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3일 / 부활절 5주, 어린이 주일, 창립기념주일
여러분 모두를 환영한다. 우리 좋으신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바란다.
주중에 동네에서 어느 분을 만났다. 커피숍을 운영하고 있는데, 거기도 이번 5월 11일이 오픈한지 5주년 되는 날이란다. 누군가를 축하해주는 기쁨은 행복한 것이다. 그날 축하해줄 예정이다. 축하받는 입장은 앞으로 더 잘하라는 메시지겠다. 앞으로 더욱 기대에 부응하는 교회가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매년 우리 교회는 창립주일과 어린이주일과 겹친다. 참 의미가 있다. 어린 아이와 같은 교회!
그런데 사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막10:15)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도움이 안 된다고 배제시키려는 이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아이들이야 말로 누구보다 천국을 더 잘 받들 수 있는 존재임을 주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교회가 작다고만 생각할 게 아니다. 어느 교회 못지않게 하나님의 나라를 더 잘 받들 수 있다. 그래야 한다.
저는 예수님이 참 좋다. 특히 그 시선과 눈빛을 말이다. 그것은 이런 것이다.
이스라엘은 선지자 에스겔의 말을 따라, 예루살렘 시온 산에 백향목과 같은 나라가 세워질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희망했다. 공중의 많은 새들이 깃들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주님은 이것을 패러디하신다. ‘천국은 마치 자기 밭에 가져다가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공중의 새들이 깃든다’고 말씀하셨다.
백향목 같은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겠는가? 존귀하고 위엄있고 권세있고 능력 있는 나라. 그런데 그 기준에 들지 못한 사람은 감히 누추한 모습으로 서있는 것 자체가 불편하다. 사람들은 대단한 것, 위대한 것, 거창한 것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시는가? 그 백향목 같은 나라는 늘 성취될 미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달리 말하면, 영원히 성취되지 않는, 그저 바라만 보는 달빛에 불과하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다. 현재적이고 일상적인 것이다. 오늘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면서 살아가지만, 그래도 바로 오늘 우리 삶의 자리에 이룰 수 있다. 이것은 잠시 뒤에 이것을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릴 예정이다.
그 전에, 행복이란 무엇인가? 장차 모든 여건이 나아지고, 좋은 집, 좋은 차, 출세나 성공을 하면 오는 것인가? 그러면 행복한가? 여러분은 행복하신가? 그렇지 않다. 이런 것으로 행복이 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불행이란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갖지 못하면 불행한가? 성경은 하나님과 그 나라와의 친밀함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 곧 불행이라고 말한다. 죄 때문이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어떤 잘 못을 저지르는 게 죄가 아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하지 못한다. 그리고 불행하다.
주님은 하나님과 친밀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공중을 날다 지친 새들이 흔한 겨자풀에서 쉼을 얻듯이, 하나님 나라는 우리 삶의 자리에 너무나 가깝고 친밀한 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커피숍 주인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윤만을 남길 목적으로 여기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애엄마들 와서 커피를 마시고 삶의 애환을 나누고, 위로와 나눔이 있다. 이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알게 모르게 만들기 위해 애썼으니,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말이다.
하늘을 날다 지친 새들이 쉼을 창하고 깃들 수 있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지금 행복하시기 바란다.
좀 전에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다고 한 것을 생각해보려고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적인 것이 이 아니라 현재적이고 일상적이라는 것 말이다.
하나님과 그 나라를 보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주님은 그러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보신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셨는가? 이 ‘세계’를 보셨다. 그 가운데, 깃들어 있는 하나님을 보셨다. 이게 중요하다. 오늘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로 가득하다는 영성 말이다.
주님은 하늘나라를 보시기 위해 공중의 새들을 보셨다.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모아들이지도 않는데도, 하나님께서 기르시는 것을 보셨다. 들판에 핀 꽃을 보셨다. 수고도 길쌈도 하지 않지만 솔로몬이 영광으로 입은 것이 이에 미치지 못했다. 병자들과 죄인들을 보셨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꽃피어날 이들이었다.
여러분 이런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아는가?
다산 정약용이 다산초당 18명의 제자중 하나였던 윤종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정월 초하룻날 가난한 선비가 앉아서 일 년 먹을 양식을 따져 보면 진실로 아마득하다. 생각으로는 하루도 못 가 굶주림을 면치 못할 것만 같다. 하지만 섣달 그믐날이 되어도 여전히 여덟 식구가 모두 살아남아 한 사람도 축나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되짚어 봐도 어찌된 셈인지 알 수가 없다. 너는 이 이치를 능히 알겠느냐? 누에가 껍질을 까고 나오면 뽕잎이 움터 나온다. 갓난아이가 어머니 태에서 나와 한번 울음소리를 내면 어미의 젖이 벌써 주르륵 흘러내린다. 양식을 또 어찌 근심하겠느냐? 네가 비록 가난해도 근심하지 마라.”
세상사는 이치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임재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라고 하신다.
저의 첫 목회지는 경남 창원에 있는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참 힘들었다. 월 25만원으로 지내야 했다. 내일이 걱정이었다. 그런데 15년이 지났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무사한 줄 알았다면 그렇게 걱정하고 살았을까? 기쁨으로 이겨내며 보다 더 멋진 일, 근사한 일에 마음을 두며 살게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늘 걱정이다. 내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오늘 불안해한다. 끝장날 것만 같을 때도 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만큼 힘겹다. 그런데 되돌아보면 높은 산처럼 여겨졌던 것도, 못 넘을 산 아니었고, 그렇게 큰 문제 아니었다. 2년 전 우리가 다 아는 어려움을 당했지만 오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렇기에, 기뻐할 수 있었다.
어려움을 이겨내는 비결. 승리의 비결.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주님은 말씀하신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을 믿을 때, 이 믿음과 신앙의 용기와 담대함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으며 살라. 하나님이 부르신다. 하나님이 찾으신다. 하님이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도우신다. 하나님이 잘되게 해주신다.
하나님은 알지 못해도 희망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지금은 힘들지만 인내하고 참고 견디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를 한다. 이런 희망을 갖고 오늘의 어려움을 견디라고 세상의 격언은 말한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참 희망은 하나님이 우리와,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나에게 연약하고 부족하고, 죄책감이 있고, 잘 못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함께 하신다는 것, 그것이 희망이다.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원 뜻도 그렇다.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 ‘바실레이아’라는 말은 통치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곳, 하나님이 임하시는 곳이 하나님 나라이다. 어느 영역적인 의미가 아니다.
첫 목회를 할 때, 그 때도 개척교회였는데, 아이들만, 4명이 있었다. 처음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성장과 부흥의 큰 포부’를 가지고 부임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버티다, 버티다, 지쳤다. 한 주 헌금이 5천원이었다. ‘하나님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했는데, 이 금액으로 하나님의 일을 뭘 한단 말입니까?’ 심통이 났다. 어느 날 오렌지가 너무 먹고 싶었다. 그래서 블랙라벨이 붙은 오렌지 8개를 3천원에 샀다. 그 사실만으로도 행복해졌다. 3천원의 행복!
너무 좋아서, 오는 길에, 우체국에 들렀다. 여직원 3명이 있었는데, 평소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하나씩 줬다. 또 오다가 PC 방에 들렀다. 컴퓨터가 없어서, 알바생이 30분씩 짧게 짧게 무료로 사용하게 해줬기 때문에, 고마워 하나를 줬다. 오다가 건물주인을 만나 아들과 함께 고마워 하나씩 줬다. 결국 오렌지를 그렇게 다 나눠줬다. 도대체 저는 그날 무엇을 먹은 것일까? 그들은 무엇을 받은 것일까? 오렌지를 받은 것인가? 고마움을 받은 것인가?
그날 하나님께서 이것을 깨닫게 하셨다.
3천원으로도 행복을 나누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의는 성과나 업적이 아니다. ‘나눔’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의였다. 하나님은 앞으로 크게 성장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천국이 가까웠다, 임했다고 말씀하신다.
작은 것도 소중한 것이다. 여기 물 한 잔이 놓여있는데, 물을 떠 놓은 것이 아니다. 목회자의 목소리가 갈라질세라, 목소리를 떠 놓은 것이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하고, 그 사랑을 받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오늘 읽은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은 바울에게 기도제목을 주셨다. 17절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성경적인 계시는 미래를 내다보는 투시력이 아니다. 하나님을 보는 눈이 열리는 것이다. 그게 계시다. 예컨대 오렌지 3천원어치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직시하는 눈이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돌보고 계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며 아끼고 계심을 아는 눈이다. 저 역시 여러분에게 동일한 마음이다. 하나님을 아는 마음,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주시기를 원한다.
이 편지를 쓸 때는 바울은 로마에 투옥돼 있었다. 빌립보교회와 마찬가지로 에베소교회 역시 바울의 투옥소식은 충격이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부활하신 예수님은 정말 살아계신가?’ 하는 강한 회의감에 빠지게 했다. 박해가 시작되고 환난의 검은 구름이 온세상을 덮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바울에게 들려온 것은 의외의 소식이었다.
15절을 보라.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이런 상황에서 사랑의 소식을 듣는다? 사랑으로 어려움을 이겨내며, 더 좋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어 가고 있다? 당연한 것 같지만, 당연하지 않다.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베소는 큰 도시였다. 수많은 신전과 우상들이 가득했다. 다양한 가치와 문화가 공존하고 있었다. 문제는 언제 나타나는가? 공존할 때는 좋은데, 의견이 분분할 때는 어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가 자기를 용병으로 고용하는 두목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도 저울을 가졌소?’ 사람들이 좋은 관계를 맺고 사는 것 같지만, ‘저울을 가지고 있다. 이해관계가 맞을 때는 좋지만, 손해를 보고 피해를 볼 때는, 관계가 나빠진다. 혹시 우리는 인생을 저울질 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아닌가? 마음속에 저울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는 저울질에 사랑의 양과 질이 결정된다. 기억하라. 행복할 수가 없다.
에베소 도시는 아니었을까? 우리가 사는 삶의 자리가 어디라고 다른가?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서 전도할 때, 많은 능력이 나타났다. 마술책들을 스스로 가져다가 불살랐을 정도다. 그 양이 엄청났다. 미신이 사라지고 악귀도 떠났다. 바울은 그 도시에서 정말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는 사람이었고, 두란노 서원에서 2년이나 가르치고 활동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우상이 사라지자 신상 모형을 만드는 직공들의 수입이 크게 줄었다. 바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바울이 좋은 사람이고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지만, 이득이 사라지고 손해가 발생하자 소동을 일으켜, 결국 바울을 곤란에 처하게 했다. 사람은 이처럼 이해관계에 따라 대하는 게 달라질 수 있는 모순적인 존재이다.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은 에베소의 시민들 아닌가? 적어도 그 영향을 안 받을 수 있는가? 그런데 무엇이 다른가? 이해관계와 이익관계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했다는 것이다.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의 소식을 나도 들었다.’ 지금 바울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에 서신을 보냈을 때 썼던 표현처럼, ‘그리스도의 향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성도는, 교인은, 안 믿는 사람들과 달라도 뭔가는 달라야 한다. 특히 사랑의 능력에 대해서는 남달라야 한다. 그러기를 바란다.
이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힘주시고 능력주시는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향한 열렬한 믿음 때문이다.
18-19절에 바울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지?’, ‘기업을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인지?’, ‘하나님의 위력과 능력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기도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 에베소 교회의 소문은 그랬다.
그래서 16절을 보면,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기도제목 대로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도하던 차에, 들려온 소식을 통해 주님께서 응답하셨음을 알고 감사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주님께서 일하고 계신 교회, 역사하고 계신 교회! 사랑을 선물로 받은 교회! 그에 대한 감사를 드리고 있다 .자신의 처지와 세상의 박해와 환난으로 실족하거나 낙심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기를 위해서 있지 않았다. 하나님을 위해서 있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있었다. 우리가 크리스찬으로 있어야 하는 이유는,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믿음으로 이것을 깨닫고 신앙을 굳게 지키고 있었기에 계시록에서처럼, 사랑 많은 교회라는 칭찬을 들었다.
교회가 세상을 닮아가면 안된다. 세상이 교회를 닮게 해야 한다.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이타적인 사랑으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20~22에서 온 세계의 참 통치자에 대한 고백을 하면서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
홍순관의 노래가 생각났다. “꽃 한 송이 핀다고 봄인가요? 다함께 피어야 봄이지요?” 지천에 복음의 꽃을 피워내는 복된 교회가 되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