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28일 사순절 3주, 3.1절 기념주일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며, 열방을 공의로 다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 사순절 셋째 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동장군의 몸부림으로 인해 봄 처녀가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는 때에, 따스한 주님의 품을 그리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온기로 가슴을 채우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마4:10-11
오클로스 예수님
- 쉬고는 싶으나
31절에서 주님은,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참 따뜻하다. 주님은 애써 수고하고, 맡겨진 일에 성실을 다한 제자들을 그렇게 위로하고 격려했다. 어떤 여가를 위한 무엇이 제공돼서가 아니라 ‘잠깐 쉬어라.’ 이 한 마디에 인간적인 배려와 사랑이 녹아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를 부르시는 주님은, 사모하는 자에게 평강을 주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촌과 마을에 보내셨다. 거기서 귀신들을 내쫒고, 가정이든 마을이든 정화하는, 깨끗케 하는 일을 하게 하셨다.
마가복음6:13절은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가? 제자들이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주님의 이름을 믿고 행하는 이에게 이런 권능을 주신다.
괴로움은 사라지고 어둡던 곳은 환해졌다. 우선 사람들의 표정들이 밝아졌다. 그것만으로도 복음을 받아들인 삶의 자리는 얼마나 복된가를 가늠할 수 있다.
30절에서 ‘가르친 것’이란 무엇일까? 정치, 경제, 철학, 역사, 과학, 이념, 사상? 이런 것들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 나라’를 말하면서 결국은 ‘자기 왕국’을 말하는 경우를 봤다. 하나님의 뜻, 나라, 영광을 말하면서 실상은 ‘자기 욕심’을 위장하는 것에 불과한 경우도 많이 봤다.
무엇을 가르쳤을까? 한 가지 확실하고, 우리가 받아들이고 따라서하기에 가장 무탈한 것이 있다. 예수님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이라도 쉬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럴 새도 없다. 음식 먹을 겨를도 없어, 배를 타고 정말 한적한 곳으로 가려고 했는데,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뒤따른다. 아니 먼저 앞서서 예수님이 어디로 가실지 짐작하고서 달려간다. 33절에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달려왔다고 전한다. 갈급함으로 말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방증해주는 것은 제자들의 임무수행이다. 제자들이 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이다. 자기의 의로움이나 영광이나 사상이 아니다. 그것을 듣고 ‘모든 고을’로부터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달려왔다.
그러고 보니까, 마가복음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1:1)
-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이상한 점이 있다. ‘큰 무리’(34)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나오는 것을 보면서 주님께서 어떻게 여기셨는가 하는 것이다. 기뻐하거나 즐거워했어야 할 것 같은데, 아니다. 혹은 주님께 기대가 있거나 ‘뭔가 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 나왔다면, 가뜩이나 과중한 사역에 지칠 대로 지고 피곤한 상태라 부담스러워하거나 힘겨워했을 것 같은데, 그것도 아니다.
주님은 불쌍히 여기셨다. 왜일까? 목자 없는 양처럼 여기셨다. 왜일까?
당시 사회상, 모순, 부조리 제가 여러 차례 설명 드렸다. 우리시대와 흡사해 보였다.
여기서 ‘무리’라는 말은 오클로스(οχλος)라는 단어다. 단순하게 요약해서 말하자면, 힘이 없는 민초들이다. 그것을 말하는 사회적 용어, 시사용어라고 할 수 있다.
(퀴즈)
좀 넓은 의미로 말하자면 복지와 생존의 문제에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약자계층이나 대상을 말하는 것이다. 쉽게 생각하기 위해서, 오늘날에도 여기에 해당하는 계층들이 있다. 고령화 시대 속에서 기초생활조차 되지 않는 노인들, 모든 것이 이익증대를 위해 자동화되고 있는 세상 속에서 저성과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실직당하는 노동자들이나 생존기반이 위태로운 계약직 노동자들, 대형마트와 무한경쟁에서 점포를 닫고 생존의 위기에 처한 골목상인들, 장사는 안 되는데 비싼 월세만 물다가 결국 폐점한 상인들, 퇴직금에 융자를 얻어 프렌차이즈 치킨집을 열었는데, 결국 기대를 접어야 하는 수많은 업주들, 기초생활수급자는 물론 말할 것도 없다. 더 많다. 장황하지만, 이렇게 열거하는 이유가 있다.
‘큰 무리들’을 보시면서 주님은, 도처에 쌓인 상처와 아픔을 겪고 있는, 양극화의 칼바람을 보셨다. 지친 사람들의 자화상을 보셨다.
잘 살고 싶다고 항변하고 부조리에 대해서 비판이라도 하는 오클로스들에게는, ‘거룩’이라는 논리를 들어 부정한 사람으로 내몰았다. 심지어 예수님께조차도 ‘바알세불’을 힘입고 저렇게 한다고 혐의를 두어, 세간에서 등 돌리도록 이간질 시키려 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함부로 사람을 규정하는 말들에 속지 말라. 규정하거나 함부로 정죄해서도 안된다.
- 복음에 대한 가르침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무엇을 가르치셨을까?
여러분은 예수님 말씀들 중에 어떤 말씀이 가장 인상 깊게 남는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공중의 새들을 보라. 들에 핀 꽃을 보라. 천부께서 먹이시고 입히시고 기르시나니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성공담을 강연하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얼마나 그가 어려움과 역경이 많았는지 알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을 분석하고 점검하고 관리하면서 성공을 향해 나아갔는지, 감동적으로 와 닿기도 한다. 고난과 시련은 이기라고 있는 것이고, 이기고 나면 분명 소망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기득권에 편입하게 된 사람이 더 위험한 경우도 있다. 자기처럼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게으르고 문제가 있고 실패자라고 단죄할 때 그렇다.
여러분 성공이 인생의 승리와 실패의 기준일 수 없다. 성공의 임계점을 넘게 된 사람이야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가 패배자인가?
우리는 아슬아슬한 희망을 가지고 살면서 얼마나 많은 외풍과 내풍을 만나는가? 자기가 잘못해서 태풍을 만나기도 하지만, 상관없이 태풍을 만나기도 한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큰 바람이 몰아쳐서, 훅 날아가기도 한다. 어찌하랴?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모두가 불행한 것인가? 또 성공한 사람은 모두가 행복한 사람인가? 물론 그 지수는 비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행복의 비결부터 배워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성공도, 어떤 좋은 상황이나 여건도, 불행할 수 있다.
행복의 비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예수복음 체험하라. 예수님께서 아무도 (자신에게) 어떤 위로하거나 용기를 줄 수 없는 자신의 심령 속에 찾아오셔서,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날 힘과 용기를 얻는 다. 그리고 평강과 그에 따른 소망이 행복으로 넘친다. 도무지 이성과 인간적인 추론으로는 상상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 주님께서 사모하는 심령에 계시다. 사모하는 이를 위로하시고, 믿음으로 굳건하며 담대하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그 진위 여부를 세상적인 성공으로 판가름할 수 없다.
지난주에 고 장영철 성도의 장례를 치뤘다. 고독하고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 죽음이었다. 그토록 고 최망례 집사님을 그리워했는데, 이젠 그 재회의 기쁨 속에 있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가 세상의 어떤 업적이나 공적을 세운 것은 없지만, 한 가정의 가장으로 살아오면서, 아무리 아쉬움이 많있다고 하더라도, 그 몫을 다했다.
저는 수명을 다한 장례를 치룰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저 나이까지 살 수는 있을까? 때로는 살기 어려울 때, 망막할 때가 얼마나 많은데, 얼마나 많이 찾아올 텐데? 업적을 세우거나 공적을 세우거나 성공하지 않아도, 경제적인 위기를 비롯한 수많은 위기 속에서 그저 주어진 몫을 다하며, 생명이 다하는 한 살 수 있을까? 그마만큼 우리 생애에는 불안과 염려가 크고, 희망은 아슬아슬하다. 어려움, 고난도, 괴로움, 슬픔도 인생이다. 그것을 견디고 이기며 살아오게 하신 주님께 감사해야한다.
- 복음 앞으로 나와
어쩌면 예수님이야 말로 ‘오클로스’다.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 우리 보다 더, 아니 같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주님은 어려운 시대를 살아내셨고, 그러나 성공하지 않아도 자유로우셨다. 가시는 길 앞에 십자가가 놓여있는 것을 알았지만, 하나님의 때가 이를 때까지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 예수님을 본받아 따라 살면 살 수 있을 것 같다. 성공하지 않아도 인생은 충분한 가치가 있고, 생명은 충분히 귀하게 여김을 받을 가치가 있다. 그리고 행복할 수 있는 특권과 비결이 있다. 주님 앞으로 나와 영접한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며,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확신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며, 마을과 고을, 여기저기 곳곳에서 ‘정화’하는 사역을 보여주신 것은, 성공과 출세의 망령을 걷어내고, 불행의 어두움에 참행복의 빛을 비춰주신 것은 아닐까? “여러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목자없는 양 같음으로 불쌍하게 여기신 주님의 마음은 ‘주님 역시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오클로스’의 삶이었지만, 그것을 너무나 공감한 나머지, 하나님의 사랑에 초대되는 비결을 가르쳐야 하는 애끓는 마음은 아니었을까?
오병이어의 사건은 이것을 너무나 자명하게 보여주신 사건이다.
35절, “때가 저물어가매” 저는 이 한 구절에 가슴시린 어느 날이 떠올랐다. 어떤 뉘앙스로 느껴지시는가? 오늘은 그럭저럭 살았는데, 내일은 또 어떤 궁핍과 괴로움과 고통이 기다릴지 알 수가 없어서 막연하게 불안하던 때가 있었다. 군생활할 때, 가족을 떠나 아무 연고지가 없던 처음 목회지에서 목회를 할 때. 아무튼 “때가 저물 때” ‘오클로스’들이 겪는 마음은 아리고 시리다.
‘빈들이요, 날이 저물어가니’ 주님은 그 마음을 너무나 잘 아셨다. 그리고 제자들이 무리를 돌려보내서 알아서 식사를 해결하게 하십시다 말할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말씀하신다.
어떤 의도셨을까? 단순히 먹을 것을 주심으로 주님의 능력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때가 저물 때’ 느끼는 염려, 근심, 걱정으로 시린 가슴을 부여잡고 사는 오클로스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불어넣는, 세상과는 다른 또 다른 희망을 주시는 일이었다.
제자들은 200데나리온이나 족히 되는 식사비며, 그 수량을 어떻게 충당할 것인가? 당황스러웠다.
주님은 떡이 몇 개나 있는지 물으신다. 제자들이 알아보고, 드린 보고는 오병이어였다. 어떤 사람들은 각자 도시락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어린이가 자발적으로 자기가 가진 음식을 내놓자, 다른 사람들도 각자 넣어두었던 도시락을 열어서 먹고, 남은 광주리가 12광주리였던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일리 있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무리 속에서 알아본 결과, 오병이어가 있었다는 것(v.38)은 확실하다. 그런데, 각자 감추고 있던 도시락을 다 알고 계셨고, 그것을 꺼내서 먹으라고 하신 것이라면, 이 부분이 맞지 않는다.
주님께서 음식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 그리고 그 음식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셨다. 각자 도시락을 꺼내먹도록 하신 것이라면, 축사는 단순히 식사전 감사기도에 불과하다면, 이 음식을 누구에게 되돌려 주어야 마땅한가? 원래 음식 주인에게다. 어린아이에게 말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때 하셨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몸과 피를 생명으로 나누어 주셨던 예수님 모습의 양태라고 말한다. 이런 해석도 일리가 있다. 43절에서 열두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완성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사람의 몸을 입으셨던 예수님의 내공이 보여서 위안이 되고 힘이 난다. ‘그가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이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2:18)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주님께 이 정도는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는 것이라고 쉽게 말할지도 모른다.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그런데 저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다고 말씀하시면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말씀하신 대로 살아내셨던 주님의 내공이 보인다. 머리둘곳 조차 없으셨던 예수님께서 정말 이렇게 자유롭게 사셨고, 천부께서 공중의 새도, 들에 핀 꽃도 먹이시고 입히시는 섭리와 은총을 믿으며 사시는 본을 보여주셨다. 무모한 믿음이 아니라, 육신의 옷을 입은 주님께서 친히 경험하신 숱한 체험들이 신비의 비결이 되고 원리가 되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이 됐다. 그리고 그 증거는 무게와 확신을 더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굳게 믿고 행하면, 하나님은 하시는 분이다. 채우시는 분이시다. 더하시는 분이시다. 42절 말씀처럼 다 배불리 먹고도 부족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풍족하게 하신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와 같은 능력과 행함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어디까지나 공을 세우고, 이름을 내고, 성공을 위해서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이 기적 같은 일의 근간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없는 주님의 자비와 사랑의 진심이 있기 때문이다.
- 결단
이 시간 우리가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몇 가지 결단할 것이 있다.
첫째는, 인간적인 계산과 공식을 앞에 놓고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불신앙을 버리는 일이다. 주님은 장정만 5천명을 먹일 수 있을만한 갑부가 되지 못하신다. 그러나 200데나리온 없어도 주님은 하실 수 있다. 그보다 더 큰 일도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이란 무엇인가? 우리 역시 순종하는 마음으로 믿음을 가지면 동일한 체험과 은총이 있다.
둘째는, 내게 있는 것을 얼마 안되고 적은 것이라도 나눔과 헌신을 위해 주께 드려야 한다. (김연화 목사님 교회 한 성도)
셋째는, 행복관이 바뀌어야 한다. 성공해서가 아니라, 나눔과 헌신의 삶을 살며 풍요로움으로 행복을 삼아야 한다. 헤롯 생일날 벌어진 잔치와 대조적이다. 개인의 욕망을 위해 남의 목을 가져다 대야하는 현실이 아무리 풍요롭다고 해도 행복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