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28일 주일예배설교
피조물을 통해서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가 주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인간의 욕심과 죄악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때에, 복의 원천이신 주님이 주실 위로와 희망을 기대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지치고 피곤한 심령에 새로운 힘과 용기를 더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마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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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가 의원을 살린다.
이 시간 주님 앞에 나온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빈다.
한 달 만이다. 두 가지를 먼저 말씀드리고 싶다. 저는 나름 예배 재개문제 때문에 갈등과 고민이 많았다. ‘우리 상황에서 예배를 온라인으로 드릴 만큼 너무 세상의 이목에 너무 신경쓰는 것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 것 아닐까?’, ‘그런데 언제까지 이렇게 할 것인가?’, ‘인간은 주의력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 분명한 사실인데 누가 완전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가 누구를 정죄할까?’, ‘그러나 시대가 그렇다.’ 등등 번뇌가 있었다.
사람의 말에 너무 신경쓰는 것은 슬기롭지 못하다. 사람의 말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능력이 있다는 말씀을 되세기라. 사람의 말이란 귀담아 들을 부분도 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선한 본성에서 정제되고 정제되어 나올 때도 있지만 악한 본성에서 걸러지지 않고 쏟아질 때도 있다. 이원론적으로 세상적인 생각을 무시하자는 말이 아니라 신중하지 못한 공허한 말에 사로잡힐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코로나가 완전히 종식되기까지 모두가 최선을 다해 조심하자.
또 몇 주 동안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니까, 목회자로서 무기력해졌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생명 과정과 신비는 접촉에서 일어나는 것이나 다름없다. 종교는 무슨 감정적인 차원의 어떤 것이 아니다. 그래서 접촉 없이 아무리 감동적인 미디어가 있다고해도, 그것으로 해소될 수 있는게 아니다. 그러다보니까, 목회자로서 힘들었다.
예전에 방영했던 ‘허준’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삼학대사가 유의태에게 내쳐짐을 받은 허준에게 이런 말을 한다. “의원이 병자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병자가 의원을 살리는 것이다.” 의원으로서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개인의 영달만을 바랄 뿐, 진정한 의원이 될 수 없다. 목회자가 좋은 목회자가 되는 길은 하늘의 길을 함께 열어갈 성도들이 있을 때다. 그래서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들이 참 소중하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관심을 두고 계신 것이 있다. 그것을 깨닫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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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한 마태
오늘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한 마태의 고백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마태는 세리였는데 주님의 제자가 됐다. 바울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는데 주님의 종이 됐다.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이길래, 육으로 살지 않고 영으로 사는 사람들이 되었을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감동과 변화와 결단이 있기를 빈다.
자, 마태의 이야기를 해보자. 먼저 주님은 마태를 비롯한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기를 즐기셨다. 세리들은 이해가 된다. 당시에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그런데 죄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절도, 강도, 사기꾼, 폭행자들을 말하는 것일까? 과연 그럴까? 주님은 이들에게 관심이 많으시다.
마태는 마태복음4:1-11에서 예수님이 광야의 시험을 이겨내신 내용을 전하고 있다. 세 가지 시험이란 ①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 ② 예루살렘 성전에서 뛰어내려보라는 것, ③ 마귀에게 절하면 천하 모든 것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단순한 사실 묘사나 이야기가 아니다. 마태가 이것을 얼마나 감동적으로 느꼈을지 모른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40일을 금식하셨다고 전하고 있는데, 누가와는 달리 유대인의 정서와 문화와 상황에 너무나도 익숙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마태가 전하는 순서도 누가와 다르고 뉘앙스도 다르다. 주안점도 다르다. 마태가 성령의 감동을 받고 기록한 것의 그 특별한 의도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마태는 무엇을 떠올렸을까?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말하지 않아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 있었다. 이스라엘의 밑바탕에는 항상 출애굽 사건이 있다. 민족의 정기와도 같은 것이다. 국가와 개인의 기원이자 신앙체험의 원초적 모형이다. 특별히 출애굽과 광야의 세 가지 난제이자 주제가 있다. 그는 예수님을 이 난제와 주제를 완전해 해결하시는 분으로 보고 있다.
40년의 광야생활은 세 가지의 시련이 있었다. 첫 번째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인데, 음식의 고갈과 관계된 것이다.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불평했다.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는데, 이 시험은 인간의 생존과 관계된 것이다. 두 번째는 므리바라는 장소에서 물의 고갈로 벌어진 일인데,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는 불평으로 하나님을 시험했다.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겠다고 넘어가는데, 이 일화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시험하거나 증명하려는 것은 굉장한 죄로 여겨졌다. 그래서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세 번째는 사람들이 볼 수 있고 섬길 수 있는 신을 만들어 달라고 아론을 설득했다. 금귀걸이, 목걸이, 팔찌를 녹여서 송아지 형상을 만들었다. 그리고서 금송아지를 위해 제단을 쌓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신”이라며 경배하기 시작했다.
마태 역시 살면서 사실 이런 문제들로 고민했다. 그가 선택한 길은 세리였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보다 자신의 생존과 이익이 우선이었다. 타자에 대해 완전히 무심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우선적으로 자기 생각, 판단, 생각이 중요했다.
주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자주 식사를 하셨다고 하는데, ‘죄인들’이란 이런 것 아니겠는가? 인생의 무게와 세속의 요구에 눌리고 사로잡혀 하나님을 시험하는 사람들.
우리는 살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보다는 자기 생각대로 사는데 우선한다. 때로는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세상을 대하며 하나님을 자기식으로 해석하고 요구하고 바란다. 세상에서 코로나에 걸린 기독교인들에 대해 조롱하며 하는 말이, 병원에서 치료받지 말고 기도해서 나으라고 빈정댄다. 맹신자들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다 낫게 하신다고 말한다. 이것 역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그 시험으로 하나님을 증명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늘이 흔들리는 사람들. 하나님과 그 자녀된 신앙에 연약함을 보이는 사람들. 주님은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고 만남을 통해, 자주 하늘을 보여주셨고 확신을 주셨으며, 믿음을 북돋아 주셨다.
우상에게 절한다는 것은, 세상이 만들어놓은 가치관과 이념을 강요받으면서 굴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약자들은 강자들에게 순복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만연해있기는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였다. 강자들의 횡포와 폭압을 운명으로 여기면서 자신의 존재를 규정했던 이들은 역설적으로 누군가로부터 섬김을 받기 위해 남을 깎아내리는 체제 속에서 자기 존재의 안정감을 찾았다.
이 세 가지 시험의 주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늘 고민거리였던 마태는 조상을 비웃을 게 없었다. 현재를 살고 있는 자기 자신도 그러니 말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하도록 하는 유혹과 시험투성이다. 가정과 삶 속에서 생계문제를 비롯해 물질적인 어려움을 겪는다. 인생의 곤고함 속에서 하나님께서 실제로 살아계시는 지 의심하고 시험한다. 뭔가 믿을만한 대상을 찾아 숭배하고 경배하려고 한다. 그것이 재물이든, 권력과 든든한 뒷배경이든 말이다.
예수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유혹자와의 1라운드에서 예수님이 승리한다.
신명기6:16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당신들이 맛사에서 시험한 것처럼,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인용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단호하셨다. 2라운드도 승리한 것이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성들, 집들, 우물들, 포도원들, 올리브나무들을 주실 것이라”(신6:1-13)고 기록된 말씀을 인용해서,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말씀하셨다. 사람에게 종노릇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라는 말씀으로 3연승을 이루었다.
40일 금식기도 한 번 해서 승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의 전체의 삶과 존재를 조망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자여서 물질 걱정 없이 사셨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하나님을 시험할리 만무했겠는가? 능력이 있으니 세상에 굴하지 않아도 됐던가? 인간 안에서 어떻게 육화된 하나님은 시험을 이기신 삶을 보여주셨다.
3.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마태복음 3장 16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렸다고 증거하고 있다. 이 의미가 무엇일까? 하늘이 열린다는 의미 말이다.
마태복음의 독자는 유대인들이다. 유대인들의 눈으로 보면 분명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성경에서 물이 갈라지는 장면에 대한 기사가 여러번 있다. 모세 때 홍해가 갈라졌고, 여호수아 때, 요단강을 마른 땅 같이 건넜다. 이번에는 엘리야가 그의 망토를 말아들고 요단강을 내리침으로 건넜다. 유대인들은 강물을 가르는 전승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초는 모세다.
유대인들은 창조이야기를 늘 되뇌였다. 그래서 땅과 하늘에는 궁창이 있다고 여겼다. 모세와 여호수아, 그리고 엘리야는 땅의 궁창을 갈랐다. 하늘이 갈라졌다는 의미는 단순히 구름사이에 빛이 비추듯 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모세나 여호수아 엘리야도 못한 하늘의 궁창을 가르는 분으로 마태는 보았던 것이다.
유대인들의 사고에서 생수는 언제나 성령의 상징이었던 점을 감안하라. 하늘의 궁창이 열렸으니 성령이 임하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는 소리를 듣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사야를 통해서 이런 예언이 전해졌다. 우리에게 ‘종’ 또는 ‘고난받는 종’으로 알려진 신화적인 인물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사야42:1에서 “나의 종을 보아라.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사람이다. 내가 택한 사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
마태가 증거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늘 궁창을 여시고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뜻을 가르치시며, 인간으로 살기에 하나님의 뜻과 위배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고 믿는 이들에게 시험을 이기시고 하나님 뜻대로 살 수 있음을 보여주시는 진정한 메시야였다. 유대인들이 성조로 여기는 모세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세리였던 마태는 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나? 물로 주님께서 먼저 부르셨지만, 주님을 따라 나섰는가? 자기의 기쁨과 영광을 위해서 살던 사람, 세속의 유혹과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죄인으로 살아가던 사람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자 그의 지향점이 바뀌었다. 삶의 방향과 자세가 달라졌다. 자기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사람, 예수를 따라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적어도 마태에게 구원이란 내세적이고 기복적인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살기로 다짐하고 결단하는 사람말이다.
4. 주님 안에서 발견되라
바울 역시 주님을 만나고 삶의 지향점, 자세와 태도와 방향이 달라졌다. 심지어 그는 주님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한 것 뿐만 아니라 주님 안에서 발견되기를 바랐다. 그 삶이란 바꿔말하면 그의 삶 속에 예수가 나타나는 삶이다.
바울은 아시는 대로, 이스라엘 족속 중 베냐민 지파였고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었던 사람이다. 혈기 등등할 정도로 자기 의가 강했고 자기 생각을 관철시키는 데는 둘째가라하면 서러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빌3:7-9에 무엇이라고 고백하는가?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라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함이니.”
필리핀 죽은 이주노동자 – 아산에서 29이주노동자. 제프리. 건설자재용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들던 기계가 갑자기 고장났을 때, 그의 옆에는 한국인 관리자가 없었다. 위험한 일은 약자에게 떠넘기고 책임지지 않는 세상을 보여준다.
“주여 29살 젊은이가 주님 곁으로 돌아갑니다. … 그저 열심히 일하며 자신의 미래를 꿈꾸던 청년이 왜 이렇게 시신으로 누워있어야 하는지를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하면서도 회사는 안전하게 자신을 지켜줄거라 믿었지만, 그는 결국 안전관리자도 없이 혼자 일하던 중 고통 속에 생을 마쳤습니다. … 부디 눈 앞에서 어른거리는 죽음의 공포를 견디며 일상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소서.”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관심과 기도와 실천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 예수에게 기억되고, 여러분 안에 예수가 나타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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