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임에서 건져진 생명(마태복음2:13-18)

죽임에서 건져진 생명(마태복음2:13-18)

 

 

2017년 12월 24일 강림절 제 4주

 

선한 목자이신 사랑의 하나님, 강림절 넷째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세상 곳곳이 갈등과 분열, 폭력과 죽음으로 신음하는 때에,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평화를 누리기 위해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품 안에서 평안과 평강을 얻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1. 죽임의 현실

신생아들이 병원에서 죽고, 제천의 화재사고로 공식 집계 29명이 목숨을 잃었다. 초등학교 6학년생이 아파트 8층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했다. 학교폭력 때문이었다. 다행히 나뭇가지에 걸려 목숨을 건졌다. 유명 가수가 자살한 사건도 있었다. 모 대학병원 간호사들이 장기자랑에서 낯 뜨거운 춤을 강제로 춰야 했다. 을의 입장에서 모욕감과 수치심을 느끼면서까지 어쩔 수없이 지시에 따라야 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관리책임자들은 그런 일을 시킨 적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스스로 과도한 경쟁으로 그런 것이라 책임을 회피한다.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서는 이 현실이 신생아 병동에서 일어난 사건과 무관하지 않음을 심도 있게 보도했다. 비트코인이라고 하는 가상화폐 때문에 세계의 경제가 출렁거렸다. 이 사건의 발화점이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투자금이 큰 파도처럼 널뛰기를 하면서 실족하게 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심지어 자살하는 사람까지 나오고 있다. 장난처럼 시작된 일이 이렇게 크게 번질 줄은 몰랐다고 한다.

소수의 대형교회는 그리스도 예수와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 “그 번영과 성장 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다하셨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더욱 침체를 면치 못하고, 일각에서는 “이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당하셨다.”고 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이 서로 관계없는 일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거대한 돈과 권력과 폭력의 카르텔이 있음을 본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수많은 유아들이 살해당했다. 메시아 탄생의 소식에 두려움을 느낀 권력자의 추악한 죄악이었다. 모세 때도 그랬다. 애굽의 바로왕은 수많은 핍박에도 히브리인들이 번성하는 것을 보면서 유아들의 살해를 지시했다.

그러고 보면 무소불이의 권력자라고 해도 두려움이 있나보다. 성경은 동방에서 그리스도의 나심을 예견하고 예루살렘까지 찾아온 이들이 그 소식을 전하자, 예루살렘이 소동했다고 짤막하게 전하고 있다. 하지만 그 사이의 소용돌이를 시대의 행간 속에 읽어야 한다. 참 역설적이게도 불의한 권력자가 두려워하는 게, 바로 갓 태어난 생명들이다. 갓 태어난 생명은 너무나 미미한 소망이나 희망처럼 보임에도 어둠이 빛을 싫어하듯, 파장효과는 컸다.

한편에서는 화려한 미석으로 지어진 성전, 유대인의 전통과 율법을 중시하는 보수적 가치, 다른 한편에서는 로마의 화폐경제 체제 속에서 일어나는 번영에 대한 기대감, 가이사랴, 디베랴와 같은 신도시 건설과 개발에 따른 신문화에 대한 화려한 청사진이 공존한다.

그런데 그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부조리들이 있었다. 번영 이면에 더 살기 어려워지고 뭔가 궁핍해진듯하며, 실제로 소작인으로 몰락한 사람들은 더 추락하여 날품팔이가 됐다.

이 시대의 모순이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엿보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누가복음13장을 보면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제물에 섞은 일이다. 유혈사태를 낳은 보복의 피를 제물에 섞음으로 물타기에 성공했다. 이 사태의 근본 원인을 물어야 할 본질은 희석됐고, 어떤 갈릴리인들은 매도됐다. 그들이 저주받을 만한 죄를 저질러서 당한 것이고 그들의 피 때문에 자신들까지도 더럽혀졌다는 인식으로 변질 됐다. 그래서 주님은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와 같은 일을 당함으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이 이야기를 전하는 이들이 기대하는 반응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내 놓으셨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생명으로서의 자부심은 사라지고, 아니 망각하고 정죄와 멸시와 차별과 학대를 스스로 저지르고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여러분 돈과 권력과 폭력이 만든 결과는 무엇일까? 바로 ‘죽임의 세상’이라는 것이다. 개개인의 희생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개의치 않았다.

예루살렘에 일어난 소동과 그 후에 일어난 유아살해는 ‘죽임의 세상’을 향해 달려가려는 불의하고 악한 세상의 단면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근대사회 이전에는 권력자들이 자신의 영달을 지키느라 그랬다지만, 민주사회인 지금은 과연 어떤가? 누구 혹은 무엇의 지배를 받기 때문일까? 이제는 사람이 아니라 자본이라는 물질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 아닐까? 천박한 자본주의가 우리 사회를 병들고 신음하게 하며 죽음으로 생명을 내몰고 있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OK라고 하는 것이 천박한 자본주의다.

 

 

  1. 죽임의 현실 속에 하나님의 뜻

강림절 4주차,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는 오늘,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깨닫기를 바라실까?

강림절은 그리스도로 오시는 예수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그 탄생을 축하하고 기뻐하며 희망을 찾는 시간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구세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자.

한 마디로 말할 수 있다. “죽임 속에 건져진 생명이 있다.” 하나님은 죽음의 굴레와 불구덩이에서 한 아기의 생명을 건져내신다.

 

이런 식의 인식은 그릇된 인식이다. 수많은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주신다는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이 세상의 죄를 심판하시기 위해 세월호를 물에 빠뜨리셨다고 말하는 몰상식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말이다. 어둠이 빛을 싫어하여 벌이는 수작들일 뿐이다. 오히려 이렇게 보는 것이 맞다. 마태가 복음으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이것이다. 폭력의 횡포와 비극적인 죽임의 시나리오에서 모세를 건져내셨듯이, 예수를 건져내셨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에게도 폭력과 죽임의 구덩이에서 건져내시길 바라신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막강한 조직과 군대를 앞세워서 헤롯이 유아를 살해를 지시하고, 이 땅의 라헬들이 자녀 잃은 슬픔 때문에 위로받기를 거절할 때, 세상이 그와 같더라도, 하나님은 죽임과 파괴의 세상에서 건져진 생명이 있음을 깨닫고 위로와 소망을 갖기를 원하신다.

아무리 세상이 생명에 죽임의 차꼬를 채우고 가두려고 해도, 거기에서 생명을 건져내시는 하나님의 경륜이 있다. 하나님은 이런 일들을 속히 하길 바라신다.

 

강림절 넷째주를 맞아, 죽음에서 건져낸 생명이 있다는 복음에 우리의 믿음에 용기가 생기고 와 절망과 탄식에는 소망과 기쁨이 넘치기를 주님은 바라신다.

가정폭력, 학교폭력, 자본의 폭력, 데이트폭력 등등 각종 폭력이라는 죽임의 질병에서 주님은 우리가 품는 화목과 평안의 꿈이 좌초되기를 원치 않으신다. 인종차별과 소수자에 대한 학대, 국가와 국가 간의 분쟁이라는 죽임의 질곡에서 우리가 품는 평등과 평화의 이상이 걸려 넘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아기 예수와 같은 가냘픈 생명일지라도 말이다. 갑을 관계의 열패감을 모욕감, 자괴감이라는 치명적인 마음의 상처에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의 형상이 있음이 망각되어 영원히 사라지기를 원치도 않으신다. 인생의 쓴맛, 실패와 패배, 고난과 고통의 불행한 삶에서, 바위틈에서도 화초가 피어나듯, 끈질긴 생명의 능력으로 행복이라는 하나님의 은총이 꽃피어나는 것을 바라보고 믿기를 바라신다.

죽임이라는 헤롯의 손에서 건져진, 미약한 아기 예수의 생명을 바라보면서 여러분 인생에서 소망이 있고 사랑과 감사가 있으며,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가 있음을 바라보라. 그래서 뜻 깊은 성탄의 기쁨 안에, 저와 여러분이 있기를, 하나님께서 바라신다.

  1. 생명을 구원하는 곳으로

그러기에 우리가 성탄의 기쁨과 복음을 들고 생명을 구원하고 살리는 길에 나서자. 몇몇 교우들이 저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했다는 것을 들었다. “목사님은, 이상한 사람들을 부르는 은사와 재주가 있으시다.”고 말이다. 미안하게 생각한다. 때로는 여러분도 힘든데, 부담과 짐을 안겨줄 때가 있어서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봐주셔서 감사하다. 어느 누구라도 예외없이 사랑받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 저의 소신이다.

생명을 구원하는 일이 별거겠는가? 주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외 없이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을 실천하면 되는 것 아닌가?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고 예수의 마음으로 대하기를 실천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아닐까? ‘이익이 되는 지, 손해가 되는 지’ 하는 저울을 버리고, 자본이나 물질 때문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소중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용기를 내서 하는 사람이 바로 생명을 부여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일 아니겠는가?

 

다 들으셔서 알고 있겠지만, 이번 제천체력센터 화재에서 의인이 있었다. 이기현 씨의 인터뷰 내용을 들었다. 정식 명칭은 ‘고소작업차’ 그 일을 마치고 시내로 돌아오는 도중에 아버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와 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 아버지는 이쪽 분야에 베테랑이셨다. ‘우리가 저 사람들을 살려야겠으니, 빨리 크레인을 끌고 오라.’는 말에 곧바로 운전해갔다. 심한 연기 때문에 목표지점이 보이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그동안의 경력에서 얻은 감각과 직감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구출해내셨다. 쉬운 일 같지만 그렇지 않다. 안 져도 될 책임을 져야만 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이익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 말이 가슴을 울린다. “우리가 살려내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이런 것 아닐까? 예수님의 순종도 이런 것 아닐까? 그리고 우리의 결단도 바로 이런 것 아닐까?

하나님은 바로 우리들을 이러한 이들로 구조현장에 보내길 원하지 않으시는가? 꼭 화재현장만 화재현장이 아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 곳곳이 화재현장이다. 돈벌이를 위한 이익에 희생당하는 신생아 중환자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가 살려내자. 생명을 구원하는 현장에 갈릴리로 먼저 가시겠다고 약속하신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하심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 예전에 어느 분이 제게 줄곧 했던 말이다. 그러나 한 걸음만이라도 이웃과 함께 걷자. “크리스마스는 어려운 이웃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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