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2.7. 주현절 마지막 주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사랑의 하나님, 거룩하게 구별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민족의 명절로 사람들의 마음이 고향으로 향하고 가족 친지로 향하는 때에, 본향을 기억하며 주님 전에 나왔습니다. 사모하는 영혼에 주어지는 놀라우신 은혜가 충만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2:15-16)
- 악마처럼 될 수도…
요즘 세상을 보면 보기 힘든 소동이 일어나고, 평화는 가뭇없이 사라졌다. 사람들이 살기 어렵고 말하고 고통스럽다고 말한다.
지난 주간에 우리는 깊은 상처와 아픔을 느꼈다. 어느 신학자이자 목회자가 저지른 모습은 충격이었다.
생명은 질기기도 하지만, 얼마나 연약한 것인데, 그것을 몰랐을까? 후회해봐야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세상이 어둡고 혼탁해질 때, 세상은 교회에 기대를 걸고 소망을 걸고 싶은데, 그렇지 못한 실정이다.
오늘의 말씀은 그 때, 우리 신앙의 본질을 되돌아보게 한다. 세상의 거짓된 영에 삼킨바 된 이들이, 교회와 세상에 불미스러운 일을 만들고 실망을 주었다. 요한의 고민은, 이것이 어디서 비롯됐고, 잘못된 것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이었다. 요한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지 못하고 굳게 믿지 못하는 영이 교회의 본질을 흐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너무나도 명료한 언어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말씀하고 있다.
오늘 우리 시대에, 교회가 세상에 소망을 주지 못하고, 복음이 되지 못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리고 길을 잃었기 때문은 아닐까? 성장과 부흥만을 강조하다보니, 정말 예수님을 닮기 위한 십자가의 도와 헌신과 희생을 상실한 것 때문은 아닐까?
그러고 나니까, ‘인간은 얼마든지 악마가 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성도가 예수를 잃어버리면, 처음 형편 보다 나중 형편이 더 심하다고 하는 말씀처럼, 괴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는 독일로 유학을 가기 전에 많은 교우들의 존경과 칭찬을 받는, 전도유망한 인물이었다. 그가 유학을 떠날 때, 모두는 그가 앞으로 더 좋은 신학자요 목회자가 되어주기를 기대했었다.
그의 가정은 사랑이 넘치고 단란한 가정이었던 것 같다.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였고, 아내에게도 좋은 남편이었다. 아내가 유방암으로 죽고, 재혼을 하면서 예상치도 못했던 위기가 닥쳐왔고, 길을 잃었다.
현실은 기대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다. 서로 간의 불화는 커져갔고, 자꾸만 꼬여갔다. 그리고 그 화풀이는 어린 막내에게 쏟아졌고, 결국에는 갈등을 넘어서지 못하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인생의 크고 작은 위기와 문제 속에서 그 모두는 그리스도의 평강을 잃어버렸던 것은 아닐까? 그 평강을 잃고 나니까, 폭력이 일상이 되고, 그 사나운 광기가 그들을 삼켜버리고 말았다.
김동호 목사님은 이 소식을 외국에서 접하면서 인간은 누구나 이럴 수 있는 존재이기에 ‘나는 내가 무섭다’라고 그 슬픔과 안타까움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요한1서5: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이 말씀이 너무나 크게 들려온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내 생명과 삶의 선택과 방향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주님의 방법으로 세상과 시험, 환난을 이기는 것이다. 예수님 없는 신앙 생활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다(2).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말씀하셨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든 순간에 굳게 붙들어야 할 이유이다. 인간은, 우리는 얼마든지 추악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하고 우리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기를 끊임없이 노력하자.
오늘 말씀 15절에서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한다.”고 말씀한다.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예수님께 받은 은혜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계신 것’이 아니다.
- 천사처럼 될 수도…
제가 주중에 본 또 다른 장면이 있다.
# 사진 : 조준범 목사의 이야기
시골 교회의 한 목회자가 마을 어르신들을 위해 차려놓은 무인 탁상이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후배이기도 하다. 어느 누구든지 버스를 기다리면서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동안, 자유롭게 간식을 먹도록 했다. 동네 어르신들이 띄엄띄엄 오는 버스를 기다리느라 무료하거나 심심하지 않도록 차려놓은 배려였다. 자녀들은 모두 도회지로 나가고 홀로 남으신 어른들은 자주 외롭다. 그분들에게, 미력하나마 아들, 딸이 되어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이 목회자 부부의 마음이었다.
이런 모습들을 생각하면, 인간은 얼마나 아름다운 천사도 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복음을 체험한 경험이 있는 자라면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예수님 때문에, 우리의 폭력성과 죄악된 본성이 끊임없이 녹아지고, 죄를 깨닫고 난 뒤의 눈물은 우리의 영혼을 깨끗이 정화한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능력이 우리에게 생기는 것이다. 그 사랑의 능력으로 세상과 삶의 문제를 이기는 것이다.
- 괴물 vs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
여러분 아시는가? 교회는 괴물이 될 수도 있고,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이 될 수도 있다. 큰 교회여도 예수님의 모습이 없으면 괴물이다. 그러나 작은 교회여도 예수님 있으면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이다. 물론 반대로도 말할 수 있다. 작은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없으면 그것은 자기들만의 친목모임 이상이하도 아니다.
주님은 우리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기를 바라실까? 요한을 통한 주님의 말씀은 신앙공동체가 세파의 혼돈 속에서 길을 잃지 말고, 마땅히 해야 할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씀한다(11, 21).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12)
주님은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는 교회가 되길 바라신다.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하다 보니, 닮아가는 교회되길 원하신다. 그 사랑을 온전히 이루는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이 되길 바라신다.
예수님의 사랑에 잇대면, 우리가 체험하게 되는 것이 있다.(→ v.18)
-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는 그리스도인
1) 극동방송 어느 집사님의 간증
극동방송을 듣다가, 어느 집사님의 간증에 은혜를 받고 눈물을 흘렸다. 짤막한 간증이었다. 친정아버지가 대장암에 걸렸다. 신앙은 없었다. 그런데, 담임목사님이 찾아오셔서 기도해주셨다.
그 밤에 주님께서 아버지에게 찾아오셨다. 아버지에게 변화가 일어났다. 예수님을 그렇게 거부하던 분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했다. 딸은 너무나 기뻤다.
여러분, 병간호 해본 분들은 알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얼마든지, 가족 간에, 형제간에 불화와 갈등이 생길 수 있는지 말이다. 죽음에 대한 염려가 엄습하고 그 두려움은 가족들의 마음을 거칠게 만든다. 그 때문에 고난은 더 어려워지기도 한다.
딸은 아버지가 구원받았다는 것만으로도 기뻐서, 모든 형제들이 그랬겠지만, 더 정성스레 간호를 했고, 그 남편은 힘이 돼주었다. 참 믿음의 가정은 이런 모습이다. 아무래도 자기 가정에 소홀할 수 있는데, 가족 모두가 예수신앙 안에서, 외할아버지, 장인을 위해서 기도하고 하나가 돼주었다.
그는 이렇게 간증했다. 그 밤에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아버지를 고쳐주셨다. 대장암 수술도 잘 받고, 항암치료도 잘 마치고 완치됐다. 지금은 건강해져서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했다. 아버지가 구원받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늘 그림자로 드리워 있었는데, 두렵지 않았고 염려도 사라졌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해도,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은혜 속에 살게 된다. 그것을 자기가 전부 감당하려고 하다 보니, 마음이 인색해지고 거칠어지기 일쑤이다. 그러다보면 예수 믿으면서도 악마도 되고 괴물도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의지하고 붙드니까 심령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가? 그는 두려움을 잊었고, 힘든 게 힘든 것인 줄 몰랐다. 오히려 그 사랑 안에서 감사함을 느꼈다.
18절 말씀을 보라. 우리가 주님 때문에 체험할 수 있는 것은 담대함이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18)
2) 주님은 우리가 구원의 사모함이 있기를 바라신다.
특별히 구원의 사모함이 있기를 바라신다. 가정에서 남편, 자녀, 부모가 예수님 믿지 않는데, 편안한 마음, 아무렇지도 않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신앙은 참된가, 점검해야 한다.
물론 가족 간에 종교적 갈등이 유발되기 때문에 쉽지 않다.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마 만큼 사모하는 열정과 믿음을 가지고, 더 잘 섬기고 사랑해야 한다. 골로새서는 이렇게 말씀한다.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골4:3)
어떤 집사님이 평소 밉던 남편이 막상 아파서 중요한 수술을 한다니까, 걱정이 되더라고 했다. 죽음의 문턱에 서 있다는 생각을 못했을 때는, 어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수술이 잘못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염려가 컸다.
그래서 사람은 위기를 겪어봐야 정말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 같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의 일상의 작은 것들, 평범한 것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인가?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고 여겨, 소중하고 가치 있게 만들 기회들을 다 놓치고 만다. 하지만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사랑의 기회를 잃지 않고, 어려움을 사랑으로 이기게 된다.
그러니 가족을 전도하고 구원할 기회를 열어달라고 기도하라. 주님께서 하신다. 자기가 하려고 불화하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으로 더 섬기고 헌신하라. 그 사랑에 불화와 미움과 갈등의 악마성은 사라지고 만다. 우리의 헌신과 수고와 노력은 주님께서 채워주시고 복주시는 것이다. 사람에게 보상을 바라고 인정을 바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더 크게 상주시고 복주실 것을 믿고 감당하라.
- 예수 사랑을 닮아
차를 잠시 세워두고 이런 기도를 드렸다.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복음을 경험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앞으로 예수 닮아가는 기쁨까지 알게 하옵소서.’
왜 그런가 하면, 이것이 없으면 신앙이 일시적일 수 있다. 치료받고 구원받은 기적적인 체험에만 머물고, 사모하면, 예수 없는 신앙이 되고 만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을 수 있을까? 우리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분의 완전하심을, 우리는 어림도 없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잘 못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예수를 닮는 것은 율법이나 행위의 측면이 아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고 본받아야 한다. 12절 하반부에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말씀했다. 예수님을 닮는 것은 완전해서가 아니라 불완전해서, 연약해서, 부족해서다. 그러나 예수님 사랑의 능력이 온전히 이루어짐을 믿고, 달려갈 길 달려가는 것이다.
# 금 간 물 항아리
한 아낙이 매일 물지게를 지고 샘터까지 먼 길을 오가며 물을 져 날랐다. 양쪽 어깨에 항아리가 하나씩 걸쳐져 있었는데 왼쪽 항아리는 살짝 실금이 간 항아리였다. 그래서 물을 가득 채워서 출발했지만, 집에 오면 왼쪽 항아리의 물은 항상 반쯤 비어 있었다. 왼쪽 항아리는 금 사이로 물이 줄줄 흘러내렸고, 오른쪽 항아리의 물은 그대로였다. 왼쪽 항아리는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그러던 어느 날 아낙에게 말했다.
“주인님, 저 때문에 항상 일을 두 번씩 하는 것 같아서 죄송해요. 금이 가서 물이 새는 저 같은 항아리는 버리고 새것으로 쓰시지요.”
아낙이 빙그레 웃으면서 금이 간 항아리에게 말했습니다.
“나도 네가 금이 간 항아리라는 것을 알고 있단다. 그렇지만 괜찮아. 우리가 지나온 길의 양쪽을 보거라. 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오른쪽 길은 아무 생명도 자라지 못하는 황무지가 되었지만, 네가 물을 뿌려준 왼쪽 길에는 아름다운 꽃과 풀과 생명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잖아.”
“너는 금이 갔지만, 너로 인해서 많은 생명이 자라나고, 나는 그 생명을 보면서 아주 행복하단다. 너는 지금 그대로 네 역할을 아주 잘 하고 있는 것 이란다.”
사람들은 완벽함을 추구하며 자신의 조금 부족한 모습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자기 자신을 가치 없는 존재로 여겨 낙심에 빠질 때도 있다. 완벽을 추구하고 그 완벽이 깨진 순간, 날카로운 악마성을 드러낸다. 그렇지만 세상은 금이 간 항아리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완벽한 항아리들 때문에 삭막할 때가 더 많다.
#영화 ‘사도’ – 완벽을 추구했던 아버지 영조
사랑의 순간은 가장 진실하고 영원하다. 그것을 믿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잇대어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고 따라서 순종하는 것이다.
세상은 어지럽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푸른 가슴을 주신다.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주고, 악마가 아니라 천사가 되어주며, 교회는 괴물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하신 몸이 되어주기를 소망하도록 원하신다.
여러분 이 시간 기억하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주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다. 그 사랑을 마음에, 우리의 영혼 깊이 가득 채우고 사랑이 넘치길 원하신다.
명절에 가족부터 사랑하는 기회요,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는 기회로 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