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3. 8. / 사순절 3주)

 

새까만데 깨끗하게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숯이다.

탈 기회도 없이 타버린 게 숯이다. 만들어지는 과정은 이렇다. 숯가마에 넣고 공기가 차단된 채, 태워진다. 우리는 속이 탈 때랑 비슷하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시원하게 호흡할 수 있도록 뚫어주시면 얼마나 좋으랴. 말도 못하고 꽉 막힌 답답함으로 속이 숯처럼 시커멓게 타버린다. 그래서 병도 난다.

속상한 일을 만나거나 속 태우는 일을 만나면 너무 그러지 마라. 몸이 상한다.

 

사순절 3째 주일, 제 귀가에 들려온 주님의 음성은 ‘돌아오라’는 주님의 부르심이었다.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고 사순절 기간에 꼭 짚어보고 점검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잠언 17:22은 이렇게 말한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육신의 병이든, 영혼의 상처이든, 그것은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말일 것이다. 물론 긴장감을 가질 수 있는 스트레스는 우리로 하여금 성실한 삶으로 인도할 때가 있지만 심한 스트레스는 우리의 삶을 병들게 한다.

 

잠언 18:14, 사람의 심령은 그의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모두가 공감하는 바이다.

 

마음이든, 육체든, 이러한 질병과 상처는 단순히 그것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삶의 문제나 운명의 문제와도 연결된 부분이다. 삶이 건강하기 위해서 마음도 육체도 건강해야 한다. 그래서 힐링이 필요하고 회복이 필요하다. 그리고 여기에 시간과 돈을 많이 투자하기도 한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인생과 건강한 삶의 근본적인 문제원인을, 죄의 문제라고 말한다. 힐링이나 회복도 중요하지만, 제일 먼저 우선적으로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한다.

 

다윗의 인생은 고통을 많이 당했다. 왕이 되기 이전에는 사울로부터 고통을 당했고, 왕이 된 이후에는 자녀들과 신하들 때문에 고통당한다. 나중에는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았다. 왕이 되기 전에는 사울이 그를 시기해서 죽이려고 했다. 왕이 된 이후에 그의 삶 속에 일어난 일들은 저주에 가깝다. 암논과 다말 사이에 일어난, 입에 담지 못할 이야기. 압살롬의 복수와 나중의 반란, 다윗의 후구들이 백주대낮에 사람들 보는 앞에서 욕을 보이는 장면, 세바의 반란, 해결해야 할 나라의 문제, 이스라엘과 유다 사이에 벌어진 갈등문제 등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풍랑들을 겪었다. 그런데 그가 언제부터 불행했을까?

 

나중에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체질 문제거나 단순 건강문제일까? ‘그렇다’라기 보다는 결국 죄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왕이 되기 이전의 다윗과 왕이 된 이후의 다윗을 보라. 왕이 되기 이전에도 사울이라는 고통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삶은 건강했다.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있었고, 고난 중에도 그는 불행한 사람이 아니었다. 시편 26:2,11-12은 이렇게 고백한다.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고난과 위기 속에서도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만하니 마음의 평강은 믿음과 담해함으로 이어졌다. 그의 영혼과 삶은 건강했다.

그러나 밧세바를 취해 죄를 범했다. 그리고 불행해졌다. 삶은 병들게 됐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을 꾸짖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삼하12:10-11) 게다가 하나님의 얼굴이 더 무섭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말씀이다.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삼하12:12)

시편 32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심정을 토로한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죄가 만천하에 드러날까 봐서 신음하고, 사람들에게 숨길 수는 있어도 하나님께는 숨길 수 없어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신다고, 그래서 진액이 빠졌다고 한다. 그래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아무리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고, 헐벗은 것이나 다름 없게 되었다.

그가 힐링을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아서 이 상태가 됐을까? 아니다. 죄의 문제였다. 시간과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다윗의 이 범죄를 아는 사람이 또 다른 단 한 명이 있었다. 요압이다. 우리야를 적진 깊이 들어가게 하고, 지원부대는 후퇴하도록 한, 그 지시에 따른 장군이 요압이다. 이것은 필시 우리야를 죽게 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 음모의 내용을 요압이 눈치 채지 못했을까?

요압은 다윗 평생의 충성스러운 신하이다. 위기와 고비들 마다 왕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치며 함께 했다.

그런데 다윗 유언에 이 요압에 대한 내용이 있다. 그를 백발로 평안히 음부에 내려가지 못하게, 즉 편히 눈감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 그 충성스러운 신하를?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다윗의 결정적인 명령을 거역하고 마음대로 할 때가 많았다. 가시 같았지만, 어쩌지 못하고, 불충을 범해도 지적하지 못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충성스러워 보였던 것이다. 왜 어쩌지 못했을까? 다윗의 비밀을, 그 약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죄의 문제는 사람관계까지도 불행하게 만들었다. 관계문제가 우리 삶에 얼마나 중요한가?!

 

성경은 그래서 뭐라고 말하는가? 회개하라. 그리고 주님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왜 바울이 탄식했는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게 어디 마음처럼 쉬운 문제인가?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지체 속에 다른 법이 있어 죄의 법으로 사로잡는 것을 경험한다(롬7:12-23).

 

다윗을 보자. 왕궁 옥상을 거닐며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무수히 많은 별들을 헤아리듯,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혜가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하늘에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렸다.

섰다고 생각한 순간, 왕궁 아래를 내려다보게 됐다. 목욕하는 여인이 보였다. 순간 불일 듯 일어나는 것이 있었다. 정욕이었다. 잠언은, 유혹에 사로잡힌 순간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을 매이러 가는 것 같도다.”(잠7:22) 이것이 죄에 속절없이 끌려가는 인간의 모습과도 같은 것이다.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에 산불이 나면, 그 연무 때문에 이웃나라들에게까지 큰 피해를 준다. 불을 쉽게 끄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팜오일과 불씨가 만나서 이다. 작은 불씨라도 살아있으면 눈에 띄지 않고 팜오일에 붙어서 살아있는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후와 바람의 조건이 맞으면 큰 산불로 이어진다.

바울이 ‘내 지체 속에 한 다른 법이 있다.’고 하는 것이 이것 아니겠는가? 죄의 법이 우리 안에게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언제든 우리 안에서 살아있다가 방심한 탓에 크게 일어난다. 우리의 삶, 행복, 운명을 삽시간에 다 태워버릴 수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예외는 없다. 히스기야는 이스라엘에서 여러모로 칭송받는 왕이었다. 이 만한 왕이 전무후무하다. 중병에서 살아나 병문안을 온 바벨론 사신을 만날 때, 회복의 기쁨 때문에 잠시 자만한 모습을 보였다. 너무나 사소한 문제였다. 그래서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런데 그 때문에, 먼 훗날 유다가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불씨가 되었다.

우리의 운명은 무엇인가? 우리의 운명은 죄로 인해서 저주받고 재앙을 만날 운명이요, 시커멓게 타버릴 위험한 운명이다.

이것을 잊지 말라. 겁주려는 게 아니다. 지금 나도 모르게 짓는 죄가 먼 훗날 재앙의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은 이미 문 앞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하루 속히 죄에서 돌아서라. 무너지는 건물에서 빨리 벗어나야 하는 것처럼 빨리 죄에서 벗어나라. 주님께 진심으로 회개하고 나아가라.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오라고 부르시는 주님을 속히 찾으라. 마음이 식어 있거나 느슨해져 있다면 더욱 그리하라.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주가 되신다. 예수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결국 성경이 우리에게 들려주려고 하는 핵심은 바로 이 복음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한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으시고 부르신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죄로부터 대신 죽으셨다. 그래서 주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매를 맞고 징계를 받아야 마땅하지만, 이사야가 예언했던 것처럼, 주님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다.”, “그가 찔림은 울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나음을 받았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기로 이미 결단했는가? 우리는 구원받은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저주받을 운명을 복받을 운명으로 독생자 아들 예수를 아끼지 않으심으로 바꾸어 놓으셨다. 식어진 가슴도 다시 뜨거워지길 바라신다. 소원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도 다시 새롭게 하시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어떤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라시는가? 사순절 셋째 주일 우리가 통회하는 마음으로 결단하자.

첫째 가증한 것을 버리라.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둘째 흔들리지 말라.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다. 우리를 유혹하는 것은 무엇인가? 속절없는 세상의 재미와 유혹 때문에 더 이상 흔들릴 이유가 없다.

셋째 하나님의 뜻(진실, 정의, 공의)을 깨닫고 믿으라. 이것은 잠시 후에 더 생각해보겠다. 새로운 사명과 소명을 부여받고 확신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 전에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실까? 주님은 이미 우리는 집나간 탕자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을 입구에서부터 애타게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가르쳐주셨다.

첫째, 다 잃어버리고 아무 것도 없어도, 내 손에 든 것이 없어도 괜찮다.

둘째, 동네어구까지 와서도 끝까지 망설이고 흔들릴지 모르는 아들을 위해 마중 나오신다.

셋째,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하며 종이라도 되겠다고 무릎 꿇는 아들의 신분을 최상으로 복권시키신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속상할 때, 속 태울 때, 이때는 어떤 상태인가?’ 죄를 짓고 있는 경우인가? 견디고 참고 인내할 때 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견디고 참고 인내할 때이다. 속 태움이나 속상함을 풀기 위해서 죄를 범한다. 그런데 이것도 기억하라. 죄를 짓고 나면 그 허탈감의 ‘재’만 남는다.

 

어쩌면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지게 된 모습이라든지, 대신 십자가를 져야 하는 상황을 만날 지도 모른다. 예수님 때문에 화를 참고, 억누를 때도 있고, 인내해야할 때도 있다. 자발적일 때도 있지만 본의 아니게 그럴 때도 있다. 물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사셔야 하지만, 속상하고 괴롭기도 하다. 속이 타고, 타지도 않은 채 태워짐에 대한 경험을 한다. 그리고 숯덩이가 된다.

 

희망이 있을까? 율법 안에서 역대 왕들이 저주와 재앙을 당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직도 죄인된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희망이 있는 것이다.

 

양선희 씨의 시가 떠올랐다.

 

“누가 참숯을 한 가마 보내왔네. 쌀통에 두면 벌레를 막고, 옷장에 두면 습기를 먹고, 냉장고나 화장실에 두면 악취를 제거하고, 거실에 두면 공기를 정화하고, 장독에 넣으면 장맛이 좋아지고, 베개에 넣으면 머리가 맑아지고, 곱게 갈아 물에 타 먹으면 속병이 씻겨질 거라며, 참이지 못한 것을 속속 흡수하는 놀라운 색을 얻은 참숯을 보내왔네.”

 

그러면서 이렇게 자문한다.

 

“나도 생을 잘 불태우면 한 번 더 타오를 수 있는 불씨를 얻을 수 있을까?”

 

이것이 아까 잠시 후에 더 생각해보겠다는 내용이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타보지도 못하고 태워진 존재가 된지도 모른다. 참느라, 인내하느라, 절제 하느라, 손해 보느라,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따르면서 말이다. 여전히 숯처럼 까맣고 죄인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은 우리는 숯처럼 다시 타오르고, 누군가의 불씨가 되어주고, 정화해줄 수 있는 참숯으로 변화되는 기쁨의 소망이 있는 것이다.

죄의 문제와 늘 씨름하며 괴로워하며 시련을 당할 때도 있다. 그러나 속사람으로 강건케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성령으로 태우셔서 참숯처럼 사용하시기를 바라신다.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2b)

여전히 죄인인 우리에게서 정말 하나님의 영광이 빛날 수 있을까? 이런 물음으로 주님을 묵상하고 있는데, 누군가 이런 시를 보내왔다.

 

그 사람의 손을 보면 (천양희)

 

구두 닦는 사람의 손을 보면 / 그 사람의 손을 보면 / 구두 끝을 보면 /

검은 것에서도 빛이 난다 / 흰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

창문 닦는 사람을 보면 / 그 사람의 손을 보면 / 창문 끝을 보면 /

비누거품 속에서도 빛이 난다 / 맑은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

 

구두약이 묻은 손을 봐라. 그 손으로 광을 낸다는 것이, 모순처럼 여겨진다. 안될 것처럼 여겨지지만 광이 난다. 창문 닦는 사람의 손을 보면, 세제 때문에 거칠고 갈라졌는지는 모르지만 창문을 맑게 닦아낸다. 맑은 것만이 빛나게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안에서 거듭나, 이와 같은 일들을 감당하길 바라신다. 주님을 믿고 회개하며 돌아올 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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