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21일 사순절 2주

 

피난처요 힘이시며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 되시는 사랑의 하나님, 사순절 둘째 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초봄의 훈풍이 어느덧 가까이 당도한 느낌이 드는 때에, 얼었던 것을 녹여주시고 굳었던 것을 풀어주실 주님의 섭리를 생각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세상의 평화와 화목을 위한 저희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12:2)

 
1. 세상에 대한 경보와 기독교의 책임

(영상)

이 영상을 교회에 적용해봤다. 교회가 세상의 뭇매를 맞는다고 그 본래 사명과 역할을 포기할 것인가? 그럴 수 없다. (다시 한 번) 이 장면을 주의 깊게 보라. 이 표정을 아시겠는가? 어떤 심정인지 말이다. 세상이 망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이 표정이 말해주는 마음이 우리에게 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 마음이 드는 순간, 결국 자폭하는 것이다.
타이태닉호가 침몰했다. 1912년 4월 첫 항해 중에 북대서양에서 빙하와 충돌하면서, 1,50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누구도 파선하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축구장 두 배만 한 초호와 여객선이었는데, 거기에 최신의 안전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도 가라앉힐 수 없는 배”라고 불렀다. 무엇도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사고지역을 지나기 전부터 빙하경보가 5번이나 발령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그 경보를 무시한 채 북대서양을 항해하다가 침몰하고 말았다.
교회는 세상을 구원할 역할과 임무를 계속해야 한다. 그리고 이대로 가다가는 타이태닉의 침몰과 같은 파국을 맞이할 것이라는 구원의 경보를 멈출 수 없다. 그래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2. 보수하시는 하나님?
여러분은 어떠신가? 누군가에게 어떤 원한이 생겼으나, 내가 되갚아 줄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 어찌해주시기를 바라는가? 하나님께서 보복해 주실 것이라 생각하는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성경에도 보면 그와 같은 탄원을 곳곳에서 살펴볼 수 있다. 원수를 저주하고 미워하며 멸해 달라고 한다.

“주의 분노를 그들의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가 그들에게 미치게 하소서. 그들의 거처가 황폐하게 하시며 그들의 장막에 사는 자가 없게 하소서”(시69:24)
“나의 영혼을 찾는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하게 하시며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들이 뒤로 물러가 수모를 당하게 하소서.”(시70:2)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시36:17)

이런 대목을 읽을 때, 아주 통쾌하다는 마음이 들고, ‘고소하다’, ‘쌤통이다’는 생각이 든다.

3. 용서하시는 하나님?
1) 신앙적이고 영적인 것을 한 가지 말씀드려볼까? 보복이나 원수는 내가 갚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로마서12:19 바울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시도록 믿고 맡겨야 한다. 자칫 더 큰 화가 닥치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도록 항상 노력하며, 그 문제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야 한다.

여기서 보면,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말씀하고 있다. ‘진노하심’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보복을 해주시고, 진노를 쏟아부어주심으로 되갚아주실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2) 그런데, 만약 하나님께서 꼭 원수를 되갚아 주시지 않는다면, 어떨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폭력적이고 무서운 얼굴로 원수를 대하지 않으신다면 말이다. 오히려 용서하신다면 어떨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아주신다면? 45절 말씀을 보라.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이 대목에서 사람들은 의문을 품고, 쉽게 납득하거나 용납하기 힘들어 하는 부분이다. 하나님께서 진노는커녕 별반 다를 바 없이 대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우리의 솔직한 마음은 무엇일까?

사실 이 부분은,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뒤에 하신 말씀이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 말씀을 45절과 연결 짓지 않고, 단순히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만 취하면, 그럴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원수를 갚는 일을 주님께서 해주실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는 것’이라면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으시다. 사실 원수 갚아주시기를 바라면서 사랑한다는 자체가 모순이다. 거짓이다. 원수까지 사랑한다면 그가 용서받기를 간구해야 한다.
이렇게 성경을 우리가 편한 대로, 받아들이기 쉬운 대로, 끊어 읽으려고 한다. 그렇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읽으니까, 좀 불편해지지 않는가? 우리가 왜 선한 사람이 돼야 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하는 지 회의적인 생각을 품는 이도 있다.

3)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복음서를 보다보면 좀 이율배반적인 부분을 볼 수 있다. 인자가 올 때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이나, 생각하지 않은 날에 인자가 와서 악한 종을 엄히 때리고 처벌하여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는 경고의 메시지가 그렇다.
마태복음 5장 22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말씀하셨다. 그런데, 23장에 보면,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화 있을 진저’ 분노하고 계시고 ‘맹인된 인도자야’(23:24) ‘라가’라, ‘미련한 놈’이라 화를 내는 듯한 언사를 보이신다.
인자와 자비와 용서의 하나님인 줄 알았는데, 이 부분을 읽으면 혼돈이 온다.

4) 왜 그럴까? 주님은 그마 만큼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과 같은 위선적이고 거짓되며 독선적이고 교만한 모습을 싫어하신다 것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학자들은 나중에 성경이 기록되는 과정에서 마태를 비롯해서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의 메시지를 살짝 변형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현실적인 반영 때문에 말이다. 또 잘못됐다거나 위선이라거나 거짓이라는 그런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반영된 것을 탐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견 일리가 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대신 원수 갚아주시는 일’, ‘하나님의 보복’을 제하고 나면 실족하거나 메시지를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당시 교인들의 눈높이에 맞추었을 가능성이 있다.
오늘날도 이런 현상은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주제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귀에 좋은 말씀을 전한다.

5) 그러기에 여러분, 이 가능성에 대해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이다. 있는 그대로 읽어야 한다. 그런데 성경은 무흠하지만 교회는 얼마든지 예수님을 왜곡시키고 배반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학자들이 이렇게 주장하려는 것도 바로 이점 때문일 것이다.
현실적인 타협이 초래한 일들이 있다. 교회에 예수님이 없게 되었다. 세상에 대해 영향력을 잃어버렸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교회가 지우는 일, 용서와 사랑과 화해와 일치를 위해 일하셨던 주님의 뜻을 교회가 외면하는 일, 꺼져가는 생명까지도 아끼고 돌보셨던 주님을 생략하고, 실용성과 인간 기준의 가치판단에 따라 함부로 대하는 일, 오히려 죽음과 파괴를 눈감고 타협하는 일, 이런 일들을 교회가 하고 있거나 방관하고 있다.

당연히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실정이다. 세상적인 물질이나 권력이 바로 ‘다른 복음’이 되어, 성경은 바울을 통해서 ‘다른 복음’은 없나니,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복음만을 참 복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과 상관없는 ‘다른 복음’을 복음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 같다.

교회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예수님을 말하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데 요즘 교회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분열과 정죄와 미움과 다툼을 말하고 있다. 차별없는 사랑과 권리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데, 오히려 반대로 차별과 미움과 약자들, 소수자의 권리는 함부로 짓밟고 빼앗아도 좋다고 말하고 있다. 정의와 진리와 주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말해야 하는데, 불의와 거짓과 권력자의 뜻을 받들기에 여념이 없다.
여러분, 정말 뱀과 같은 간교한 속삭임이 무엇인지 아시는가? “물론 예수님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으셨겠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완전히 닮을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니 예수님처럼 하지 않아도 은혜만 사모하면 된다.”고 말한다.
불쌍한 사람이다.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노력하고 실천하면서 삶이 바뀌고 변화되는 기쁨과 행복을 모른다. 예수님의 사랑이 채워지고 그 능력이 힘을 얻어 삶의 보람과 의미가 새로워지는 것을 모른다. 더 좋은 세계와 나은 행복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정신이 흐릿하고 사납다.

4. 하나님의 자녀와 주님의 교회
1) 우리에게 오늘 주시는 주님의 말씀은, 정말 우리 시대와 상황에 꼭 필요한 말씀이다. 전쟁의 위협, 여러 갈등과 양극화, 불미스럽고 엽기적인 사건들, 수많은 폭언과 폭행들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주님의 메시지는 아주 명료하고 강하다.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하라.’

왜 주후 70년경 교회는 세상이 전쟁의 망령에 사로잡혔을 때 왜 그것을 막지 못했다. 왜였을까? 잘못된 지도자의 섣부른 판단으로, 명분이야 있었겠지만, 로마와 무모한 전쟁이 일어났을 때, 백성들이 그 전쟁터에 나가,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결국은, 망하고 말았다. 전쟁 뒤에 남은 것은 비극과 불행의 상처뿐이었다. 주님은 군대귀신(레기온, 로마의 군단병력을 이르는 말)을 물속에 빠뜨리실 수도 있는 분이셨다. 그 믿음으로 보다 더 적극적으로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전쟁을 피하는 길을 모색해야 하지 않았을까? 혹시 그 능력과 영향력을 잃어버린 것은 확신있는 믿음이 없었거나 예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혹은 현실과 타협하고 세상의 박해와 환난을 두려워한 까닭은 아닐까? 그 사이에서 주춤하며 방조한 책임은 없을까? 이 부분은 제가 더 연구해보고 싶은 대목이다.

2) 여러분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마땅한가? 구별돼야 마땅한가? 물을 것도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야 하는가?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46-47절을 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여러분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용서와 사랑의 결단을 하실 수 있겠는가? 주님은 우리가 샬롬의 마지막 보루가 되기를 바라신다. 아무리 세상이 악마적인 광기에 휩싸여 망령을 부린다고 하더라도, 교회만큼은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선포하고 그 길을 모색하며 기도해야 한다. 혹 그러다가 세상의 뭇매를 맞는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끝내 굴러오는 파멸의 바위를 비켜설 수 없는 것이다.

5. 주님의 상급
1) 그러고 보니까, 46절의 ‘무슨 상이 있으리요?’ 구절이 보인다. 이방인처럼, 믿음없는 사람들처럼, 세상사람들처럼, 똑같이 하지 않고, 주님께 순종하면, 주님께서 갚으시고 채우시는 상급이 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대신해서 원수에게 보복해주시는 것이 갚으시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상주시고 복되게 해주시는 것이 갚으시는 것인가? 여러분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2)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죽이기로 혈안이 돼있던 사람이다. 그에게 진노하시고 박해하셔서 제거하시는 것이 은혜일까, 그를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 은혜일까?
부활하신 주님은 그에게 찾아가셔서,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물으시면서, 복음의 귀한 일꾼으로 사용하셨다.

로마서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누가 다 헤아릴 수 있을까?
3)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시는 상급이 있다.
45절에, “이같이 한 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5:9절을 보면, “화평하게 하는 자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오병이어의 기적 헤롯의 타락한 잔치와 대조적으로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자리는 만나와 같이 은혜 내리시는 축복의 자리였다. 세상은 욕심을 통해서 풍성해지려고 하지만, 그러나 결코 채울 수 없지만, 주님은 헌신과 나눔을 통해서 풍족히 먹고도 12광주리나 남아도는 풍성함을 허락하신다. 세상은 탈취해갈지 모르지만, 주님 안에서 주님이 우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얻게 되는 되갚으심의 은총을 누리는 것이다. 구하는 것, 찾는 것 마다 구하고 찾게 되며, 두드릴 때 열리는 경험을 통해서 복된 길로 인도되고 있음을 체험할 수 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말라. 여러분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복되기를 위해서 기도면서 화평케 하는 일에 믿을 가지고 결단하며, 주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는 신앙을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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