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29일 / 고난주일, 종려주일)
얼마나 반가운지! 오래 기다린 것 같다. 한 주 사이에, 산수유, 개나리, 목련, 지천에 꽃이 폈다. 목련은 깨끗하고 흰 세마포를 입은 것 같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승리의 날, 주님의 하늘군대는 그 옷을 입고 있다. 그리고 백마를 타고, 주님을 따른다. 그처럼 그 화려한 자태는 고난의 승전보를 알려주는 것 같다.
시련을 견디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나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마도 봄꽃들을 기다려온 이유는 이래서겠다. 우리 삶에서도 이런 희망을 발견하고 싶어서 말이다. 계절은 이처럼 꽃을 피우는데, 우리의 형편은 어떤가? 아직 봄이 멀고, 꽃이 피어나기도 전에 죽을 것 같아 불안하기도 하다. 그러나 조금만 더 견디라. 조금만 더 힘을 내라. 그래서 병마를 물리치라. 불황을 견뎌내라. 불화와 갈등, 그리고 인생의 시련을 이겨내라. 그런 뒤에, 승리했다고 하는 승전보를 듣고 싶다. 승리의 나팔소리가 여러분에게서 힘차게 울려나길, 간절히 바란다.
정호승의 시집,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에 나오는 “꽃을 보려면”이라는 제목의 시를 만났다.
꽃씨 속에 숨어 있는 / 꽃을 보려면 / 고요히 눈이 녹기를 기다려라 //
꽃씨 속에 숨어 있는 / 잎을 보려면 / 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려라 //
꽃씨 속에 숨어 있는 / 어머니를 만나려면 / 들에 나가 먼저 봄이 되어라 //
아직 피어나지 않은 꽃을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이 녹아 있다고 볼 수 있겠다.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소망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따뜻해져야 하는구나!’ 봄이 와서 절로 꽃이 피고 잎이 돋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대기와 토양으로부터 나무의 몸까지 따뜻해져야 한다. 그러면 꽃이 피고 잎이 나는 것이다.
자연은 봄을 맞았지만, 우리 인생은 아직 봄이 멀다고만 느꼈는데, 그래서 이렇게 되물었다. ‘내 삶은 꽃을 피울 따뜻한 온기가 준비되었는가?’ 말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더 없이 따뜻한 분이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는 따뜻해지는 경험을 한다. 성경에서 가슴이 냉담했던 사람들도 예수님을 만나면 심령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복음의 꽃을 피웠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려움에 질려 간담이 얼어버린 제자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으라’ 하셨다. 얼마나 따뜻한 체험이었을까?!
정호승 시인은 시의 마지막 부분을 이렇게 노래한다.
꽃씨 속에 숨어 있는 / 꽃을 보려면 / 평생 버리지 않았던 칼을 버려라
사순절 순례의 여정을 걷고 있다.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칼로 선자는 칼로 망한다. 네 칼을 도로 꽂으라.’ 여러분 칼을 가진 사람은 아닌가? 칼날 같은, 차디찬 앙심을 품고 있지는 않은가? 물론 상처받지 않으려고 그랬는지 모른다. 자신을 방어하려고, 손해보지 않으려고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꽃을 보려는 기대는 요원했는지도 모른다. 보복에 보복을 반복하면서 폭력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뭔가 이룬 것 같지만, 잎만 무성할 뿐이다.
사순절 마지막 주일이자 종려주일에, 평생 버리지 않았던 칼을 내던질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있길 바란다. 그리고 여러분의 삶에 꽃이 피어나길 축원한다.
‘들에 나가 봄이 되라’는 말이 저에게는 또 다른 하늘의 메시지로 울리는 듯하다. 저의 사명이 이와 같아야 함을 잊지 않는다. 여러분에게도 따뜻한 봄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저는 봄나무와 꽃들을 마주하면서, 이런 것이 떠올랐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보는 것 같았다. 새벽예배 마치고, 이른 아침, 어느 분의 병문안을 가면서였다. 전날에는 보지 못했던 꽃들이 보였다. 그 순간 그 이른 아침이 참 신비롭게 느껴졌다. 나무들은 자신의 깊은 곳에 ‘뿌리’를 내려, 꽃을 틔웠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이 이런 것이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아, 그도 하나님께 믿음의 뿌리를 내렸으면 좋겠다.’ 이것이 그를 찾아가면서 주님께 드리는 소원이었고 간절한 바람이었다.
화분에 심겨진 나무들은 모조리 겨울을 이기지 못했다. 그러나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나무들은 겨울을 이겼다. 이것이 자연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진리와 확신이다.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주지 못하는 분들이 많다. 건강, 재정난, 취업. ‘내가 무엇을 도와줄 수 있을까?’ 늘 목회자로서 하는 고민이다. 그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런 처지와 형편이 안 된다. 하지만, ‘내게 은과 금이 없어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이 선포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한다.
나무에게서 배우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리 비가 내려도 뿌리가 없으면 안 된다. 반대로도 말할 수 있다. 아무리 가뭄이 심해도 뿌리가 깊은 나무는 시들지 않는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우리 믿음의 뿌리가 깊어지기를 소원한다.
밤새 베드로와 형제들은 빈 그물만 걷어 올렸다. 밤새 헛수고뿐이었다. ‘헛탕질’ 그들에게, 주님은 이 말씀을 하셨다. 밤새 헛수고를 했는데, 이 말씀을 듣고 또다시 그물을 내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친 몸이다. 마음도 피곤하다.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고기를 잡는 일은 예수님보다 베드로가 더 전문가다. 그런데, 여기서 베드로가 ‘주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다시 내리겠노라고 했다. 싫겠지만 그렇게 하는 것! 참순종의 모습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그 내린 ‘깊은 곳’이란 어떤 의미일까? 이것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어떤 분들은 고기를 잡든지, 장사를 하든지 하려면, 길목이 좋아야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길목 좋은 곳인가?’ 또 어떤 분은 당장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더 꿈과 이상 그리고 비전을 선택하라는 의미로 적용하기도 한다. 또 어떤 분들은 남들과는 차별화된 색다른 생각이라고 하기도 한다. 여러분은 어떠신가?
무엇보다 성경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주님의 관심에 관한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신 분도 있다. 전에 거제도에서 어느 수양회를 했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낚싯대를 5천원에 빌려주기에, 재미삼아 해봤다. 한동안 잘 잡히더니, 어느 순간부터 한참을 기다려도 안잡혔다. 알고봤더니, 썰물 시간대라 사람 무릎정도 밖에 안 될 정도로 바닷물의 수위가 낮아져서 그랬다. ‘아하, 깊은 데란 달의 중심이구나!’ 마찬가지로 여기서 보여주는 깊은 곳은 ‘하나님께서 그 관심을 가지고 계신 곳의 중심’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중에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말씀하신 것 아니겠는가?
‘깊은 데’란 다른 것이 아니다. 주님의 관심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만약 이런 것이었다고 생각해보라. 성전에서 두렙돈을 헌금한 과부보다, 미석으로 지어진 것을 자랑하라는 이들에 대해 관심을 더 많이 가지고 계셨다면? 영생을 묻기 위해 찾아온 부자청년이나 관리의 영혼에 대한 것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재물과 명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면? 어떨까? 함께 식사를 함께 하셨던 죄인이나 세리보다, 식사 전에 정결례를 치룸으로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장로들과 바리새인에게 더 관심을 많이 가지셨다면? 고통 받는 사람의 사정보다 ‘안식일’이라고 하는 규정과 원칙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셨다면? 여러분 어떨 거라고 생각하는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다. 그러자 장정만 5천명이나 됐다. 그 사람들 예수를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고 했다. 더 힘을 규합한다면 금방 사람들이 모여들 테고, 헤롯의 성이 그리 멀지 않았다. 헤롯은 자신들을 위하는 척 하면서 자신들을 외면하고 있었다. 로마에 빌붙어 고통을 가중시켰다. 그 헤롯을 끌어내리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의 명성을 칭찬하며 왕으로 삼으려고 했다. 정치적 메시야를 기대했다. 생각해보라. 남들이 나를 이렇게 대우할 때,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주님은 단호히 거절하셨다. 그리고 기도하러 산에 오르셨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 명성에 관심을 가지느라, 하나님의 일,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이는 십자가의 길을 따르지 않으셨다면? 여러분 어떨까?
주님의 관심은 무엇이었는가?
우리가 잘 아는 대로다. 주님은, 온갖 병자들을 찾아서 고쳐주셨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주셨다.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소외된 이에게 찾아가셨다. 아버지의 울타리를 넘어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을 긍휼한 마음으로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아셨다. 그래서 99마리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게 더 관심이 있으셨고, 의인보다 죄인에게 더 관심이 많으셨다. 가난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셨고,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들을 보시면서 불쌍히 여기셨다. 죽음이나 슬픔을 당하여 애통해하는 더 없는 따뜻한 품으로 위로하셨고, 겨자씨와 같은 믿음으로 희망을 품고 있는 이에게는 큰 비전이 돼주셨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다 내게로 오라’ 부르시고, 그 쉼과 회복에 관심이 있으셨다.
우리의 일상생활과 그 속에서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셨을까? 무엇을 입을지, 무엇을 마실지, 먹을지, 그런 것 말이다. 내일 일에 대한 염려 말이다. 그리고 근심 말이다. 우리가 자주 당하는 절망, 낙심된 마음에 대한 것은 어떨까? 우리가 겪는 갈등과 불화에 대해서는 어떠셨을까? 좋은 밭에 가라지가 심겨진 현실에 대해서는 어떠셨을까? 누가 서로 큰지 비교의식으로 경쟁하는 이들에 대한 관심은? 기도를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배우기를 원하는 이들에 대한 관심은? 보아도 보지 못하는 우리의 영육간의 건강에 대한 관심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주님은 어떤 사람에게 관심이 있으시다고 생각하는가? 기억하라. 주님은 여러분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다. 그 관심이 지대하시다. 고난과 고통의 문제에 개입하시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이런 주님의 관심과 사랑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지 않는가? 저와 여러분에게 관심이 크시다. 어디? 눈에 보이는 피상적인 얕은 곳이 아니라, 그 깊은 곳에 관심하고 계시다.
잠언20:5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내느니라.” 그 수심을 모르는 깊은 데서, 그것을 길어내는 명철한 분이 바로 우리 주님 예수가 아니고 누구겠는가?
여러분, 주위를 둘러보라. 이 자리에 대해서 말고, 여러분 삶의 자리에서 말이다. 나와 같은 고통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따뜻한 말과 마음이라도 위로를 얻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관심 갖고 찾으시는 사람은 누구인가? 복음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런 식으로 전도의 꽃이 피어나고 열매를 맺겠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체험이다. 긍휼하신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경험하고 확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의 믿음의 뿌리가 그 주님의 긍휼하심과 자비에 뿌리를 내리게 될 때, 어느새, 자신의 삶에 주님의 은총도 꽃피어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른 아침 제가 느꼈던 신비감처럼 주님의 신비가 여러분에게 임해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2015년 창립 5주년 기념주일 5월 3일, ‘153구원데이’ 슬로건을 이렇게 잡았다. “1명 이상, 5주간, 3가지 행동으로 전도하자.” 3가지 행동은 기도, 말씀문자보내기, 선물하기다. 7은 영적완전수이다. 7일 천지창조, 7나팔, 인, 대접, 일곱 금촛대 등등, 10은 숫자적인 완전수이다. 10계명, 10처녀 비유, 십진법. 이둘을 더한 숫자가 17인데, 1부터 17까지의 도합이 153이다. 요한복음에서 153은 베드로가 잡아올린 물고기 수인데,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이는 모두가 구원받는 구원의 완전수를 의미한다.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 됐으면 좋겠다. 주님은 빈 그물을 씻고 있는 이들을 제자 삼으셨다. 우리의 모습이 이와 같았겠지만, 주님의 일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좇듯이, 순종함을 통해, 우리 삶에도 봄꽃들이 피어나기를 기대한다.
그 뒤에는 그것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 계시다. 계시록21:6-7,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주의 음성이 우리에게 들리길 기도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 응답의 노래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란다.
들에 나아가 따뜻한 봄과 같은 사람이 되시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