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15일
교회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사랑의 하나님, 부활하신 주님의 몸 이루고자 저희를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피 값으로 세우신 교회를 통하여, 주님의 살아 역사하심이 증거되고, 영광 나타나기를 원하시는 줄 믿으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교회를 향한 주님의 열정과 사랑을 마음에 품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 교회 안에서의 예절들
오늘은 “무례히 행하지 않으며”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이는 달리 말하면 사람관계에서 예의들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재점검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어떤 기본적인 예절들이 있는 지 생각해보라.
① 예배에 관한 예절 : 적어도 10분 전에는 아무리 바쁘고 분주한 일이 있더라도 성전 안에서 조용히 예배의 시작을 기다리며 준비된 마음을 갖고, 순서순서마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임한다. 복장에 신경을 쓰고, 자세도 경건하게 갖는다.
② 성도들 간의 예절 : 서로 아무개 집사, 권사, 성도 호칭을 사용하고 인격적으로 대우하며, 존중하고 배려한다. 편을 가르거나 차별하지 않고, 수군거리거나 남을 비방하지 않는다. 정중하고 일구이언하지 않고, 말을 옮기지 않는다. 시간을 잘 지킨다. 보증을 서거나 금전거래를 피한다. 남의 약점을 들추거나 험담하는 말을 하지 않으며 타인의 사생활이나 비밀은 보장해준다. 불확실한 말을 전하는 것은 사단이 틈타는 통로이다.
③ 교회에 대한 예절 : 교회의 모든 물품은 성도들의 헌금으로 구입한 것으로 종이 한 장이라도 아껴 쓰고, 교회의 각종 시설을 깨끗이 사용하고 훼손되지 않도록 한다. 교회의 모든 일은 나누어서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데 힘쓰고, 주관하는 사역보다 뒤에서 협력하고 보좌하는 습관을 갖는다. 교회의 일은 교회 밖에서 거론하지 말고, 교회의 부정적인 일을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말하지 않는다. 등등
④ 신앙인의 가정 안에서의 예절 : 아내는 남편에게 주님께 하듯 하고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 자신을 내준다(엡5:22-33 참조).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며 그 온유하고 부드러운 모습으로 양육해야 한다.
- 삯꾼과 이리
늘 싸움만 하는 교회가 있었다. 교인들이 싸우다가 나가기도 하고, 교인들끼리 싸우다가 성이 차지 않으면 합세해서 목사를 공격하여 쫓아내기도 했다. 목사를 쫓아낼 때를 제외하고는 하나가 된 적이 없고 늘 네 편 내 편, 편 가름을 했다.
이 교회의 명성은 다른 교회뿐만 아니라 지역사회로부터도 싸움 잘하는 교회로 명성이 자자했다. 이 교회에는 늑대 같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겉은 멀쩡한데, 서로 노려보고 수군 수군대고 비방하고 헐뜯고 뒷담이 무성하고 수틀리면 욕하고 맘에 안 들면 완전 무시하는 등 온갖 늑대의 행동 양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행여 새로운 교인이라도 등록하면 서로 내 편을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간이라도 빼줄 듯 회유하지만 일단 자기편이 되면 전사로 키우든지 자기편이 안 되면 의도적으로 왕따 시켜 밀어냈다.
그런데 이 교회에 새로운 목사님이 부임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이번에 새로 온 목사님은 얼마나 오래 있을까? 내기를 할 정도였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아무리 기다려도 새 목사님에 대해서 아무런 이야기가 없었다. 이 때쯤이면 ‘내 보내자, 못 내보낸다.’ 옥신각신해야 정상인데 아무 소식이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궁금증을 참지 못한 교회 앞 슈퍼 주인이 넌지시 교회에 다니는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요즘 교회가 조용하네요?” 교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잘 만나서 그래요.” 슈퍼 주인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되물었다. (뒤에서 계속)
-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주일에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오는 목적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이다. 주님 앞에 나아와 예배 속에서 말씀을 듣고, 마음을 새롭게 하며, 힘과 용기를 얻기를 바란다. 이와 더불어 모두들 교회가 사랑이 많고 행복하길 바란다. 웃음이 넘치고 기쁨이 넘치기를 원한다. 아무리 은혜롭게 정성을 다해 예배를 드려도, 예배 후에 다툼과 불화를 겪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고린도 교회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은 교회였다. 물론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목회자에게 상처를 주고 성도들 간에 다툼과 분쟁으로 법적 소송까지 벌였던 교회다. 그런데 디도편으로 들려온 소식은 고린도 교회가 회개하고 정상을 되찾았다는 것이었다.
교회 회복의 단초는 무엇이었던가? 아주 기본적인 성도로서의 예의를 지키는 것, 바로 이것이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달리 말하면 서로서로 예의를 잘 지키는 것, 이것은 정말 그리스도인임을 저버리지 않게 만드는 마지노선과 같았다. 그리고 앞으로 그 은혜로운 교회를 위해 간직하고 유지하는 시작이자, 중요한 원리이다. 기독교인들은 성숙해가면 성숙해갈수록 예의범절을 잘 지켜야 한다. 그리고 모범적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예배 자체가 그렇다. 아무렇게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정성과 마음과 뜻을 다해 나아간다. 하나님 앞에 무례할 수 없다. 그러기에 처음 신앙과 믿음이 부족할 때는 잘 모를 수도 있지만, 신앙의 연수가 깊어지고 성숙해 갈수록 예절과 격식을 갖추는 것은 중요한 척도가 된다. 물론 율법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5절을 보라.
원망 받을 만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인격을 위해서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라고 말하고 있다.
6절에,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말한다. 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여러분 대다수는 그러한 사람에게 이미 충분한 벌을 내렸습니다.”
복수나 앙갚음을 저질렀다는 것이 아니다. “이미 충분한”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반대로 아직도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할 말도 많고 징계 사유도 많지만, 다만 참고 있는 것이다. 무례히 행치 않으려고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7절에서는 뭐라고 말하는가? 새번역 성경은 “여러분은 도리어 그를 용서해주고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지나친 슬픔에 짓눌리는 일이 없게 해야 합니다.”
무례히 행치 아니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 아닐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 그의 영혼과 인격을 먼저 생각해서 행동하게 되는 것 말이다. 9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는 것은 고린도전서와 후서 사이에, 소실된 것을 알려진 편지일 것이다.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아마도 목회자의 권면이나 하나님의 말씀에 기본적인 예의와 법도를 지키는지 아닌지 알아볼 수 있는 척도가 됐을 것이다.
기본적인 선(線)을 지키지 못하고 넘어서서, 교회가 쪼개지고 갈라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사람관계에서, 부부관계에서, 자식과 부모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할 말과 하지 말아야할 말을 구분해서 금도를 넘어서면 안 되는데, 이것을 넘어서서 파국에 이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싸움이 잦던 교회의 교인이 ‘잘 만나서 그렇다.’고 하자, 슈퍼주인이 “뭣이 잘 만났다는 거요?” 되물었다.
교인의 얼굴이 더 밝아지면서 사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새로 오신 목사님과 우리들이 잘 만났거든요?”
교인이 들려주는 새로 오신 목사님의 첫 번째 설교는 정말 기가 막힌 내용이었다.
제목은 ‘잘 만났습니다.’이었는데,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제가 이 자리에서 둘러보니 양들은 보이지 않고 늑대와 이리들만 보입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요즘 교회 안에 양이 어디 있습니까? 늑대들과 이리떼에게 다 잡아 먹혀서 하나도 없답니다. 그리고 사실을 말씀드리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알고 보면 선한 목자가 아니라 삯군입니다. 교회 안에 양을 보기 어렵듯 요즘 교회에 선한 목자가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삯꾼과 늑대들이 만났으니 얼마나 잘 만난 것입니까? 저는 이제부터 이곳에서 목회하는 동안 여러분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으면 ‘늑대니까 저렇게 하지, 늑대치고는 그런대로 괜찮다.’고 생각하렵니다. 여러분들도 제가 하는 행동이 맘에 안 들면 ‘삯군이니까 저렇지.’라고 생각하시고 참아 주십시오. 그리고 괜찮게 하거든 ‘삯군치고는 잘하네.’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참 잘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들은 후에 교인들 바뀌기 시작했다고 한다. 교인들 속에 목사에 대한 불만이 나오면 한 사람이 ‘삯군이 그 정도면 됐지.’라고 말했고 교인들 간에서도 서로 맘에 안 들어하면 ‘늑대가 이 정도면 괜찮지’, ‘이리가 그 정도면 괜찮지’라고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결국 얼마 후 이 교회에는 다툼이 사라졌다. 몇 년 후, 교회 안에 늑대들이 사라지고 착한 양들로 가득하게 되었다. (출처 : 문병하 목사님 페이스북)
예전에 서로 헐뜯고 싸우며 무례하게 행동하던 것들을, 이제는 ‘늑대치고…’, ‘삯꾼치고…’ 이렇게라도 생각하며 무례한 행동들은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영혼을 생각하고 회복하는 단계가 접어들었다.
그러니 여러분, 최소한의 예의, ‘무례히 행치 아니하는 것’이 사랑의 회복과 관계회복에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고 정도를 지킬 수 있기를 바란다.
역으로 성도가 예의범절을 잘 지키면 그것은 세상에서도 미담이 되고, 모범이 되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에게 대한 모습은 참 멋지다. 그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했으며, 자세히 가르치는 것은 매우 잘했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었다. 자칫 자신들이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을 드러내서 아볼로가 상처받게 하는 실수를 범할 수도 있었는데, 겸손히, 무례히 행치 않기 위해서, 그를 조용히 자신들의 집으로 초대했다. 식탁을 함께 했을 것이다. 간증이 되었든 경험담이 되었든,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서” – 여기서 “풀었다”는 말이 중요하다. 직접적으로 아는 것을 드러내거나 가르치려 들지 않고, 쉽게 풀어서, 아볼로의 자존심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 결과적으로 아볼로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그의 열정이 더 타오르게 만들어주었다. 이러한 모습이 성숙한 크리스천의 모습이다.
- 예수님
일전에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분들과 식탁의 자리를 함께 했다. 저소득층이나 사회적 약자층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자기 분수를 모르는 경제생활이라든가, 거칠고 까탈스럽게 고집을 부리는 행태들이 있다는 쪽으로 이야기 방향이 흘러갔다. 정신을 못 차리고 술 사먹는데 돈을 쓰거나 과소비하면서 늘 누군가의 도움만 바라고, 공짜로 얻을 기회만 엿본다고, 국민의 세금으로 이런 사람들을 돕는 게 못마땅하다는 이야기로 열변을 토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안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초점은 부정적인 사람들에게 맞춰져 있었고, 사회적 봉사나 구제나 선행 자체를 의미 없는 것으로 치부했다. 그 마음이 인색해졌고 자비심이나 긍휼한 마음이 사라졌음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선행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데,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도 가치 있는 일인데, 사람들의 마음이 무정해지고 각박해졌다는 생각을 했다.
예수님의 식탁에서 함께 음식을 먹었던 죄인들, 세리들은 어땠을까? 그들 중에는 성격이나 품성이 투박하고 거친 사람은 없었을까? 예수님과 식탁을 함께 한사람들 중에, 그 이후의 삶이, 대폭적인 변화가 찾아오고 개과천선한 사람들만 있었을까?
사람에 대한 그러한 편견과 선입견을 갖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무례한 것인지, 보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다. 그의 인격과 영혼을 먼저 살피고 돌보는 마음이 바로 무례히 행하지 않는 근간이다.
예수님은 죄인이나 세리라고, 또 변화되기가 어렵고 가능성이 희박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무례하게 대우하지 않으셨다. 존중하시고 사랑하시고 그 영혼을 보아 안타깝게 여기셨다. 정성스럽게 대하셨다. 오늘 우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어느 누구에게도 함부로 대하거나 얕잡아 볼 수 없다.
김현승님의 [흙 한 줌 이슬 한 방울]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온 세계는 / 엉겅퀴로 마른 땅, / 땀을 뿌려도 받지 않고 /
꽃봉오리도 / 머리를 들다 / 머리를 들다 / 타는 혀끝으로 잠기고 만다! //
우리의 흙 한 줌 / 어디 가서 구할까, / 누구의 가슴에서 파낼까? //
우리의 이슬 한 방울 / 어디 가서 구할까 / 누구의 눈빛 / 누구의 혀끝에서 구할까? //
우리들의 꽃 한 송이 / 어디 가서 구할까 / 누구의 얼굴 / 누구의 입가에서 구할까? //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주님은 오늘 우리가 누군가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대하는 무례함을 깨닫고, 사랑의 힘과 은혜와 능력을 가지고, 확신하면서 우리의 삶의 자리, 교회, 가정이 생명의 흙 한 줌, 해갈의 이슬 한 방울, 사랑의 꽃 한 송이 피어나길 바라신다. 특별히 화목과 사랑의 꽃이 피어나는 교회되길 원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