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20일 종려주일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사랑의 하나님, 종려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따뜻한 봄기운에 만물이 소성하는 때에, 참생명의 능력을 얻기를 바라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사랑으로 굳었던 우리의 심령이 녹아지며, 보혈로 더러워진 심령을 씻어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호2:15)
빌라도의 딜레마
- 여는 이야기
종려주일 고난주간에 나온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길.
위키드, 4회, 두 번째 어린이들의 합창을 듣고 마음이 울컥했다. 김창완의 안녕을 불렀는데, 들어보자.
슬픈 노래를 애뜻하게 부르며서 마음이 정화되는 것처럼, 고난주간은 우리가 일부러 슬퍼하고 슬픔의 노래를 부르는 주간이다.
- 딜레마에 빠진 빌라도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신 때부터 십자가 지시기까지 일들을 묵상하다가,
“바라바를 놓으라.”
이 대목에서 개인적으로 감정이 북받쳤다. 속상했다. 왜일까?
어디나 어느 때든지, 기념일이나 축일이 되면 특별사면이라는 것이 있다. 로마 치하,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빌라도는 전례대로 죄수 한 명을 골라, 예수 중에 누구를 사면할지를 군중들에게 선택하도록 했다. 예수님은 민초들의 친구였고, 위로자였고, 치유자였다. 그런데, 군중들의 선택은?
빌라도 법정 자체에 대한 윤리와 도덕적인 평가는 여기서 않겠다. 그런데 당시 사형선고와 집행에 관한 모든 권한 만큼은 로마에 있었다. 예수님을 로마 법정에 넘기고, 사형이라는 중죄를 심리하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의 측근 중에서 변절자가 필요했고, 거기에 가룟 유다가 걸려들었다.
그런데 빌라도는 딜레마에 빠졌다.
바리새파, 사두개파, 두 정파의 정체성은 매우 달랐다. 그러나 한 목소리를 내는 것 한 가지가 있었다. 자기 밥그릇 챙기고 기득권 수호하는 것, 거기에는 이견이 없었다. 그래서 예수를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은 일치를 보였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고 착한 일을 하는 것까지는 좋다. 세상의 기존 질서로 인해 상처받고 반감이나 불만을 가지고 있는 이들 속에 찾아들어가 위로하고 격려하고 그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까지도 괜찮다. 적어도 나쁜 마음은 먹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사두개파, 바리새파 당대의 기존질서의 불의함과 거짓과 위선과 음흉함을 드러내셨다. 그러자 예수라는 존재를 불온한 인물로 여겼다. ‘세상이 빛을 싫어하고 미워한다.’는 주님의 말씀이 딱 생각난다.
- 빌라도의 딜레마란?
빌라도의 딜레마란 무엇인가?
공의로운 판단을 하면 이들과 관계가 어긋날 것이다. ‘과연 이들과의 관계가 어땠길래?’ 곧 살펴보자. 또 굽은 판단을 하자니 던 큰 손해가 따를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은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지는 않는 것인데, 직감적으로 아는 것이다.
1) 먼저 공의로운 판단 결과로 이들과 관계가 어긋날 때를 생각해보자.
총독의 유능함을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런 게 있었다. 그것은 무엇인가? 총독 관할지역의 안정화이다. 로마의 국익을 위해서 상당한 이득을 취하면서, 민란이나 반란, 소요사태 이런 것들은 절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하급관리였던 세리보다 더 나쁜 사람이 있다. 당시 세리들은 지탄의 대상이었는데, 사실 이들이 더 지탄을 받아 마땅하다. 세리는 부조리한 시스템의 현상일 뿐이었다. 본질은 아니었다. 누구인가? 바로 바로 빌라도가 관계를 맺고 있는, 앞에서 말한 이들이다. 대제사장, 서기관, 율법교사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세리가 거둬들인 것 중에서, 일정비율대로 자신들이 응당 챙겨야할 몫으로 챙기고, 나머지는 로마의 세금으로 돌아가게 했다. 자기 손에는 더러운 것을 묻히지 않고 합법적이고 정당한 방법으로 갈취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도취되어 스스로 의롭다고 여겼다.
예수님은 그 속사정을 너무나 훤히 꿰뚫어보고 계셨다. 사람들이 미워하고 원망하고 돌을 던져야 한다면, 그들은 세리들이 아니라, 큰길가 어귀에서 눈에 보이게 기도하며, 금식하며 경건한척 의로운 척 다하는 사람들, 대접받고 환대받기를 좋아하는 외식하는 사람들이었다. 주님은 세상의 부조리 속에 있는 약자들의 설움과 모순을 보시면서 불쌍히 긍휼히 여기셨다.
그런데 어쨌거나 빌라도 입장에서는 이들을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에 해당하는 죄목이나 명목이 없지만, 이들의 시기로 이렇게 된 줄을 알고 있었다. 공의로운 판단을 한다면, 이 공생관계는 깨질 것이고, 어렵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해방후 미군정이 들어서고 친일파들을 청산하지 못한 미완의 역사에는 이와 같은 면모가 있다.)
2) 그렇다면 공의롭지 못한 판단으로 이들과의 관계를 유지했을 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당시 ‘Pax Romana’ 이 말은 당시 시대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예수님의 “the Kingdom of god” 이 말과는 완전히 배치된다.
‘Pax Romana’ 로마의 모든 것은 가장 보편적, 합리적인 것이며, 그것을 지키고 유지할 때 평화하다고 믿었다. 그러기에 총독의 판결은 로마의 이름으로 하는 가장 보편적인 양심에 기인한 것이어야 한다.
총독은 자신의 명예를 걸고 ‘Pax Romana’ 그것을 지켜내야 한다. 그런데 아무런 죄목없이 사형을 언도하고 집행했을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될 것인가? 끄나풀들이 예수를 아무리 고소 고발하고 위증을 해도, 눈에 보이는 예수님의 인품과 인상에서 조차도 ‘이 사람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 주었다. (막15:4-5) 예수님은 그처럼 맑으신 분이었다.
식민지하에 있는 지도자들이 두려워, 결국에 굽은 판단을 했다는 것이 전해지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상이 높을수록 작은 흠집조차도 선명해 보이는 법이다. 빌리도와 로마는 가장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써야 한다. 명예를 지키려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무섭고 두려운 것이 있을까?
- 눈이 어두운 무리들
빌라도의 딜레마.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러분, 이 부분을 교의학적으로 설명하거나 영적인 해석을 하지 않고, 현실의 측면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이유가 있다. 결코 에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피상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의 현실과 세계속에, 우리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지엄하신 뜻과 말씀도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빌라도는 나름 묘수를 생각해냈다. 전례대로 죄수 한 명을 놓아주는 것이다. 바라바는 악명 높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예수와 바라바 중 누구를 선택하겠는가? 당연하다. 누구나 예측가능하다.
왜 감정이 북받치는가? 군중들이 바라바를 외쳤다. 성경은 대제사장들과 기득권을 위해 결탁한 이들이, 무리들을 그렇게 하도록 선동했다고 전하고 있다. 속상한 이유는 그래서 일게다. 예수님은 특별히 무리들을 긍휼히 불쌍히 여기시고 여러모로 섬겨주셨다. 그런데 그 무리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아우성이다.
우리의 시대 삶의 자리에서도 이와 같은 일들은 여전하다. 의로운 사람이 핍박을 받고, 선량한 사람이 오히려 가해자로 변하는 이상한 현실을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얼마든지 만나볼 수 있다. 이렇게까지 거창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이다. 잘못은 저사람이 했는데, 사과는 내가 해야하는 비참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오히려 전학을 가고, 내부비리를 폭로한 사람이 오히려 왕따를 당한다. 입주민으로부터 모욕을 당한 경비원이, 그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자, 아파트값이 하락하고 모욕을 준 사람의 명예가 깎였다고 오히려 명예훼손죄로 고소를 당하고 사과를 해야하는 현실이 발생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세월호 유가족을 잊을 수 없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불온한 세력으로 매도당하고 있다.) 이처럼 여전히 우리 시대에도 예수님처럼 고난당하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빌라도가 나서서 예수님은 죄가 없다고 수차례나 상기시켰지만 소용이 없었다. 무리들은 계속해서 바라바를 석방하고 예수를 못박으라고 외쳤다. 사람의 눈이 이렇게 어둡고 어리석다. 대중심리, 군중심리에 휩싸이고 사로잡히면 이성을 잃고 포악해진다. 주의하자. 그래서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 늘 돌아봐야 한다.
결국 바라바는 풀려났고, 예수는 채찍질을 하고 십자가에 넘겨졌다.
가슴이 시큰하다. 곧 이것을 집행할 중대병력이 배치됐고, 예수를 에워쌌다. 군인들은 가시관을 머리에 씌우고 경례를 하며 예수를 조롱했다. 가시관을 쓰고 있는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었다. 예수는 찢겼고 수치와 수모를 당했다. 골고다 언덕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매달았다. ‘골고다 언덕’은 ‘해골의 장소’라는 뜻이다. 무수한 피의 절규가 있는 곳이다.
정오에 온 땅에 어둠이 임하고 오후 3시경이 되자, 예수님은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부르짖고 숨을 거두셨다.
- 예수와 함께 울라
여러분, 도대체 빌라도와 특권층들, 그리고 무리들은 무슨 짓을 한 것일까?
그 사형을 집행하던 로마의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드디어 숨을 거두시자, 두렵고 참담한 마음으로 이렇게 고백한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사람은 흥분이나 광기가 사라지고난 뒤에야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한 행동을 했는지 깨닫는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굳이 필요도 없는 상처를 주는 말을 내뱉고, 그가 상처받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마음이 풀어지는 동시에 후회한다.
이사야는 이사야53:3-6에서 이렇게 예언하고 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3)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4)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
종려주일을 맞이하고 고난주간을 맞이한, 바로 오늘 우리가 헤아려야할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 위에서 죽게 했다. 아마도 하나님의 보복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 허망함 때문일 것이다. 정말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와 평화세상을 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인간 스스로 버렸다. 여러분,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의 타임을 무지몽매함으로 놓쳐버리는 경우가 참 많다. 우리 가정, 삶의 자리, 교회, 사회에 은총을 허락하시는데, 굴러온 복을 걷어차 버리는 격이다.
‘안녕’이라는 곡의 가사가 내게는 주님의 부탁으로 들려온다.
안녕 귀여운 내 친구야 / 멀리 뱃고동이 울리면 /
네가 울어주렴 아무도 모르게 / 모두가 잠든 밤에 혼자서
안녕 내 작은 사랑아 / 멀리 별들이 빛나면 /
네가 얘기하렴 아무도 모르게 / 울면서 멀리멀리 갔다고
누군가 찢기고 상처를 당하고, 신음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심령이 아무렇지도 않다면, 특별히 신경써야 한다. 타락 때문이다. 타락은 윤리도덕법적인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울면서 회개하고 뉘우치는 이에게는 위안과 평안도 뒤따라온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묵상하고 참여하는 가운데, 정화된 마음이 일어난다. 그 길을 함께 걸어가자. 특별히 고난 주간에, 예수의 마음으로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