신히 요담만 숨어서 살아남았고, 결국 아비멜렉이 왕이 된다.
사람들은 이미 아비멜렉에게 넘어갔다. 어리석어 말이 소용이 없는 지경이 됐다. 오늘 읽은 말씀은 요담이 우화 형식을 이용해서 현실작태를 강하게 고발하는 내용이다.
나무들이 왕으로 삼을 나무를 찾는다. 먼저 감람나무에게로 갔다. “우리를 위해 왕이 되라.” 말하니까, 감람나무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들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사양한다. 무화과나무에게 갔더니 무화과나무는 “나의 아름다운 열매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역시 사양한다. 포도나무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 포도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마지막으로 가시나무에게 갔더니, 가시나무는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위에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왕위직을 수락한다.
정상적인 믿음의 지도자, 하나님 뜻대로 사는 지도자는 하나님과 사람을 의해 살려고 하지 왕이 되려는 욕심과는 거리가 멀다. 사람들은 ‘내 그늘에 피하라’는 말만 들었지, ‘불사를 것이라는 말은 듣지 못한다.’ 그리고 그 그늘은 가시 그늘인데도, 당장은 인지하지 못한다. 그마만큼 눈이 멀고 어리석게 된다.
사사기는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는 아비멜렉의 나쁜 행태를 고발하고 있다. 사실 아비멜렉은 스스로 왕이 되려고 했지만, 왕은 하나님뿐이시다. 인간은 누군가를 지배할 수 있는 왕일 수 없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고 복종시킬 권리는 이들의 신앙의 눈으로는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비멜렉의 이름은 ‘나의 아버지는 왕이시다.’라는 뜻이다. 이름 자체가 가짜다. 거짓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권력을 취하고 싶은 사람들의 동조를 얻어, 스스로 왕이 되려고 했다.
세겜은 레위인들에게 주어진 성읍이었다. 도피성으로 사용된 곳이다. 분명히 그곳에는 하나님을 위한 제단이 있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제의를 드리기 위해 가까운 레위인들의 성읍을 찾았다. 그런데 그런 세겜에 또 다른 제단, 바알브릿을 위한 제단이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 세겜에 두 개의 제단이 있었던 것일까? 하나님을 위한 제단과 바알브릿을 위한 제단 말이다.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세겜에는 동시대에 만들어진 두 개의 제단이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더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제단에서 바엘에게도 제사를 드렸고, 그 제사에 레위인 제사장들도 방조했거나, 동조했거나, 앞장섰거나, 벌어져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상상이 가능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오늘날도 이런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지 않는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에서 정치와 이데올로기의 우상을 섬기고 가짜가 진짜처럼 행세하며 권력과 돈의 욕심에 눈이 멀어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들을 구덩이에 빠뜨리는 일을 말이다. 진짜 레이디 버그와 가짜 레이디 버그가 서로 자기가 진짜라고 주장하고, 우긴다. 내가 진짜라고 말하기도 우스운 상황이다. 가짜도 그렇게 말하니까 말이다.
주님은 당시에 모든 호사를 누리던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14:14)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우화가 오늘 다르게 해석된다. 가시나무가 왕이 되려고 했을 때, 무화과나무를 비롯한 좋은 나무들은 용납하고 허락하면 안됐다. 힘을 합치고 규합해서 막아냈어야 한다. 세심하게 아비멜렉의 행태를 예측하고 지혜를 모았어야 한다. 상관하지 않으려는 모습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가시나무를 용납하는 꼴이 됐다.
악한 영은 혐오를 부추기고 차별을 정당화하면서 미움과 적개심을 사람들의 입에 먹임으로 커간다. 그래서 타자를 자꾸만 미혹하고 오염시키는데, 선(善)에 지혜가 없으면 자칫 자신의 만족감에 젖어서 의로운 싸움에 등을 돌리고 악을 용납하고 만다.
오늘 우리가 바로 그렇다. 예언자들은 세상의 불의한 일과 죄악과 잘못된 일을 드러냈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알고 주의 말씀을 전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의 불의와 일탈을 드러내는 것이 듣기 싫다고 하여, 좋은 이야기 편안한 이야기에 취하는 버릇이 생겼다. 대형교회, 유명인사는 추켜세웠지만 예수님처럼 살아가려는 진짜는 보지 못하거나 외면하거나 얕잡아보기 일쑤였다. 스스로 맘몬이 되려는 욕망에에 사로잡힌 아비멜렉을 좇기 일쑤였다. 곰팡이가 떡 온덩이에 퍼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악당 같은 가짜들은 더 드세고 거칠게 힘을 규합하고 생떼를 쓰건만, 선하고 열매맺는 좋은 나무들이 이런 더러운 꼴을 보기 싫다고 하여 떠나가면 어찌되겠는가?
한국교회의 이런 모습이 싫다고 하여, 염증을 느낀다고 실족하여 교회를 떠나려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 이럴수록 선한 연대와 연합을 회복해가야 하지 않겠는가? 한 명을 감당하지 못했던 70명의 기드온의 아들들이 다시 일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믿음과 신앙으로 정말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회의감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어쩌면 저부터도 내심은 회의적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믿음은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여러분 패배주의와 낙담을 이겨내고 예수 안에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주님이 바라신다.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은 바로 이것이다. 한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인류가 죄에 빠졌지만 둘째 아담이신 예수가 순종함으로 온인류를 구했다. 그래서 로마서5:19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프라하의 봄을 맞았지만 소련의 침공으로 자유를 빼앗기고 프랑스로 망명해서 활동했던 밀란쿤데라의 작품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농담’이라는 작품 2부, 헬레나의 경험담이다.
광장에는 적어도 오만명은 넘는 인원이 운집해 있었고, 그 떠드는 소리가 너무나 거대해서 자기 악단의 목소리는 너무나 미약했다. 군중은 압도적이었고, 그 소리와 싸워야 하는 자기들의 노래는 절망적이었다. 노래의 첫 구절을 부르고 나면, 아무도 듣지 못하고, 그대로 공연은 끝나고 말거라고 생각했다. 그 때 기적이 일어났다. 군중들이 하나둘씩 그들이 부르는 노래에 가세하기 시작했고, 노래는 마치 나비가 대혼란의 거대한 번데기 껍질을 뚫고 나오듯 광장의 대복마전으로부터 서서히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모두가 함께 부르는 노래가 됐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낙담하지만, 주님은 우리 각자각자가 퍼저가는 그리스도의 향기요, 예수의 노래가 되기를 바라신다. 멜로디만 노래가 아니다. 순종도 노래고, 믿음도 노래며, 사랑도 노래이고, 헌신과 봉사도 노래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의 노래로 부른다면 이런 일들이 일어날지 어떻게 알겠는가? 어린 아이가 주님께 드린 오병이어도 아름다운 나눔의 노래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와 나라를 자기 생각과 자기 잣대로 제한할 수 없는 일이다.
주님은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느니라 말씀하셨지만, 그러나 우리의 평범한 부모요, 정다운 이웃이기에 구덩이에 빠지도록 내버려 둘 수 없는 것이다. 아니 주님께서 목자 없는 양 같이 불쌍히 여기신 무리들이 구덩이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셨다고 착각하면 안된다. 그래서 주님은 고을 마다 찾아다니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부지런히 가르치시며 섬기고 나누셨다. 끝내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멸망과 사망에 이른 이들을 건져주셨다.
섬김과 나눔의 십자가는 오늘 우리가 가장 아름다운 화음으로 불러야 할 노래이다. 오늘 우리가 교회에 모여서 대면예배를 하지는 않았다. 2주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만 더 길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우리들끼리만 모여서 섬김과 나눔 갖는 것을 아쉬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웃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양보하고 섬기며 나눔을 실천했으면 좋겠다. 또한 교회를 지키고 믿음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 늘 깨어있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