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고전13:5,고후9:1-7)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고전13:5,고후9:1-7)

 

 

2017년 10월 22일 성령강림절 후 20주

 

피조물을 통해서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가 주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헛된 일을 꾸미는 자들로 인해, 뭇 나라가 분노하며, 통치자들이 대책을 세우느라 분주한 때에, 쉼 없이 섭리하시며 보호하시는 주님의 크신 사랑을 생각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부드러운 음성과 온유한 손길로 위로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 29:43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으로 말미암아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

 

 

  1. 무정한 사회 속의 청년들

어떤 청년들이 서로 의기투합(意氣投合)해서 창업했다. 꿈과 소망이 야무졌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몇 개월 지나지 않아 건물주가 임대료를 두 배나 올려달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이런 법이 어디 있는가?’ 악덕업주다. 건물주는 입금계좌를 해지하고, 아무리 연락을 해도 받지 않았다. 왜 그런 줄 아는가? 3개월 간 월세를 내지 않으면 해지할 수 있다는 점을 악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인테리어 비용과 시설비로 많은 돈을 투자했기 때문에 나가라고 나갈 수는 없었다. 그러면 울며 겨자 먹기로 재계약을 하고 임대료를 두 배로 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사회초년생들이서 경험도 없고, 이런 일에 당황할 거다. 악덕 건물주는 여우 같이 이점을 악용하려고 들었다. 힘겨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그래도 힘을 내라고 격려하고 위로하고 싶을 지경이다. 취준생을 비롯한 청년들에게 꽉 막힌 사회환경은 결혼도, 출산도 미루고, 아니 포기하고, 아예 취업조차 포기하도록 만드는 시대가 되었다.

세상이 얼마나 이기적인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살다가 상처를 입거나 속상했던 마음을, 누구나 한가지씩은 가지고 있다. 세상은 정말 인정사정을 봐주지 않는 것 같다.

 

다행히 법원에 공탁금을 걸어놓는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건물주에게 문자를 보냈다. 연락도 받지 않고 계좌도 해지 된 것이라서 임대료를 지불할 수 없어 법원에 공탁금을 맡겨 놨으니 찾아가라고 말이다. 그랬더니 바로 연락이 왔더라고 한다.

이 청년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까? 만약 세상에 대해 분노를 같고 복수심을 갖게 된다면, 세상은 지옥과 한층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1.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 때는 어땠을까? 그 때도 세상이 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주님 오실 그날까지, 하나님은 성도가 성도로서 믿음의 도리를 지키며,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세상과 삶에 대해 청지기적인 삶을 살기를 바라신다. 주님은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바라신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으면서 얼마만큼 사명을 다하고 헌신하고 충성봉사 했는가? 전도했는가? 구원받은 자의 삶이란 무엇이며, 그렇게 살고 있는가?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기는 하는가? 아니면 그저 신앙의 목적이 나의 유익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서인가?

 

지난 여름휴가는 전라도 광주에서 기독교의 성지를 찾아 순례하며 보냈다. 어비슨 기념관이라는 곳에 들렀을 때였다. 일제에 땅을 빼앗기고, 일본의 자본이 들어와 농민들이 수탈을 당했다. 소작료를 계속 올려 받는 식이다. 어비슨 기념관에는 그때 교회가 어떤 일들을 했는지, 기록하고 있었다. 가난한 농민들의 삶을 외면하지 않았고, 협동조합 같은 것을 조직해서 대응해나갔다. 이런 점에 큰 감동을 받았다.

예수님 당시에도 로마제국 치하에 토지를 빼앗긴 이들은 소작농으로, 소작농은 날품팔이로 전락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처럼, 신체적 결함이나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일하고 싶어도 써주는 사람이 없어서 빈둥거려야 했다. 그리고 세상이 정해놓은 질서 기준과 가치기준에 따라, 낙오자, 루저, 게으름뱅이와 같은 취급을 당했다. 초등학교 사회과목에 이와 비슷한 내용이 학습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놀랐다.

예수님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이런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지대한가를 볼 수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이렇게 부르신 음성이 단순히 노동의 수고와 피로의 무게감을 가진 이들을 말하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그 이상이다. 인생의 고통과 상처를 싸매고 감당하느라 고생을 하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가지고 고통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이들, 마음 쉴 곳이 없는 이들을 부르신 것이다.

오늘의 메시지,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게다가 자기 손해와 억울함과 고통 때문에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와 현실에 비춰볼 때, 얼마나 불편하고 괴리감이 있는가?

  1. 백두산자락의 겨울은 아름답고 혹독하다.

황석영의 소설 바리데기를 읽다가, “백두산 자락의 겨울은 아름답고 혹독하다.”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가슴이 탁 막혔다. ‘인생은 아름답다지만 현실은 혹독하다.’, ‘꿈을 가진 미래는 아름답지만 현실은 생존경쟁을 위한 치열한 싸움이다.’ 등등의 것들, 이 시대의 암울한 현실이 생각났던 것 같다.

소설에서 바리는 탈북소녀인데, 그의 언니가 백두산 지류, 어느 산자락에서 눈보라에 동사했다. 공안들의 감시를 피해 숨어 있던 산, “그 산도 아마 백두산에서 흘러내린 수백의 자식들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주인공 바리는 이렇게 무정한 세상에 대해 쏘고 있다.

북한에 극심한 기근으로 인해, 주민들은 울창한 숲을 잿더미로 만들어 화전갈이를 했다. 거기다가 제 땅 표시로 말뚝을 박고 강냉이 감자나 콩을 심었다. 그렇게라도 생존할 수 있는 사람들은 다행이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굶어죽거나 탈북을 했다. 공산사회에서의 치열한 생존경쟁이었다. (곧 무너지겠구나!)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산들이 연기를 올리며 타는 모양, 그것은 망망대해에서 외딴 섬에 갇힌 사람들이 멀리 지나가는 배나 다른 땅에 구조를 해달라고 조난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세계는 그 조난 신호를 충분히 알아차리지 못했고 무정했다.

 

우리도 상황은 비슷하다. 나을 것 없다.

 

백두산자락의 겨울은 아름답고 혹독하다. 박완서 작가가 전후의 상처에 대해 하는 말이 있다. 엄청난 상처들을 입었지만, 모두가 비슷한 처지였기에, 서로 위로가 되고 치유가 되는 것 같았다고 하는 말이다. 이에 반해, ‘아름답고 혹독하다.’ 이 한 마디. 혹독하고 가혹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에게, 이보다 더 좋은 표현이 있을까?

  1. 오르베르티(Audiberti)가 별을 보면서 지은 시가 있다. 제목은 ‘별’이다.

 

만약 그것들이 딱딱한 보리알이라고 하면 지편선 위 저쪽에서 움직이려고 하고 있는 거위 새끼는 그것을 먹을 것이 분명하다.”

 

사람들은 별을 아름답다고 인식한다. 주입된 생각이다. 굶주린 자나 배고픈 자에게 별은 곡식으로 볼 수도 있는 거다. 그래서 ‘거위 새끼가 그것을 먹을 것이 분명하다.’고 오르베티가 읊조리는 말은 어미 입장에서 보면 애달픈 것이다. 자식새끼 먹일 양식이 없어 어찌하지 못하는 상황.

금성을 이르는 우리말은 샛별이다. 새벽동쪽에 나타날 때 부르는 말이다. 그런데 저녁에 나타날 때에는 “개밥바라기‘라고 부른다. 식구들이 저녁밥을 다 먹고 개가 밥을 줬으면 하고 바랄 즈음에 서쪽 하늘에 나타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똑같은 별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아름다운 이름을 갖기도 하고, 우수에 차거나 애환이 담긴 말이 되기도 한다.

 

황석영이 바리데기라는 소설에서 묻고 있는 중요한 질문이 있다. 그의 소설은 바리데기 공주의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었는데, 바리데기는 아버지의 죽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지옥에 내려간다. 불바다, 피바다, 모래바다를 지나 생명수를 떠와야 한다. 21세기의 생명수는 무엇일까? 물음은 거창하지만, 주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지 묻는다면, 우리도 일상적인 답을 찾아야 한다.

 

 

  1. 고린도 교회

고린도 교회가 다투고 분쟁하고 갈등을 일으켰던 데에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느라 여념 없었던 측면도 있다. 그래도 우리가 고린도 교회로부터 배울 점이 있다. 가난한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한 것이다. 1절에 이에 대해서 더 이상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고 말한다. 2절 “나는 여러분의 열성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다른 마게도냐 지역의 교우들을 분발하게 하였다. “아가야에서는 지난해부터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추수감사 헌금도 이와 같은 자세가 중요하다.)

물론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독려하기 위한 수사적인 표현일 수도 있다. 3-5절을 보면 그렇게 읽힐만하다. “너희가 저네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바울의 전략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다. 8장에 보면, 마게도냐에서 풍성한 연보가 모아졌다는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고린도교회도 창피하지 않을 만큼 동참하라는 언지를 주는 것으로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바울의 해명의 측면을 읽어야 한다. 8:20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에 대하여 아무도 우리를 비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바울을 비방하는 사람, 성도들과 바울 사이를 이간질 하려는 이단은 연보에 대해 바울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돈을 좋아한다거나, 밝히는 사람이라든가, 착복한다든가 의구심을 일으키고 이간질할 수 있는 말들은 무수하다.

자타가 공인한 사람을 보냄으로써, 연보가 연보답고 억지나 인색함으로 하지 않게 하려고 그랬다.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 세상 살면서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실천하고 살면서, 나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익, 나의 나라와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어떤 결단과 실천을 할 수 있을까?

 

선행을 베풀고 구제하고 연보하는 것.

 

바울이 덧붙이는 말에 주목해보자.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주님께 드리는 것 때문에 실족하게 되는 지점이 바로 이지점이다. 믿음의 분량에 따르지 않아서, 억지로 인색함으로 하게 될 때, 실족한다.

 

잠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잠언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주시리라.”

잠언11: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고린도후서8:14절에서도 비슷하다.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실정이 어렵고, 교회가 어렵고, 사정이 여의치 않지만, 우리 믿음을 가지고 주님 말씀에, 성경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며 열심을 내볼 수 있기를 바란다.

 

바리데기에서 바리공주가 지옥을 지나 서천에 이르는데, 괴물과 결혼해서 아들을 낳아줘야 한다. 그 고초와 고난을 겪어가며 약속을 지키자, 괴물은 한울님으로 바뀌었고 미녀와 야수와 같은 형식의 내용이다. 약속했던 생명수가 어디있는지 묻는다.

생명수는 바로, 바리공주가 밥 짓는데, 빨래할 때, 청소할 때 썼던 우물물이라고 말한다. 그 생명수와 더불어 살을 돋게 하는 살살이 꽃과 피를 돌게 하는 피살아 나무도 같이 꺾어가지고 가게 한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삶을 생각하며 이렇게 결단하자. 우리의 생활이 더 알뜰살뜰해져야 한다. 그리고 헌신과 나눔은 살이 돋게 하고 피를 돌게 하는 살살이 꽃, 피살이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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